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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록 생활자 Nov 21. 2016

까마귀 기르기

독재에 대한 우화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는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오고, 까마귀가 울면 나쁜 일이 생긴다고 해서 까치는 길조, 까마귀는 흉조라 불렸다. 서양에서는 까치가 흉조이지만. 내겐 까마귀에 관련된 징크스가 있었던 시절이 있다. 어렸을 때 등교시간에 까마귀가 울면 꼭 지각을 하거나 교문에서 복장 불량으로 잡히거나 (명찰을 안 달았다던지 하는 사소한 것이었지만) 수업 시간에 준비물을 챙겨가지 못해서 혼이 나곤 했다.


사실 똑같은 상황에서도 까마귀가 울지 않으면 지각을 해도 교문에서 붙잡히지 않거나 대충 넘어갈 수 있었는데 까마귀가 울었던 날은 1분 차이로 지각을 한다던지 하는 일들이 있어서 등교 시간에 울어대는 까마귀 소리를 듣는 날이면 이상한 불안감에 휩싸이곤 했다.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지각할 때마다 까마귀가 울었고 까마귀가 울었던 날은 수업시간에 들어가기 전까지 호되게 혼이 났다.


다른 날은 봐주다가도 이상하게 까마귀가 운 날만 호되게 야단을 치곤 했다. 그래서 등교시간에 까마귀가 울면 짜증이 났던 기억이 난다. 그런 기억 때문인지 지금도 까마귀를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 까마귀 자체보다는 까마귀 울음 소리를 싫어한다고 하는 것이 더 맞을 것 같지만.
 
제목에 '까마귀'가 들어가는 영화 '까마귀 기르기'는 그래서인지 어쩐지 불길한 기운을 담고 있는 영화인 것 같은 느낌을 줬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많이 어둡고 죽음에 대한 상징들이 많이 등장한다. 까마귀 기르기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고아가 된 세 자매가 방학 동안 자신들을 돌봐주러 온 이모와 식물인간 상태인 외할머니와 함께 지내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영화 까마귀 기르기

둘째인 아나가 이 영화의 화자로 등장해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아나는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다 침대에서 눈을 뜬 채 죽어 있는 광경을 목격한다. (아마도 복상사(腹上死 )였던 듯) 아나는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가 병이 들었고, 그로 인해 어머니가 죽었다고 생각해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는다. 장례식에서 아나만이 아버지의 이마에 입을 맞추지 않는다.


아나의 아버지는 군인으로, 장래가 촉망되는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와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어머니는 그와 결혼한 후  세 딸을 낳고 전업주부가 된다. 그러나 그는  가정에 충실한 남편이 아니었다. 세 자매의 집에는 로사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로사는 병약한 아나의 어머니를 대신해 아이들을 돌봐주는 유모였다. 아나의 어머니는 남편이 로사와 바람을 피운다고 생각해 그와 잦은 다툼을 벌였다. 아버지가 바람둥이었다는 사실은 세 자매가 이모가 잠시 외출을 한 사이 이모의 방에 들어가 이모의 가발과 옷을 걸치고 립스틱을 바른 뒤 아버지와 어머니의 흉내를 내는 장면에서 알 수 있다.
 
아나는 자신이 그날 밤에 본 것에 대해 언니에게 털어놓고, 언니는 이모에게 그 이야기를 하지만, 이모는 아나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모는 미혼으로 군인 애인이 있다. 로사에게도 추파를 던졌던 남자로 로사는 이모와 그 군인 사이를 질투한다.
 
이모는 세 자매를 돌보는 게 지긋지긋하다. 아이들이 말도 잘 듣지 않자 그녀는 군인 애인에게 세 자매를 기숙사에 보내겠다고 말하고, 그 이야기를 들은 아나는 찬장 아래에 숨겨 두었던 독약(아마도 비소인 것 같다)을 우유에 타 이모에게 건넨다.
 
하지만 다음날 그녀는 멀쩡하게 일어나고, 아이들은 방학이 끝나 학교에 가게 된다.  영화는 학교에 가는 세 자매의 모습을 보여주며 끝이 난다.
 
이 영화 속에서 아버지는 '혐오'의 대상이며 여성들을 억압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이 영화 속에서 아버지의 자리는 거의 희미하거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그려진다.이모나 외할머니 등 - 세 자매를 돌봐주는 것도 어머니와 관계된 사람들이다.  장래가 촉망되는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가 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만나 결혼한 후 집 안에서 아이들만 돌보며 생활했다는 점이 이를 잘 드러낸다.


아나는 피아노를 치는 어머니를 동경했던 것 같다. 아나는 어머니가 죽자 '죽음'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면서 '죽음'을 동경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아나는 기르던 토끼가 죽은 이후에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그저 살아 있는 것은 언젠가 죽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인다.
 
아나는 자신들을 돌봐주러 온 이모가 여러 가지 규칙을 강요하며 그 규칙 속에 자신들을 세워 놓으려고 하자 이모를 죽이려고 한다. 하지만 아나의 그러한 시도는 수포로 돌아간다. 이 영화는 프랑코 독재 정권 말기의 스페인 중산층 가족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영화다. 아버지는 독재자로 그려지고, 어머니는 그 밑에서 숨죽여 살아야 했던 억압 받는 민중으로 그려진다. 아나는 그러한 모습을 목격하면서 '죽음'이 오기를 기다린다.


이 영화 속에는 죽음에 관한 상징이 많이 나오는데 이 영화 속에서 아나가 말한 죽음은 부정적인 의미라기보다는 그 '시대의 종말'을 원하는 마음을 보여주기 위해 쓰여진 상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세 자매가 이모를 따라 시골 마을에 잠시 갔다가 바깥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술래잡기를 하는 장면에서도 이러한 점은 잘 드러난다. 아나는 술래가 되어 덤불 사이에 숨은 동생과 언니를 찾아낸 후 죽으라고 말한다. 동생과 언니는 쓰러지고, 아나는 주문 같은 것을 외우면서 그들을 다시 살려낸다.
 
이 장면은 독재 정권 아래에서 얼른 그 시대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시대가 오기를 갈망하는 억압 당하던 민중의 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장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의 제목에도 등장하는 '까마귀'는 엄마와 아빠를 잃어버린 세 자매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유'를 얻은 민중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까마귀 집단에는 리더가 없다고 한다. 독재 정권 아래에서 숨죽여 살아야 했던 민중이 갑자기 자유를 얻게 되었을 때의 '혼란'을 표현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렵게 자유를 획득했지만, 세 자매는 다시 새로운 규칙에 길들여져야 했고 (이모가 세운 규칙/이 영화 속에서 이모는 새로운 독재자로 그려진 것 같다) 방학이 끝나자 다시 학교로 돌아가 새로운 규칙 속으로 자신들을 밀어 넣어야 했다.


결국 참된 자유를 얻지 못한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는 죽어서나 얻을 수 있는 것이었을 테니, 아나가 죽음을 동경하는 심리도 (물론 잘못된 것이기는 하지만) 한편 이해는 간다.
 
뛰어난 작품인 것 같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그렇게 재미있는 영화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궁금하다면 한 번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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