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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의 변신(이제는 D다)

스톰 대쉬~의 발견

by 시쓰남

25년 10월 29일 아침 07시 44분


또 늦었다. 아침에 잠깐 깨었을 때 오늘을 주말로 착각했다. 그래서 더 자야지 했는데 뭔가 이상한 느낌. 계속 이불밖을 나갈까 말까 고민하다 나왔다. 비록 얼마 되지 않는 독자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오늘은 연재하는 날이니까.

가을이다. 제법 가을 같은 게 아니라 가을이다. 너무 갑자기 찾아와 옷걸이에 반팔과 경량 패딩이 같이 걸려있다. 이렇게 여름과 가을이 공존하는 이 짧은 틈새를 나는 매일 통과하고 있는 것 같다.


오늘은 대학 친구 M과의 어학연수 시절을 떠올렸다. 특히 M이 영어 이름 ‘D’를 갖게 된 사연을 이야기해 보려 한다.


필리핀에 도착해서 사람들이 이름을 물으면 우린 모두 본인의 한국 이름을 말했다. 그런데 기숙사 분들은 자기소개를 할 때 난 홍길동, 성춘향이 아닌 July, Debby, Hans 등 영어 이름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상했다. 딱 봐도 한국인인데 이름은 영어식이라 뭔가 어색했다. 한국에서는 한국이름 외국에서는 영어이름, 이렇게 이름이 두 계정을 갖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우리 삼총사는 각자 영어이름을 짓기 위해 고민을 했었다. 태어날 때 지어준 이름이 있었기에 별다른 고민 없이 살아왔는데, 이곳에 오니 새로이 이름을 스스로 지어야 한 다기에 부담감도 있고 재미있을 것 같았다. 나는 ‘성(姓)’에서 착안해 Hans로 하려 했지만 누군가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마치 인터넷 ID중복으로 개설이 불가한 것처럼 그 이름을 선택할 수 없었다. 대신 성경에 나오는 한 분의 이름을 빌려와 ‘Y’로 이름을 지었다. 내 이름 이니셜에도 Y가 들어가기에 통일감을 주려고. 같이 온 동생 P는 ‘T’로 이름을 지었다.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P는 한국에서 별명을 영어이름으로 그대로 사용했다. 별다른 수고를 하지 않고 영어 이름을 갖게 되었다. 문제는 M이었다. 이거 할까? 저거 할까? 고민이 많았다. 그때 M의 연애 행적이 떠오르면서 이름도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Dash’ 어때?라고 의견을 말하고 난 천천히 작명한 이름의 뜻풀이를 시작했다.

‘Dash: 황급히 [맹렬히] 달려감, 돌진, 질주’의 뜻을 가진 단어이다. 내가 이 단어를 M의 이름에 추천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요즘말로 M은 ‘금사빠’였다. 마음에 드는 이성이 있으면 저돌적으로 돌진해서 작업을 걸었었다. 물론 성공으로 이어진 케이스가 없어서 그 작업들에 진정성은 모르겠지만. 그래서 거기서 착안한 이름 ‘Dash’, 이 이름에 형용사 한두 개를 넣으면 더 멋진 이름이 된다. 이름하야 ‘폭풍데쉬’ 같은. M은 폭풍데쉬의 달인이었고, 달인이 아니라고 우길수 있는데 난 M을 그렇게 기억하고 기억한다. 사람의 기억은 왜곡되고 다르게 남기에 난 M을 이렇게 기억하기로 정했을지 모른다. 나의 추천이 마음에 들었는지 M은 D로 새롭게 태어났다. 부르기도 싶고 발음하기도 쉬운 이름으로.

우리 셋은 새로운 영어이름을 가지고 필리핀 일로일로에서 다시 태어났다. 난 Y로 M은 D로 P는 T로. 처음이라 부르기 어색한 이 이름들을 나중에는 입안에 착착 감겨서 부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이래서 사람을 적응의 동물이라 하는가 보다. D를 부를 때 그냥 부르는 것보다 꾸며서 부르는 게 한층 더 어감이 좋았다. 더 있어 보이고 멋져 보였다. 그래서 보통은 D라고 불렀지만, 행사가 있거나 우리의 D를 더욱 부각해야 하는 날이면 ‘Storm’을 붙여 불렀다. 좀 멋져 보이지 않는가? ‘스톰대시’ 폭풍 같은 열정을 불러올 것만 같은 이름. SD로 변신하는 날이면 시쳇말로 날아다녔다. 화려한 춤, 멋진 진행. D는 연예인 못지않은 퍼포먼스를 보이며 우리를 즐겁게 했다.


이렇게 각자의 오래된 한국 이름을 잠시 내려놓고 영어 이름으로 새사람이 되어 생활하게 되었다. 이름만 새로 하나 늘어난 것뿐인데, 아는 지인이 더 추가된 것 같은 느낌은 뭐지. M도 알고 D도 알고. 같은 사람인데 아닌 거 같고. 이제 와 돌이켜 보면, 이름 하나를 새로 얻었다는 건 단지 호칭을 바꾼 게 아니었다.

그 시절의 우리, 새로운 이름으로 새로운 세상을 배우며 자라던 시간. 이름이 바뀌자 삶의 각도도 살짝 바뀌었던 것 같다.


D는 이름이 마음에 들었는지 대학원시절 유학을 갔을 때도 그 이름을 계속 사용했다고 들었다. 너무나 D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그 시절이 떠오른다. 셋이서 뭉쳐 다니며 근처 마트도 가고, 선술집도 가고 여러 추억을 쌓으며 생활을 했었다. 다들 외국생활이 처음이라 이런저런 실수도 많았고, 그런 실수는 다 안주거리가 되어 가끔씩 회자되고. 타지에서 뚤뚤 뭉쳐 서로를 의지하며 보내 던 시간. 경제적 여건도 비슷해서 셋은 기숙사 전체가 보라카이로 놀러 간다고 할 때 가지도 않았다. 그때 당시 10만원 정도면 3~4일 정도록 다녀올 수 있었는데, 그때는 그럴 돈도 없고 다음에 애인 생기면 같이 갈 거란 핑계를 대고 가지 않았다. 기숙사 식구들이 보라카이를 간 사이 셋이서 기숙사를 전세 내다시피 사용을 했었고, 우리는 주변 시장과 마트 등을 돌며 시간을 보냈 던 것 같다. 보라카이에서 기숙사 멤버들이 돌아왔을 때 그들의 쉬지 않고 쏟아붓는 보라카이의 열변에 가지 않은 걸 살짝 후회하면서도 다음에 꼭 갈 거란 다짐을 했었다. 하지만 아직도 못 가봤다. 가보고 싶다 보라카이. 그때 우리도 거길 갔어야 했는데. 만약 그 당시로 다시 돌아간다면 꼭 가자고 내가 조를 것이다.

아니면 가족여행이라도 같이 가보자고 슬 바람을 넣어봐야 하나?


그 시절의 D, T, 그리고 Y.
이름으로 다시 엮인 우리의 젊은 날이 문득 그리워진다.

오늘은 그 시절의 폭풍 같은 친구들에게 안부나 전해이겠다.
“Storm D, T — 잘 지내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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