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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이름은, 싼리툰의 아침

내게로 와서 꽃이 되는 너

by 심루이

꿈에 그리던 대학생이 된 세 살 터울 오빠 앤드류(워낙 자유로운 영혼이라 고등학생 때부터 대학생스럽게 생활했지만)는 막 고등학생이 된 나와 내 친구들을 종종 신촌으로 불러서 학교 구경을 시켜주곤 했었다. 학교 이름이 지나치게 크게 쓰여 있는 학교 점퍼를 입고 구석구석을 소개하고, 학교 앞 골목의 닭갈비 집에서 밥을 사줬다. 다정하게 내 친구들 이름을 부르며 대화하는 스무 살의 앤드류는 매우 낯설었었다. 친구 몇몇은 하트 모양의 눈을 하고 ‘오늘부터 나는 너를 아가씨라고 부를게’라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으니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 비슷비슷한 이름을 헷갈리지 않고 기똥차게 기억해서 정확하게 부르는 걸 놀라워했더니 앤드류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사람 이름 불러주는 게 그게 진짜 중요한 거거든’ 했었더랬다. 그땐, 뭐야 느끼해…라는 현실 남매 리액션을 선보였었지만, 살아보니 그것은 진리였다.


사람의 이름이라는 건, 그리고 누군가 나의 이름을 정답게 불러 준다는 건 거대한 힘이 있었다. 굳어 있는 마음마저 조금은 말랑거리게 할 수 있는 마법 같은 힘. 김춘수 시인의 시구처럼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던’ 그가 내게로 와서 무려 꽃이 되어주는 것이 바로 이름이었다.


2021-09-17-11-01-50.jpg 순 우리말인 ‘이름’. ‘이름을 짓다’라는 의미인 고어 ‘잃다’의 명사형이라고 한다. 이름이라는 단어를 연필로 가만히 써보면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그리하여 너의 이름은 베이징




예전부터 나는 유난히 '이름'에 관심이 많았다. 친구들에게 "니 이름은 무슨 뜻이야?", "누가 지어주셨어?", "형제들 이름도 비슷해?"이런 생뚱맞은 질문들을 물어보곤 했었다. 이름에 숨겨진 뜻을 듣고 보면 그 친구의 이미지와 딱 맞아떨어져서 감탄하기도 했다.


그렇게 세상의 모든 이름을 사랑하며 지내 온 나에게 위기가 찾아온 건 '심이 엄마'가 되고 나서였다. 자주 연락하지만 정작 서로의 이름은 모르는 관계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아주 이상한 경험이었다. 나는 의도적으로 “전 YW이에요, 편하게 제 이름을 불러 주세요”라고 이야기하곤 했지만 그것은 나의 바람에 그칠 때가 많았다. 아이들로 엮인 관계에서 내 이름을 찾기란 쉽지 않았고 나는 늘 심이 엄마로 불리곤 했었다.

회사를 관두고 베이징에 오면서 내 이름은 더 희미해졌다. 우선 내 이름이 적혀 있는 명함이 사라졌다. 어학당에서 만나는 사람들 말고는 아무도 내 이름에 관심이 없었다.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 沈姐, 봉사자님… 내 이름을 대체하던 많은 역할들.


이름들이 이대로 희미해지게 둘 순 없지. 그리하여 베이징에서 아무도 모르게 진행하고 있는 수많은 프로젝트 중의 하나는 ‘엄마들 이름 부르기 프로젝트’다. 아이로 알게 된 사이도 조금 친해지면 일부러 이름을 물어보고 그 이름으로 부르곤 한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내 이름이 불리는 그 귀하고 다정한 순간이 좋으니까.

베이징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타국이라 더욱 반갑고, 타국이라 더욱 조심스러운 관계들도 있었다. 소중한 인연들 중 82 개띠 친구들은 가장 편안하다. 모두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을 키우고 있지만 이 모임의 주제는 아이들이 아니라 그냥 우리 자체다. 모든 친구들이 그렇듯 쓰잘머리도 결론도 없는 이야기들을 굉장히 심도 있게 한다. 했던 얘기들을 또 하면서 깔깔거린다. 서로의 이름을 마구 부르고 마구 불리는 그 순간들이 빛난다. 우리의 모든 이름은 마땅히 그래야 한다.




날씨 좋은 가을에는 일찍 출발하는 것이 좋다. 8시 30분에 6인용 차를 불러서 함께 싼리툰으로 출발했다. 오픈 시간은 조금 남았지만 운 좋게 <TIENSTIENS>에 일찍 들어가서 제일 좋은 테라스 석을 차지했다. 싼리툰은 번화한 '타이구리(太古里)'쪽도 좋지만 개인적으로는 맞은편 인터컨티넨탈 호텔 쪽이 더 좋다. 골목골목 무언가가 비밀스럽게 숨겨져 있어 타이구리가 신도시라면 이쪽은 구도시 느낌인데 나는 역시 구도시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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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이름 문화 중에 ‘小名’이라는 게 있다. 이름과 별도로 어릴 때부터 가정에서 부르는 이름이다. 주로 원래 이름의 마지막 자를 두 번 겹쳐서 부른다고 하는데, 이름과 아예 상관없는 ‘小名’을 가진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牛牛, 萍萍, 明明, 囍囍 등 귀여운 느낌이 물씬 난다. 이 문화는 처음 만나는 중국 사람들과 이야기 물꼬를 틀 때도 매우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데 놀이터에서 심이 또래 아이를 가진 엄마를 만나면 꼭 엄마와 아이의 小名을 물어본다. 한국에는 이 문화가 보편적이지 않은데, 중국은 그렇더라고요. 재밌어요. 당신의 小名은 뭐예요? 무슨 뜻이죠? 이러다 보면 5분 정도 대화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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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저는 루이루이睿睿, 심이는 차이차이才才라는 小名을 지어보았다

베이징_도시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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