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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스코어 보이

격투 게임 황금기의 아케이드 키드

by 마이즈 Feb 03. 2025

“아도겐~ 아도겐~”


미국 산호세의 어느 마트 앞. 20대로 보이는 키 큰 청년이 게임을 하고 있었다. 초등학생이던 나에게는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너무 높은 곳에 있었으니까. 한국과 달리 미국 오락실은 서서 하는 건가 싶었다. 금발 머리 친구 데이믄에게 손짓을 했다. 그가 밟고 올라갈만한 블록을 하나 가리켰고 그 위에 올라가서야 화면을 볼 수 있었다. 코끼리 앞에서 대머리 인도인과 싸우는 금발의 남자. 그가 장풍을 쏠 때마다 소리가 났다. 역시 미국은 다르네. 한국에서 본 게임과 다르게 수준이 아주 높아! 귀국 후에도 그 모습이 한동안 아른거렸다.

미국에서 처음 접하게 된 스트리트파이터2

중학생이 되며 가장이 되었고 돈을 벌어야 했다. 닥치는 대로 일을 하다가 문득 오락실에서 일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동전만 바꿔주면 되니 힘들지도 않을 테고 교환소 안에서 손만 내미는 일이라서 나이가 중요하지도 않을 터였다. 그렇게 여기저기 오락실에 일자리가 없는지 찾던 중 아저씨 한 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새벽에도 올 수 있냐? 당연했다. 낮에는 다른 일을 하면 되니까. 그렇게 가게 된 곳이 불법 오락실이었다.

불법 영업을 하던 심야 오락실.

불법 오락실이라고 해서 카지노나 룰렛 같은 도박 종류가 있는 곳은 아니다. 밤 10시가 지나면 셔터를 내리고 뒷 문으로 몰래 손님을 받는 형태였다. 교환소 안에서 쪽잠을 자도 좋다고 했다. 손님이 동전을 바꿔달라고 두드릴 때만 잘 일어나라고. (동전 교환기가 개발되기 이전이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시간당 1000원인가 2000원을 준다고 했다. 하룻밤을 세면 거의 만원이 들어온다. 당시 중학생이 벌 수 있는 금액으로는 상당히 컸다. 담배 피우거나 술을 마시며 게임하는 아저씨들이 많아 처음에는 무서웠지만, 다들 나를 좋아해 주었다. 가끔 싸움이 붙을 때면 아저씨들이 나에게 들어가 있으라고 하고 알아서 정리를 했다. 어쩌면 내가 있어서 분위기가 좀 더 나아졌을지도 모르겠다.

주요 고객은 험악한 아저씨 들이었다.

여기에는 미국에서 본 그 게임이 있었다. 스트리트 파이터 2. 다른 오락실에도 인기가 많아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이곳에서는 조금 더 특별했다. 아저씨들이 돈내기를 했기 때문이다. 게임을 할 때 지폐를 위에 얹어두는 것이 신호다. 그 사람에게 도전을 해서 이기면 지폐를 가져가지만 졌을 때는 같은 금액을 지불해야 한다. 퍼즐 게임으로 내기를 거는 사람도 간혹 있었지만 대부분은 스트리트 파이터 2에 돈을 걸었다. 솔직히 부러웠다. 하루 밤을 꼬박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 게임 한 판에 오가는 것이다. 새벽 네다섯 시가 되면 아저씨들이 빠졌는데, 그때부터 이 오락실은 나만의 연습장이 되었다. 충분히 연습이 되었다고 생각해서 내기에 참가하기도 했지만 아저씨들을 이기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지하세계에서 수행하면 강해질것 같지? 현실은 그런것 없다

격투 게임은 학폭의 타깃이 된 나의 울분을 풀어주었다. 새벽 오락실에서는 형편없이 패배했지만, 아이들과의 대전에서는 나름 잘하는 편에 속했다. 이 것이 아저씨들과의 특훈 덕분이 아닐까 싶었고, 모르는 아이들을 쓰러뜨리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그러다 보니 동네 오락실에서 나를 알아보는 아이들이 하나 둘 생겼다. 학폭을 당하는 입장에서 학교는 지옥이었지만, 오락실은 나의 자존감을 살릴 수 있는 장소였다. 그렇게 격투 게임에 점점 더 빠져들었다.

격투 게임의 황금기가 열렸다

스트리트 파이터 2 이후, 격투 게임은 말 그대로 쏟아져 나왔다. SNK에서 나온 100메가 쇼크 시리즈는 충격이었다. 이렇게 커다란 캐릭터들이 부드럽게 움직이다니! 연출은 또 어떻고! 불법 오락실이 단속으로 사라진 뒤에도 격투 게임을 꾸준히 했고 월드 히어로즈 2에서는 명실상부한 동네 짱이 되었다. 이 기세로 용산 대회에 나가서 1등을 했다. 큰 규모를 기대하고 나갔는데, 참가자가 20여 명 밖에 되지 않는 작은 가게에서 개최한 대회였다. 하지만 첫 우승의 기쁨은 나의 자존감을 크게 높여주었다. 내가 선택한 캐릭터는 잔다르크였다. 불합리한 것에 짓밟히면서도 끝내 저항하는 혁명의 전사.

월드히어로즈2. 잔느.

아랑전설 스페셜을 하던 어느 날, 이상하게 게임이 손에 잘 잡혔다. 무아지경으로 계속해서 이겼다. 이 것이 제로의 영역인가! 격투 게임을 하며 처음으로 20연승을 달성했다. 뒤에 모인 군중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쟤 뭐야? 왜 저렇게 잘해? 집에 게임기 있는 거 아니야?”


이 날을 계기로 내기 시합을 시작했다. 불법 오락실에서 하던 대로 지폐를 슬며시 올려두었다. 이 신호를 아는 사람이 종종 있었나 보다. 보통 천 원, 컨디션이 좋을 때는 만원을 올려 두기도 했다. 격투 게임은 나의 자존감을 살려줄 뿐 아니라 소중한 수입이 되어 주었다. 동네 아이들은 단순히 나를 이기겠다는 생각에 그치지 않고 돈을 벌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도전해 왔다. 덕분에 게임할 돈을 충당할 수 있었다.

아랑전설 스페셜.

고등학생이 되며 학폭은 그쳤지만, 격투 게임은 계속해야 했다. 내기를 통해 돈을 벌 수 있었고 자존감의 중심이기도 했으니까. 당시 시대의 유행 탓인지 자연스럽게 반 별로 격투 게임 짱이 정해졌다. 우리 반은 당연히 나였고, 다른 짱들과 함께 타 학교 인근 오락실에 원정을 가서 도장 깨기를 하기도 했다. 더 강해지기 위해 일부 버튼이나 필살기를 사용하지 않는 나름의 수행을 하기도 했다. 반 짱이기는 했지만, 학교 짱은 아니었다. 진짜 격투 게임에 미친 것 같은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일도 해야 하고 그림도 그려야 했으므로 반 짱으로 충분히 만족했다.

90년대 아케이드 키드의 격투게임 시대를 그린 하이스코어걸.

당시에는 새로운 격투 게임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다 보니 게임 한 두 개만 잘해서는 동네 짱을 유지할 수 없었다. 유행하는 게임이 계속 달라졌으니까.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를 밀어낸 것은 얼굴이 동그란 고등학생이었다. 항상 미소를 짓고 있던 그 녀석과도 친해졌는데, 알고 보니 마왕과 이름이 같았다. 그 탓에 언젠가 넘어야 할 벽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처음 해보는 게임마저 잘했고 도무지 이길 수가 없었다. 킹 오브 파이터즈 94가 나온 이후에는 동네 짱의 영광을 되찾고 싶다는 생각에 값비싼 네오지오를 구매해서 집에서 연습했다. (당시 게임 매장에서 알바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좋은 조건의 중고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도저히 이길 수 없어 혼자 꾀를 내었다. 콘솔 게임이라면 못하겠지? 익숙하지 않은 비주얼 배틀이라면 어떨까? 슈퍼 패미콤과 유유백서를 들고 그 녀석 집에 갔다. 이번에도 완패였다. 이 게임 분명 처음일 텐데? 방금 조작과 하는 방법을 알려줬는데, 내가 진다고? 이게 재능이라는 걸까?

킹오브파이터즈94

3D 격투 게임의 시대가 열리며 게이머들은 철권 파와 버추어 파이터 파로 나뉘었다. 나는 버추어 파이터가 좋았다. 30대의 나는 그 게임의 제작자인 스즈키 유를 만나게 되고 인생의 큰 가르침을 얻게 되는 일이 생긴다. 당시에는 꿈조차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버추어 파이터 2에 푹 빠져 있던 어느 날, 서울의 한 오락실에서 유명인을 만났다. “아키라 꼬마”라는 닉네임을 쓰는 버추어 파이터 1위인 프로 게이머였다. 투지가 불타 올라 열심히 도전했지만 단 한판도 이기지 못했다. 그날은 차비까지 다 써버리게 되었고 새벽에 안양까지 걸어서 돌아와야 했다. 역시 넘사벽이었다.

버추어 파이터는 이후 개발자를 만나게 되며 나에게 더욱 특별한 게임이 되었다

격투 게임을 통해 많은 친구가 생겼다. 그중 맹우 조 군이 있었다. 녀석과도 다양한 게임을 했지만, 역시 기억에 남는 것은 스트리트 파이터 제로이다. 함께 대회에 나갔지만 예선 3회전에 탈락했다. 스트리트 파이터 제로 2가 나오는 순간, 다음 대회를 위해 피나는 수련을 했다. 하지만 제로 2 대회는 열리지 않았다. 물론 이 당시 연습했던 시간이 무의미하지는 않았다. 몇 년이 지나고 나서 모 대학 게임 동아리 행사에서 세가 세턴용 스트리트 파이터 제로 2 대회가 있었고 그곳에서 우승했으니까.

스트리트 파이터 제로 2

사무라이 스피리츠 4 아마쿠사 강림은 개인적으로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던 게임이다. 본래 이 시리즈에서 주력 캐릭터로 사용하던 시라누이 겐안이 나오지 않았기에 어떤 캐릭터로 할지 고민을 했다. 바사라와 겐주로를 주로 사용하던 중 한 학년 아래의 여고생을 알게 되었다. 매번 소게츠로 플레이하던 아이였는데, 나를 가볍게 이기고는 무시하는 투로 근육질 남자는 오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왠지 발끈하는 마음에 제일 체구가 작은 리무루루로 캐릭터를 바꿨는데, 이후 동네 짱의 자리를 다시 되찾을 수 있을 정도로 승률이 높아졌고 대회에서도 여러 번 수상할 수 있었다. 외모에 대한 편견으로 캐릭터를 고르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꼭 게임뿐 아니라 삶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무라이 쇼다운4 아마쿠사 강림

가게에서 일하다가 잠시 점심을 먹으러 나온 때였다. 가볍게 한판 하려고 들른 오락실에서 신작을 발견한 것이다. 킹 오브 파이터즈 96이었다. 기대감에 플레이를 시작했는데, 첫 플레이에 엔딩을 봤다. 뒤에 모인 인파들에게서 ‘처음 하는 게임을 깨다니 장난 아닌데!’ 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래전 아랑전설 스페셜을 하며 들었던 ‘집에 게임기 있나 봐!’라는 말과 함께 나의 격투 게임 인생의 가장 뿌듯한 기억이다. 킹 오브 파이터즈는 97에서 오로치 편 스토리가 마무리되었고, 그 이후부터 어쩐지 흥미가 많이 떨어지게 되었다. 대학생이 되며 더 이상 격투 게임으로 자존감을 유지할 필요가 없어진 것도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킹 오브 파이터즈 96. 첫 플레이에 게니츠를 이겼다

오락실에 들어서면 일단 한 바퀴 둘러본다. 새로 나온 게임은 없는지, 아는 얼굴은 없는지, 누가 몇 승을 하고 있는지. 승부욕에 불을 지피는 상대가 있다면 동전을 넣고 대전을 건다. 만약 마땅한 사람이 없다면 선택은 두 가지이다. 다른 게임을 하면서 기다리거나 혼자 연습을 하거나. 그럴 때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크게 인기가 없는 게임을 했다. 이 게임들도 누군가가 소중하게 만든 것일 텐데, 외면당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나만 하던 용호의권3. 게임은 잘 만들었는데..

 오락실마다, 동네마다, 자주 오는 사람들과 안면을 익히고 서로의 실력을 가늠한다. 때로는 한 팀이 되어 다른 동네로 원정을 가기도 하고 돈내기를 걸기도 했다. 새로운 게임이 나오면 할 줄 모르더라도 아무런 주저 없이 도전했다. 일단 부딪치면서 배우고 쌓아 갔다. 이 멋진 문화가 사라진 것은 인터넷 때문이다. 네트워크가 발달하며 사람들은 오락실이 아닌 집에서 다른 사람과 대전하게 되었다. 닉네임과 플레이트 만으로 인식되는 상대는 그다지 사람으로 느껴지지도 않고 따라서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는다. 그 시절의 로망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지. 때로는 격투 게임에 열정을 바치던 그 시절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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