얌전히 앉아 기다릴 테야 / 감은정
얌전히 앉아 기다릴 테야
습관처럼 문을 잠그진 말아야지
처음으로 만날 마지막
괜히 설레 문을 활짝 열어 두지 않게 잘 참을 거야
네가 언제든 열고 들어올 수 있게
그러나 밖에서 내 모습이 보이지는 않게
처음이라도 익숙할 거야 금세 알아 보겠지
원래부터 그런 거니까
종종 너를 떠올렸으니까
하지만 반가워 하지는 않을 거야
기대에는 늘 못 미치는 법이니까
몇 번인가 먼발치서 스쳤던 그 때
모습 그대로일까
나에겐 좀 더 무던했으면, 아니, 나는 좀 더 무던했으면
낙엽 같은 피부를 맞대고 깊은 폐부를 열어야지
잠시 섞은 숨을 참아야지
그때까지
무심히 기다릴 테야
습관처럼
문을 걸지 않고
감자탕을 집어 던진 적이 있었다. 추운 겨울날 니 손이 더 시렵네 내 손이 더 시렵네 하며 투닥거리다가 정말로 감정이 상해 싸움이 되었다. 체는 길거리에서 쪽팔리니까 조용히 오라고 했고 그 말이 무섭기도 하고 또 웃기기도 해서 더 발을 구르며 소리를 쳤었다. 그랬더니 체는 내 손목을 움켜쥐고 성큼성큼 걸어 당시 체가 살던 원룸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내 어깨를 꽉 움켜쥐고 막 흔들어대길래 그 가슴팍에다가 감자탕 2인분 포장한 것을 집어 던졌다.
스티로폼 대접에 들어 있던 시래기가 싱크대서부터 조그만 책상 의자에까지 널렸고 시뻘건 감자탕 국물이 벽지고 이불이고에 다 튀어 얼룩을 남겼다. 우리는 잠시잠깐 그 꼴을 말 없이 쳐다보았다. 나는 웃음이 빵 터질 것 같으면서 눈물이 빵 터질 것 같아서 무슨 말이라도 먼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프다고! 니가 그렇게 잡으면 아프단 말이야!
체는 잡고 있던 어깨를 놓고 신발을 가지런히 벗더니 내가 던진 감자탕을 치우기 시작했다.
매일매일 다른 계절을 살았다. 365개의 계절이 왔다. 어떤 계절이든 혹독했다. 나는 살아남지 못할 것 같았다. 체는 나를 지켜주지 못할 것 같았다. 체의 품은 충분히 낙낙하지 않은 것 같았다. 애인인 체도, 친구인 체도, 가족인 체도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나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았고 구석에 서 있었다. 물론 등 뒤로 현관 손잡이가 잡혔지만 그걸 열고 나갈 수 있을지 잘 몰랐다. 그래도 되는 것일까 나는 준비가 되었을까.
놀랄 때마다, 슬플 때마다, 무서울 때마다, 불안할 때마다 나는 소리를 질렀고 손에 있는 걸 집어던졌다. 마치 소리를 어떻게 말로 바꿔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낯선 언어를 쓰는 사람을 만났다는 듯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무슨 수를 써도 내가 만나는 365개의 계절에 대해서 설명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슬프다는 말은 슬픈 내 감정을 담기에 너무 작은 말인 것 같았다. 맞는 말을 찾기 위해서 책을 읽었지만 찾는 말은 어디에도 없는 것 같았다. 감자탕을 던지는 게 훨씬 쉬운 일이었다.
습관처럼 설레이지 말아야지. 밖에서 안이 보이지 않도록 해야지. 문은 열려 있지도 잠겨 있지도 않게. 내가 이렇게나 벌벌 떨고 있다고 그러니 문턱을 넘는 네가 감당해야 할 것은 내 손에 들린 감자탕 봉투라고. 말해주진 않지만 보면 알 수 있도록. 계절의 한가운데에서 나는 떨고 있던 어깻죽지를 한껏 펴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곧 다음 계절이 찾아오겠지. 결국은 여기저기 널린 시래기와 시뻘건 국물이 남긴 얼룩을 보게 되겠지.
특별한 사람의 생일이라 편지를 쓰려다가 시집을 폈다. 정식 출판본이 아니라 단 한 권 가지고 있던 것을 그에게 주었었다. 언젠가 그 시집의 리뷰를 쓰자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쓰려고 할 때마다 어느 한 편을 고르기 쉽지 않아 내려놓게 되었다.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고 나면 손목에 대해서 쓴다는 게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귓볼에 대해서 쓴다는 것도 어쩐지 부자연스러웠다. 옆구리에 대해서는? 엄지발가락 마디에 대해서 쓴다는 것도.
결국 시집에 대해서, 사람에 대해서 쓰자고 다짐했으나 너무 큰 일이라 아직 못하고 대신 너에게 생일 축하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습관처럼 문을 열 때마다, 내가 습관처럼 문을 잠글 때마다, 설레여서 벌벌 떨고 있을 때마다 지저분한 방보다 먼저 지저분한 내 마음을 끌어안아주어 고맙다고 써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