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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매오 Jan 02. 2022

혼자 걷는 골목은 하나도 쓸쓸하지 않고

퇴근길에 주로 하는 생각

2019년 잡코리아에서 직장인 1301명에게 출퇴근에 걸리는 시간을 물었다. 거주지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는데 평균적으로 경기도 거주민은 134.2분, 인천 거주민은 100분, 서울 거주민은 95.8분이 걸린다고 답했다. 수도권 직장인은 하루에 114.5분을 출퇴근에 쓰고 있는 셈이다(비수도권 직장인은 59.9분). 집은 인천, 직장은 서울인 나는 출퇴근에 약 150분을 쓴다. 경기도 평균보다 살짝 더 걸린다.


출퇴근길 지하철에서는 주로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읽는다. 귀는 이어폰으로 막고 눈은 스마트폰 스크롤을 좇는다. 그러니 출퇴근길에 지나치는 공간들은 공간이 아닌 시간으로만 존재하는 셈이다. 그저 흘려보내는 시간. 신도림, 구로, 개봉, 역곡, 부천, 송내…… 그 이름들은 구체적인 풍경이라기보다는 ‘부평까지 남은 시간’을 나타내는 표식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에도 누군가의 일상이 있는데.


특히 퇴근길은 외딴 섬에 들어가는 의식과 같은 경험이다. 지하철을 타고 간 끝에 도착한 동네의 풍경을 바라보며 느꼈던 정서는 ‘설국’의 유명한 첫 문장에 담긴 그것과 비슷했다(“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또는 마치 광장 외곽에 위치한 밀실로 몸을 구겨 넣는 과정을 느리게 재생하는 듯하기도 했고, 청소를 끝낸 로봇청소기가 충전기로 돌아가는 모습 같기도 했다.


퇴근길 정서도 측정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나는 어느 정도 수준일까.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낯선 곳에 있다는 사실은 좀 쓸쓸했다. 아는 길도, 사람도 없는 곳에서 보내는 일상은 마치 여행 같았다. 설렘은 사라지고 여독만 꼬박꼬박 쌓이는 지루한 여행(이것도 여행이라 할 수 있나?). 집은 그저 불편한 잠자리였다. 불 끄고 누운 방은 침대만큼 좁았고 우주만큼 고독했다. 


얼마 전 처음으로 누군가와 함께 퇴근길 지하철에 탔다. 차라리 친한 사이였다면 각자 귀에 이어폰을 꽂고 스마트폰을 보며 갠플할 수도 있었을 테다. 하지만 그와 나는 약간의 거리가 있는, 딱 그만큼 예의를 차려야 하는 관계였기 때문에 조용조용 대화를 이어갔다. 요즘 하는 일은 어떤지, 얼마 전에 본 전시는 어땠는지, 저번에 읽은 책이 얼마나 읽기 힘들었는지, 요즘 같은 시국에 휴가는 어떻게 다녀왔는지 등등등.


문득 지하철 내부가 이렇게 조용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들리는 것이라곤 차량이 덜컹거리는 소리와 대화를 나누는 우리의 목소리뿐이었다. 고개를 돌려 그를 보기도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스마트폰을 볼 수도 없으니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그때 반대편 의자에 앉은 사람들의 얼굴과 그 너머로 차창 밖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안 들리던 것이 들리고 안 보이던 것이 보이는 경험. 시간만 있던 퇴근길에 공간이 들어왔다.


그가 내리고 바로 다음 역이 내가 내릴 역이었다. 작별인사를 하고 겨우 몇 분 뒤면 나도 집에 도착하는 것이다. ‘외딴 섬에 들어가는 의식' 운운하며 자못 심각한 얼굴로 고독을 씹기엔 지나치게 짧은 시간. 그 비유를 다시 활용해 말하자면 난 여전히 육지에 머물고 있는 셈이었다. 어딘가에 연결돼 있다는 감각이 끊어지지 않고 유지됐기 때문이다. 그 날만큼은 역에서 집까지 혼자 걷는 골목은 하나도 쓸쓸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퇴근길에 나는 여전히 혼자다. 하지만 이제는 공간에 대한 인식을 달리 하기 시작했다. 버티는 게 아니라 살아가는 것. 그 감각을 이 공간에서도 어렴풋이 느낀 덕분일까. 그제서야 이 동네에서도 일상이 보였다. 내 인생의 챕터가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일상성의 낙수효과랄까, 별 약속이 없을 때는 집에서 빈둥거릴 줄도 알게 됐다. 돈이든 시간이든 낭비는 여유로움의 가장 뚜렷한 증거다.


“병연 님은 올해가 끝날 때 본인 모습이 어땠으면 좋겠어요?”


올해 초 한 모임에서 서로의 새해 다짐이나 바람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 내 대답은 아직 생생하다.


“서울과 인천을 일상으로 느끼면 좋겠어요. 사실 지금은 어딜 가든 여행자의 마음이 들거든요. 피곤해요.”


다짐보다는 바람에 가까웠던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일상을 구성하는 시간 중 가장 무가치하다고 여겼던 시간, 퇴근길이 준 선물이었다.


2020.09.23




*제목은 재달의 'Happy Day'라는 노래 속 가사에서 따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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