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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록 생활자 Nov 21. 2016

스토커

한 소녀의 새장 탈출기

 
성장에는 고통이 따른다. 육체적 성장이든, 정신적 성장이든. 한 소녀가 있다. 집과 학교 밖에 모르는. 소녀는 어머니보다 아버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소녀는 아버지와 함께 새를 사냥하러 다닌다. 새는 일반적으로 자유의 상징이다. 그런 새를 죽인다는 것은 자유 보다는 속박 아래 생활하고 있으며 억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으로 읽힌다. 이는 소녀의 옷차림에서 드러난다. 블라우스 단추를 목 위까지 꽉 채워 잠그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주름 치마를 입는다. 소녀의 집은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숲 속에 자리하고 있다. 소녀에게 집은 새장과 같은 곳이었을지 모른다. 자신을 가두고 억압하는. 그러나 소녀는 여기서 빠져나올 방법을 알지 못한다.
 
모범 학생인 소녀의 유일한 일탈은 아버지를 따라 사냥을 나가는 것. 그것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가 죽은 채 발견되고 소녀 앞에 존재 자체도 몰랐던 삼촌이 나타난다.


영화 스토커


이 삼촌은 소녀의 억압된 욕망, 소녀가 금기시하던 어떤 것을 바깥으로 꺼내 내보이게 만듦으로써 소녀를 그 집에서 탈출시킨다. 사실 외피만 보면 이 이야기는 싸이코패스에 관한 이야기다. 소녀의 삼촌은 어렸을 때 자신보다 손아래 동생을 더 예뻐하는 형의 모습을 보며 막내 동생에게 질투심을 가졌고 그 결과 자신의 동생을 죽이고 정신병원에 감금된다. 오랜시간을 정신병동에서 지냈던 그는 가족의 품을 그리워했고 그 누구보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만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동생을 자신의 가족과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았던 형은 그를 자신의 가족으로부터 멀리 떼어 놓으려 한다.
 
그는 이에 분노해 형을 죽인 뒤, 형의 딸인 소녀의 생일날 형의 가족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소녀의 삼촌은 소녀로 하여금 살인 충동을 부추기고, 금기시된 어떤 것에 손을 대게 만든다. 영화 속에서 삼촌으로 인해 소녀 역시 싸이코패스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영화 스토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엄마와 딸의 관계다. 보통 엄마와 딸의 관계가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다정하고 친밀한 것으로 그려지는 것에 반해 이 영화 속에서는 다소 냉랭하게 그려진다. 딸은 엄마에게 별다른 정이 없는듯 보이고 이는 엄마 역시 마찬가지다. 삼촌의 등장으로 인해 엄마와 딸은 연적 관계로 변모한다. 이는 아빠를 사이에 두고서도 이 모녀 관계가 비슷한 양상을 보였을 것이라는 걸 짐작케 한다. 모녀 관계는 같은 여자로서의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관계인 동시에 한 남자(아빠/남편)를 공유하는 관계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 스토커

딸은 젊은 나이에 미망인이 된 엄마가 (게다가 그녀의 어머니는 젊을 뿐만 아니라 아름답기도 하잖은가) 삼촌에게 관심을 보이고 그와 가까워지자 삼촌에게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다. 더불어 성에도 눈을 뜨게 된다. 삼촌이 등장하기 전에는 그녀는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남학생들에게 전혀 마음을 주지 않았고 그 어떤 관계도 맺지 않으려 한다. 이성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였던 소녀는 엄마와 삼촌 사이가 심상치 않아 보이자 삼촌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영화 스토커


그리고 엄마와 삼촌이 육체적 관계를 맺는 모습을 보고 빗속을 달려 나간다. 그녀가 찾아간 곳은 자신을 좋아하는 남학생이 자주 가는 곳이었고. 소녀와 남학생은 육체적 관계를 맺기 직전까지 가지만, 충동적으로 육체적 관계를 맺으려 했던 소녀가 이를 거부하면서 파국으로 치닫는다.
 
소녀는 마침 등장한 삼촌에 의해 성폭행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지만 싸이코패스인 삼촌은 그 남학생을 죽이게 된다. 소녀와 삼촌은 공범이 되고, 동시에 묘한 동지애를 나누게 된다.


영화 스토커

소녀는 삼촌의 살인 장면을 목격한 충격과 공포, 또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리지만, 동시에 샤워를 하면서 그 살인의 장면을 떠올리며 수음(手淫)을 할 정도로 야릇한 성적 쾌감을 느낀다. (이 장면이 그녀 역시 싸이코패스라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내준다. 우리나라 영화 추격자의 실존 인물이었던 연쇄 살인범이 살인을 저지르며 성적 쾌감을 느꼈다는 사실은 익히 잘 알려져 있는데 그는 싸이코패스인 것으로 드러났다. ) 그러나 소녀는 삼촌을 배신하고 집을 떠난다.


그녀는 삼촌을 죽임으로써 자유를 얻는다. 삼촌 역시 가족의 일원인 이상 집과 떨어질 수 없는 존재이고, 그녀가 저지른 일들에 대해 모두 알고 있는 인물이었으므로 삼촌과 함께 집을 떠난다는 것은 동시에 새로운 집(새장)에 다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는 삼촌을 죽이고(금기를 깨뜨리고) 집을 버리면서 자유의 몸이 된다. 어떻게 보면 삼촌을 이용해 집을 탈출(독립)한 것으로도 볼 수 있겠다.


싸이코패스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한 소녀가 자유를 쟁취하는 과정을 그린 성장통에 대한 이야기로 읽혔다. 집을 버린다는 것은 곧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동시에 이 영화 속에서 그려진 살인의 행위는 과거의 자기 자신을 죽이는 행위로도 보였다. 소녀는 과거의 자신을 죽임으로써 새롭게 태어난다.


여기서 소녀의 과거는 곧 삼촌일 수도 있다. 삼촌은 소녀와 달리 집(가족)에 집착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삼촌을 죽임으로써 집을 떠날 수 있었다는 설정은 삼촌의 페르소나가 소녀인 동시에 소녀의 숨겨져 있던 이드를 자극하는 인물이 삼촌일 수도 있음을 드러낸다. 좀 끔찍할 수도 있는 영화지만, 궁금하다면 한 번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영상미도 좋았고,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다. 작품성이 있는 영화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떤 품격이 느껴지는 영화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라는 게(스타일이) 뚜렷하게 느껴지는, 영화였다는 것이 가장 좋았던 점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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