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탐색자(生活探索者)의 不怕慢, 只怕站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치고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를 왔다. 인구밀도니 살인적인 물가니 한 국가의 수도가 가지는 의미 따위에 전혀 관심 없던 아이였던 지라 그저 내게 서울은 500원어치 떡볶이에 떡이 엄청나게 많이 들어있는 환상적인 도시였다. (당시 내가 살던 부산 광안리에서는 기다란 가래떡 떡볶이 1개에 200원이었다.) 한 그릇에 듬뿍 담긴 떡볶이 한 그릇. 쌀떡이니 밀떡이니 모르던 시절이라 그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서울이 좋았다.
어쩌다 보니 아빠 회사 사옥이 도곡동에 있었고, 우리는 당연하게 그 집으로 이사했다. 지금에야 다들 도곡동 출신이라면 ‘너 8학군에서 학교를 다녔구나’하지만 90년대 중반 그때는 양재천은 그저 ‘똥물’이었고, 타워팰리스 부지는 논이었다. 어쨌든 완벽한 표준어를 구사하던 오빠 앤드류와 달리 사투리까지 구성지게 쓰고 있던 나는 ‘서울 애들은 깍쟁이라던데 왕따라도 당하는 거 아니야’ 걱정했지만 걱정이 무색하게 친구들은 순했다.
그리고 개학 다음 주에 반장 선거를 했는데 덜컥 반장이 되고 말았다. 부산에서 전학 온 사투리 쓰며 똘똘이 안경을 쓴 키 큰(그때 내 키는 이미 162였다) 내가 왜? 대체 왜? 의문을 품을 시간도 없이 반 대표로 전교 회장 선거를 나가야 했다. 그리고 한 표 차이로 전교 회장 선거에서 떨어졌다. 하교 후 집에 와서 반장이 됐고, 전교 회장 선거에서 한 표차로 떨어졌다고 얘기하는 나를 보던 엄마의 황당한 표정이 생생하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황당한 표의 향방은 아마 40초 남짓한 스피치에 있었던 것 같다. 그때에도 이 문장, 저 문장을 읽고 끄적이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연설에서 할 말이 없었던 나머지 그때 내가 가장 좋아했던 문장을 얘기해버리고 만 것이다. 지금은 정확히 기억도 나지 않지만 대략 ‘깜깜한 어둠 속에서 작은 촛불 하나가 가진 힘은 엄청나게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곳에서 그런 촛불 같은 존재가 되겠습니다’ 이런 내용이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지껄인 말인데 이런 문장을 인용한 사람이 없었으므로 교실 내에 갑작스러운 고요가 찾아왔고, 감탄의 눈빛 몇 개가 날아들었다. 그래서 갑자기 반장이 되고, 블라블라…
어쨌든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나에겐 맞는 말이었다. 나는 그 문장에 부응하는 반장이 되기 위해 열심히 사투리를 고쳤고, 영어도 못하는데 굴리는 발음 하나로 영어 말하기 대회에 나갔고, 학교 대표 높이 뛰기 선수가 되어 강남구 대회에 출전했다. 리더십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이후로도 종종 임원이 되어 고등학교 2학년 때는 가출한 같은 반 친구를 찾는 막중한 임무를 맡기도 했다.
어쨌든 그 모든 것의 시작은 어쩌면 그 문장이었다. 가끔 생각한다. 그 문장이 없었다면 어쩌면 지금의 나도 없을 거라고.
그 이후로도 나는 특정한 시절을 통과할 때마다 어떤 문장을 품고 살았다. 보르헤스가 말한 것처럼 ‘한 단어를 가진다는 것은 부적과 같은 힘’이 있어서 그것은 마치 추위를 많이 타는 내가 바지 안에 입던 내복처럼 늘 내 곁에서 그 시절의 나를 지배하고, 지탱해 주었다. 중 2병 시절에는 ‘내가 나를 사랑해 주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오글거리는 글(하지만 살아보니 진실)을 다이어리에 적어 두었고, 문학소녀였던 고등학교 때는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글’이라고 믿으며 시를 읽었다. 신나던 대학 시절에는 ‘나는 놈 위에 노는 놈 있다’는 생각으로 죄책감 없이 놀았고, 엉망진창이던 신입 사원 때 내가 쓰던 편지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는 믿음으로 살자’라는 글귀로 마무리됐다. 사회생활이 쌓여가면서 내 메신저 아이디는 ‘초심과 진심’이었다.
그리고 첫 타국 생활인 베이징에서도 나를 지탱해 주는 중국어 문장을 만났다.
‘不怕慢, 只怕站’
‘늦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멈춰 서는 것을 두려워하라’
수업 시간에 스쳐 들었던 말인데, 이 문장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바이두를 찾아보니 ‘증강현문(增广贤文)’이라는 고대 중국 아동을 위한 계몽 도서에서 나온 글이라고 한다
당시 별다른 목표 없이 ‘뭐라도 되겠지’ ‘아 근데 너무 어려워’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며 머리를 싸매고 중국어를 하고 있자니, 가끔은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건가 회의감도 들고,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생각보다 늘지 않아서 스트레스도 받았다. 그럴 때마다 자꾸 저 문장이 생각났다. 지구력보다는 순발력이 맞는 인간인 나는 업무 말고는 뭔가 꾸준히 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쯤 중국어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웠어야 맞는데 자꾸 저 문장이 내게 말을 걸었다.
그 즈음 예능 프로그램 ‘한 끼 줍쇼’에서 코미디언 이경규가 한 아이에게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하자 이효리가 코웃음을 치며 ‘뭘 훌륭한 사람이 돼? 그냥 아무나 돼’라고 말했다. 그 말이 어찌나 좋던지. 그래, 정확한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위해 발버둥치는 삶에서 한번쯤은 벗어나도 괜찮지 않을까? 35세가 넘어서 시작한 이 새로운 습득에 나는 조금 더 너그러워지기로 했다. 거창한 목표나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그저 재미있게 하다가 중국어 조금 하는 ‘아무나’가 되자는 굳은 결심이 섰다.
'늦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저 멈춰 서는 것을 두려워하는' 그 시간들을 건너니, 조금은 다른 내가 되어 있었다. 성취에 대한 기대는 턱없이 낮아졌지만 즐거움은 늘어났다. 무리하지 않고 매일 한 단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즐겁게 했다. 나의 매일은 딱 그만큼이었다.
그렇게 중국어는 내가 태어나서 유일하게 별다른 목적 없이 꾸준히 습득한 ‘자발적 공부’가 되었다. 새벽 3시까지 중국 드라마를 보며 모르는 표현들을 찾아보며 혼자 낄낄 웃다가 울었다. 그러다 보니 전혀 안 들리던 단어가 하나씩 들렸고, 남녀 주인공이 왜 싸우는지 알게 됐고, 중국 친구들에게 재미있는 중국 문화도 배웠다. 이렇게 시간이 쌓이면 계속해 온 것이 억울해서 멈출 수가 없을 줄 알았는데, 재미있어서 멈출 수가 없었다.
요즘 나를 지배하고 있는 단어는 ‘생활탐색자(生活探索者)’다. 798 예술거리를 정처 없이 걷다가 거리 조형물에 이 단어가 희미하게 새겨져 있는 걸 우연히 발견했다. ‘荣麟’이라는 가구 브랜드의 슬로건인 듯한데 보자마자 마음에 박혔다. 이 도시를 탐색하며 걷는 나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단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사실 ‘탐색’이란 게 별다른 게 있을까? 매일 비슷한 일상 속에서 나만의 작은 발견들을 해나가는 것, 그것을 그저 흘려 보내는 것이 아니라 기록해 보는 것, 눈앞의 문을 빼곰 열어 1센티미터만 더 내디뎌 보는 것이 아닐까 싶다. 베이징이라는 낯선 도시에 있어서가 아니라, 생활하는 그곳이 어디이든 깨어있고자 한다면 언제든 생활 탐색자가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다산쯔에 위치하고 있는 798 예술구는 런던의 테이트 모던이나 뉴욕의 소호 지역처럼 버려진 공장 지대에서 탄생한 예술 특화 지구다. 원래 이곳에 있던 공장의 일련 번호가 '798'이었던 데서 798예술구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현재는 크고 작은 각종 갤러리들과 서점, 카페, 맛집들이 넘쳐나고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공간들도 많아서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다. DPARK가 있는 근처 751 거리와 묶어서 한 번 걸어보자.
베이징_도시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