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슬픈 숨바꼭질
최근 베이징으로 온 C 언니는 아직 중국어가 서툰 탓에 집안일을 봐주시는 이모님과 대화를 나눌 때 종종 번역 애플리케이션 ‘파파고’를 이용한다. 본인이 원하는 문장을 한글로 치고, 파파고로 번역된 중국어를 보여주며 대화하는 기술. 어느 날 C 언니가 이모님과 함께 점심을 먹다가, ‘엄마가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그 문장을 별생각 없이 파파고에 치는데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고 했다. 억누르고 있던 그리운 감정이 문장화된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울컥했기 때문일까. 그런 언니를 보고, 만난 지 얼마 안 된 이모님도 눈물을 보이셨다고. 말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 국적이 다른 사람들이 ‘我想妈妈(엄마가 보고 싶어)’라는 한 문장을 마주하고 눈물짓는 광경을 상상하니 나도 눈물이 맺혔다. 엄마가 보고 싶은 마음에 어찌 국적과 나이가 있을까. 할머니가 되어서도 내 엄마가 보고 싶은 게 모두의 마음일지도 모르는데…
멀리 있지만 자주 엄마를 부른다. 엄마의 지혜가 필요하거나, 이방인으로서의 삶이 막막하고 지칠 때, 아이가 나를 웃겼을 때나 자랑할만한 기특한 행동을 할 때, 맛있는 걸 먹을 때, 아니 그냥 엄마가 보고 싶은 모든 순간에. 타국에 있지만 매년 연말과 새해만큼은 함께였는데 그럴 수 없는 올해는 그리움이 더하다.
우리 엄마는 할머니가 되어서도 당신 엄마를 보기 위해 바쁘게 기차를 탄다. 그런 엄마를 나는 진심으로 부러워했다. “나도 할머니가 되어서도 엄마를 보고 싶으니까 꼭 오래 살아야 돼!”라고 협박 같은 당부를 했다. 누군가의 엄마가 된다는 건 오래 살고 싶은 소망과도 이어져 있다. 이십 대의 나는 ‘장수’에 대한 꿈이 없었는데 지금은 가늘어도 무조건 길게 살고 싶다. 아이 곁에 하루라도 더 머무르고 싶으니까.
나이를 먹었다. 어느새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엄마보다 내 나이가 더 많아져 버렸다. 그 말을 반대로 생각하면 그때 엄마가 참 어렸다. 나에겐 이 세상 전부였던, 모든 걸 다 할 수 있을 것 같이 의연하던 엄마가 어깨에 참 많은 걸 짊어지고 있었다. 가끔 생각한다. 엄마는 어떻게 지금의 나보다도 어린 나이에 그걸 견디고 해냈을까? 어떤 초인적인 힘을 냈기에 우리에게 이유 없이 신경질을 내거나, 눈물을 보이는 일도 없었을까?
엄마는 울보인 내가 마음껏 울 수 있도록 늘 자신의 눈물을 참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어디선가는 울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에게 들키지 않았을 뿐. 예능 프로그램 ‘신박한 정리’에 출연한 세 아들 엄마이자 코미디언인 정주리가 이런 말을 했다. 다들 어떻게 힘든 상황을 잘 이겨내냐고 대단하다고 그러는데 자기도 이겨내지 못한다고. ‘저도 못 이겨내요, 못 이겨내요’라며 눈물짓는 정주리를 보며 나도 엉엉 울며 공감했다. 이겨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도망칠 수는 없으니 버티며 이 시간이 무사히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시절이 누구에게나 있을 뿐.
베이징에서 엄마 생각이 가장 많이 나는 곳을 꼽으라면 용허궁 근처의 디탄(지단/地坛公园) 공원이다. 이곳은 ‘땅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공간이자 불우하고도 행복했던 수필가 스티에셩(史铁生/사철생)이 휠체어를 타고 줄곧 드나들던 곳이었다.
스티에셩은 20살 즈음 하반신 불구로 휠체어를 타는 신세가 되었다. 젊음과 열정이 불타오르던 시기에 평생 한으로 남을 장애를 짊어지게 됐으니 본인의 마음은 어땠을까? 감히 상상해 보기도 어렵다. 작가의 책 ‘我与地坛(나와 디탄)’에는 그로 인한 치명적인 괴로움과 고통이 절절히 표현되어 있다. 그는 공공연히 ‘나의 주업은 병드는 것, 부업은 작가(职业是生病, 业余在写作)’라고 웃으며 말하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집 근처 디탄 공원은 휠체어를 끌고 갈 수 있는 집 근처 공원이자, 정신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책을 보면 ‘두 다리를 못쓰게 된 후 첫 몇 해는 나는 일도, 가야 할 길도 찾을 수 없었다. 갑자기 거의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휠체어를 굴리며 늘 이곳으로 왔다. 이곳은 한 세계에서 도피할 수 있는 또 다른 세계였다.’고 적혀 있다. 그러니 그에게 디탄 공원은 생명이자, 계절이자, 친구이자 모든 것이었다.
운명의 공격에 정신이 혼미해져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여기던 작가에게는 갑자기 하반신 불수가 된 아들이 있는 어머니가 있었다. 작가의 어머니는 휠체어를 타고 매일 디탄 공원으로 떠나는 아들을 멀리서 지켜보며 행여나 나쁜 마음을 먹지는 않을까, 내내 가슴을 졸였다. 공원 귀퉁이에 숨어 아들을 지켜보며 세상에서 가장 슬픈 숨바꼭질을 했다. 자신의 괴로움에만 천착해 어머니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었던 철없는 아들은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나서야 그 절절한 사랑을 깨닫게 된다. 스티에셩의 산문에서 그 깨달음이 잘 드러난다.
‘어머니는 한 번도 "나를 좀 생각해 줘”라고 말씀하셨던 적이 없었다. 사실 나도 단 한 번도 어머니를 염두에 둔 적이 없었다. 당시 그녀의 아들은 너무 어렸고, 어머니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는 운명의 공격에 정신이 혼미해져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여겼고, 아들의 불행이 어머니에 이르러서는 그 몇 배가 된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녀에게는 갑자기 하반신 불수가 된 스무 살 아들이 있었다. 그는 그녀의 유일한 자식이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아들이 아닌 본인이 하반신 불수 이길 바랬다. 그러나 대신할 수가 없었다.’
사철생 글 일부 발췌
디탄 공원은 베이징 남부의 '티엔탄(천단/天坛) 공원'과 대칭을 이루는 곳으로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티엔탄'이 하늘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곳이라면 이곳은 땅의 신에게 제를 올리는 곳이다. 티엔탄 공원이 현존하는 중국 최고의 제단으로 면적만 천안문 광장의 6.8배인 273만m2이다. 그에 비해 디탄 공원의 규모는 소박하고 조촐하다. 하늘과 땅의 차이일까? 그런 연유로 티엔탄 공원은 늘 관광객들이 붐비지만 디탄 공원은 관광객보다는 산책과 계절을 즐기는 중국인들이 많다. 조금은 썰렁하고 허름하지만 일상의 멋이 살아 숨 쉬는 디탄 공원은 '史先生'이 매일 휠체어를 끌고 나오기에 더없이 좋은 공간이 될 수 있었을 것 같다.
내가 도저히 들어갈 수 없었던 몇몇 전당과 올라갈 수가 없어서 여러 각도에서 바라다보기만 해야 했던 제단을 제외하면, 나는 공원의 모든 나무 아래에 다 가봤고 거의 모든 풀밭 위에 내 휠체어 자국을 남겼다. 나는 그 어느 계절, 어떤 날씨, 어느 시간에나 이곳에 머물렀다. 어떤 때는 잠시 머물렀고 또 어떤 때는 온 사방에 달빛이 가득할 때까지 머물기도 했다. 기억할 수도 없는 어느 모퉁이에서 몇 시간씩 죽음이라는 사실에 몰두했고 같은 방식과 인내심으로 내가 왜 태어났나에 골몰하기도 했다.
我与地坛 중
디탄 공원 근처에 위치한 빨간 벽이 아름다운 카페 <我与地坛_THE CORNER>는 작가의 책에서 이름을 따왔다. 나는 이곳에 갈 때마다 죽음을 온몸으로 껴안았던 불운한 작가와 죽음을 온몸으로 밀어내던 더 불운했던 엄마를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불행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불운했을 뿐.
외출할 때면 언제나 걸어가는 나를 향해 8층 베란다에서 힘껏 손을 흔들었던 엄마가 있었다. 그 배웅은 내가 초등학교에 가고,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직장 생활을 하며 어른이 되어갔던 그 20여 년 동안 늘 같은 모습이었다. 막막하거나 부정적인 기분이 들 때면 ‘낯선 세상으로 가는 나에게 매일 도착하는 응원가(歌)’였던 그 ‘특별한 안녕’을 생각한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아주 약간의 힘이 생긴다. 엄마는 아마 모를 것이다. 그 ‘응원가’가 내 안에서 어떤 것들을 만들어 냈었고, 지금도 만들고 있는지를. 어떤 것들을 포기하지 않게 도왔는지를.
그리하여 내가 부르면 엄마는 늘 낡은 베란다 그곳에 서 있다. 힘껏 손을 흔들며. 가끔은 ‘파이팅’이라고 외치며. 그렇게 매일 비슷한 모습으로 유쾌하고, 힘 있게. 나는 그 모습을 정성껏 박제해 내 마음 가장 빛나는 곳에 담아두었다. 가끔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서 그 모습을 들여다본다.
베이징_도시산책
도시를 산책하며 마음을 산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