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통 화장실 5단계 이론
우리는 류하이 후퉁을 따라 동쪽으로 가다가 쑹수가에서 북쪽으로 모퉁이를 돈 다음, 다신카이 후퉁을 가로질러 길가 공중변소에서 소변을 보았다. 변기에 절어 있는 소변 냄새가 지독해 눈을 뜰 수 없었다. 우리는 마치 물 속에서 숨 참기 연습을 하는 것처럼 숨을 쉬지 않고 있다가 공중 변소를 나와 한참을 가서야 간신히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베이다오, <베이징, 내 유년의 빛>
어느 날 문득 책상을 박차고 나온 뒤부터 베이징 주택가의 뒷골목, 후통(胡同)을 자주 걸었다. 후통은 3천 년 역사 도시 베이징의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골목으로 베이징에 있는 후통을 전부 따져보면 무려 3천 개가 넘는다고 한다. 생선 가시처럼 촘촘히, 그리고 구불구불 끝도 없이 이어지는 이곳에 몇 대에 걸쳐 수도의 중심부에 살고 있는 진짜 ‘베이징런’들이 있다.
후통을 어떤 냄새로 기억해야 한다면 슬프게도 ‘공중 화장실의 지린내’가 정답이다. 후통 내에 있는 다가구 세대는 개별 화장실이 아닌 후통 곳곳에 있는 공중 화장실을 이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후통을 걷다 보면 제일 많이 만날 수 있는 것이 화장실이요, 제일 강렬한 향기도 지린내인 것이다. 후통 내 공중 화장실의 수준은 천차만별인데 내 나름의 기준으로 5등급으로 나눠본다. 1등급은 문과 화장지도 있고, 손도 씻을 수 있는 깨끗한 곳. 외국인들이 많이 오는 관광지 후통 화장실은 거의 1등급이다. 2등급은 문과 화장지는 있는데 다소 더럽고 세면대가 없어서 알코올 티슈에 손의 위생을 맡겨야 하는 곳이다. 3등급은 문과 칸막이가 있는데 매우 낮다. 이게 뭐 별일인가 싶지만 볼일을 보고 일어서면 마침 볼일을 보고 일어선 다른 이와 눈을 마주치며 ‘니하오’를 외쳐야 하는 난감한 상황이 있을 수 있다. 4등급은 칸막이는 있는데 문이 없다. 관광지가 아닌 후통은 시내 중심가라도 4등급인 경우가 많았다. 처음 문이 없는 후통 화장실에 별생각 없이 들어갔다가 귀신을 본 것처럼 소리를 지르며 나왔다. 21세기, 대륙의 도심 화장실에 문이 없다니… 오밀조밀 모여있던 엉덩이들은 내게 큰 충격을 안겨줬다. 조기 교육의 효과인지 시크해 보이는 젊은 친구들도 아무렇지 않게 일을 처리해서 더 놀라웠다. 5등급에는 칸막이조차 없어서 진정한 개방 정신이 무엇인가 경험할 수 있다. 자 다들 손에 손잡고 함께… 쩜쩜쩜. (물론 큰 쇼핑몰, 백화점의 화장실은 한국과 비슷합니다.)
심이는 화장실에 자주 가는 편인데, 그렇다 보니 베이징의 열악한 화장실 환경 때문에 초반에는 고생을 했다. 후통이든, 미술관이든, 쇼핑몰이든 새로운 곳에 가면 남들은 근처 맛집을 찾아볼 시간에 나는 화장실 위치와 등급을 제일 먼저 파악했다. 자연스럽게 내가 제일 많이 구사한 중국어 문장은 화장실의 위치를 묻는 "시셔우지앤짜이날(洗手间在哪里)?”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 간단한 질문도 한 번에 알아듣지를 못했다. 나의 깔끔한 ‘시셔우지앤’을 왜 이렇게 못 알아듣는 건지… 당최 이해할 수가 없고(니 발음이 구려서 그래), 좌절할 때가 많았다. 상대방이 못 알아듣고 얼굴을 찌푸리기 시작하면 성조가 문제인가 싶어서 단어의 강약과 높낮이를 조절해 보기도 했다. 알고 보니 ‘洗手间’이라는 단어의 사용 빈도가 낮았다. (일을 보고 손을 안 씻어서 그런 건 아닙니다.) 조금 더 적나라한 의미의 ‘厕所(변소)’라는 단어를 사용했더니 한 번 만에 착착 알아듣는다.
화장실에 휴지가 없는 경우가 많아서 어디를 가나 휴지를 주머니에 쟁이는 버릇이 생겼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휴지가 나의 보물 1호인 줄 알았던 심이는 어느 날 “엄마 선물이야, 엄마가 사랑하는 휴지”라고 하면서 어느 변소에서 가져왔을지 모르겠는 꼬깃꼬깃한 휴지를 내게 건네기도 했더랬다. 감동적인데 슬픈 건 왜 때문인지. 어쨌거나 다섯 살 때부터 베이징에서 생활한 심이의 화장실 청결도 평가는 굉장히 후한 편이다. 내가 보기에는 깨끗하지 않은 화장실에서도 “엄마, 여기 너무 깨끗하지 않아?”하며 쉽게 감동을 한다. 좌변기가 현저히 적은 중국 화장실을 자주 이용하다 보니 (중국인들은 남이 앉은 의자에 앉는 것을 선호하지 않아서 아직도 좌변기가 적다) 쭈그려 앉아야 하는 재래식 변기도 능숙하게 이용한다.
중국 화장실의 또 한 가지 인상적인 점은 화장지가 있더라도 절대 펑펑 쓰게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휴지를 받기 위해서는 휴대폰으로 QR코드를 스캔해야 하거나, 센서에 손을 갖다 대야 한다. 휴지가 보이게 걸려 있더라도 세 장씩 잘리게 되어 있다. 처음에 이 휴지대를 발견하고 누가 이런 걸 개발했는지 신기했다. 15억 인구에게 절약의 기쁨을 알려주는 이 신문물은 남다른 노하우가 없다면 많은 휴지를 빠르게 얻어내기 쉽지 않게 설계되었다.
다른 도시는 모르겠지만 베이징에서는 문을 잠그거나 닫지 않고 볼일을 보는 사람들이 아직 꽤 존재한다. 문이 조금 열려 있길래 당연히 빈자리겠거니 하면서 방심하고 문을 벌컥 열었다가 쭈그려 앉아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꽥 소리를 지른 적도 많다. 어르신일 때도 있지만 예쁘게 차려입은 젊은 아가씨일 때도 있어서 정말 의아했다. 지내보니 이것은 부끄러움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의 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은 오래전부터 화장실을 정보도 공유하고, 서로의 안부도 묻는 하나의 문화 공간으로 인식했다는 글을 읽었다. 또 다른 이유는 문화 대혁명 시기에 여러 가지 정치적인 이유로 화장실에 숨어서 불법적인 일들을 모의하지 못하도록 화장실 문을 제거했다는 것. 화장실 하나에도 이렇게 다양한 문화적인 함의가 있다니 신기하다. 어쨌거나 가끔 뭔가 엄청나게 개방적인 나라구나… 감탄하게 된다.
<厕所革命>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된 화장실 개혁 프로젝트는 현재 진행 중이다. 부족했던 개수가 늘어났고, 호텔 뺨치는 화장실들도 많다. 상하이나 항저우 등 남쪽으로 내려가면 더 깨끗하게 느껴진다. 항저우의 어느 화장실 입구에는 칸 별로 사람의 유무를 친절하게 알려주는 전광판이 있었다. 화장실 안에 들어가 보니 문 위에 숫자가 적혀 있는 개별 전광판이 있었다. 과연 이 숫자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다 알게 되었다. 시간! 지금 해당 칸에 있는 사람이 이 화장실을 이용하고 있는 누적 시간이었던 것이다. 문이 열리면 올라가던 숫자는 다시 ‘0’으로 바뀐다.
출근을 위해 도곡동에서 서대문까지 매일 2시간씩 전철을 타던 시절, 나의 제일 큰 화두는 ‘누가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날 것인가’, ‘조금이라도 빨리 앉으려면 어떻게 자리 선점을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별생각 없이 서 있었는데 앞에 앉아 계신 분이 교대에서 일어나면 쾌재를 불렀고, 압구정쯤에서 일어날 것 같은 외모였는데 종로 3가까지 가버리면 어찌나 허탈하던지. 각 자리마다 전광판을 달아 목적지를 입력하고 앉는 시스템을 도입한다면 이 세계의 억울함이 조금은 사라질 것 같았다. 매일 생각했지만 나의 원대하고 이상한 계획을 크게 떠벌리지는 못했는데 이럴 수가! 항저우 화장실에 그런 시스템이 구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전철 시간과는 달리 화장실 시간은 그 누구도 미리 장담할 수 없다는 차이점이 있다.) 아이와 재미있고 기발하다고 웃었지만 한 편으로는 인권 침해가 아닌가 염려스러웠다. 과하게 정확한 정보는 인간을 피로하게 만든다. 어쨌거나 22분 50초가 넘어가던 칸 쪽으로 자꾸만 가던 내 두 눈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곳에 좀 살아보니 인력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프로젝트들의 속도는 매우 빨랐다. 이대로라면 조만간 모든 후통 화장실에 문과 전광판이 달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정겨운 후통 화장실 5단계 이론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아주 중요한 것이 빠졌을 때를 비유하는 의미로 ‘앙꼬 없는 찐빵’이 아니라 ‘지린내가 나지 않는 후통’이라는 표현을 나만의 사전에 등재하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는 것일까? 옆 사람과 함께 ‘손에 손잡고’ 거사를 처리하는 것은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겨질지도 모르겠다. 왠지 모르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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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다섯, 갑자기 내게는 ‘외계’와도 같은 베이징이라는 도시에 떨어진 이후 언어가 익숙지 않은 외국인으로 살다 보니 나는 가끔 아주 건방지거나, 아주 공손한, 그리고 자주 이상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평생 이불 킥할 만한 에피소드를 모으는 이방인, 어쨌거나 나만의 방식으로 이 도시를 들여다보고 적응해 온 일상의 기록들.
서점과 맥주, 후통을 사랑하는 도시 산책가. 매일 조금씩 걷고, 매일 조금씩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