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바닥의 호구는 바로 나
외국인으로 산다는 것은 매일 매일 새로운 디폴트 값을 찾는 숨은 그림 찾기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식당만 예로 들자면 냅킨은 따로 달라고 해야 한다든지, 맥주를 시킬 때 따로 “빙더”라고 얘기하지 않으면 상온 상태의 약간 뜨뜻한 맥주를 준다든지, 병따개가 테이블마다 없어서 병을 따려면 종업원을 불러야 한다든지, 물수건을 사용하면 따로 돈을 내야 한다든지 하는 디폴트 값.
이러한 디폴트 값을 최초로 확인하는 순간은 강렬해서, 자신이 떠나온 세상 속에서 작동하던 디폴드 값이 무엇인지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백승주, <어느 언어학자의 문맹 체류기>, 48p
친구 한 명이 영화 <보스 베이비 3> 상영 소식을 알리며 우리를 꼬셨다.
-우리 이번 주 일요일 오전에 아이들 영화관에 보내 놓고 커피 타임이나 할까?
엄마들에게 주말 자유 시간은 흔치 않은 기회이니 다들 좋은 아이디어라며 물개 박수를 쳤다. 아이들을 아무도 없는 영화관에 앉히고 우리는 근처 스타벅스에서 따뜻한 커피를 즐기고 있었다. ‘동네 작은 영화관이긴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보스 베이비’인데 왜 아무도 없지?’하는 희미한 의아함을 품고 엄마들은 달콤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영화가 시작한 지 10여 분이 지났을 무렵, 엄마들의 전화가 갑자기 불이 났다.
-엄마, 이거 보스 베이비 아닌데?
-이상한 애가 나와서 중국어를 하고 있어.
-보스 베이비는 언제 나와?
곧 나올 거라고, 기다리라고 별생각 없이 말하고 보니 갑자기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기억을 더듬어 떠올려 본 영화 포스터에 보스 베이비가 없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니 이상한 일이 아닌가? 아뿔싸, 역시 그 영화는 보스 베이비도, 유니버설 영화도 아니었다. 그저 지지리 인기도 재미도 없는 중국 영화였을 뿐. 하지만 꿀 같은 자유 시간을 뺏길 수 없는 엄마들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설명했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서.
-아, 보스 베이비 상영 일자가 연기됐나 봐, 근데 지금 그 영화가 엄청 재미있어서 요즘 인기가 많대. 한 번 봐봐
나는 급기야 이렇게 말해버렸다.
-보스 베이비라고 믿으면 그렇게 보일 거야.
아이들은 아우성이었지만 우리는 굴하지 않았다. 이미 표를 샀으니 봐야지. 아이들의 성화가 잦아들었을 무렵 우리는 어떻게 아무도 제대로 확인을 하지 않을 수가 있냐며 깔깔 웃었다. 그리고 무사히 상영 시간을 끝내고 나온 아이들을 꽉 안아줬다.
언어가 자유롭지 않은 타국에서 살다 보면 ‘웃픈’ 에피소드가 마구 생성된다. 택시에서 내리면서 13위안을 내밀었는데 기사 아저씨가 나를 황당하게 바라봤다. 뭐가 잘못됐지? 어리둥절하고 있었는데 아저씨가 이건 ‘위안’이 아니라 ‘마오’란다. 비유하자면 1,300원인데 130원을 내고 당당하게 웃고 있었던 것이다. ‘마오’ 같이 작은 단위의 돈이 지폐로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기에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용감했더랬다.
마트에 대패 삼겹살이 있길래 신나서 장을 봐왔더니 남편이 양고기라고 했다. 서빙된 요리가 내가 주문한 메뉴가 아닌 것 같은데 차마 “이거 제가 주문한 음식인지 다시 한번 확인해 주시겠어요?”라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아서 그냥 ‘이게 더 맛있겠네’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맛있게 먹었다. 타오바오에서 산 쓰레기 같은 품질의 티셔츠도 환불을 포기하고 바로 재활용 통에 넣어버린다. ‘문 고장’이라는 글자를 읽지 못해 한참 동안 열리지 않는 문을 온 힘으로 잡아당기며 낑낑대고 있었더니 친절한 중국인이 내 등을 쳐 줬다. 한국에서 나름 야무지게 살아온 것 같은데 하루아침에 ‘덜떨어진 동네 바보 언니’가 된 기분이다.
물론 좋은 점도 있다. 적당히 포기하고, 적당히 손해 보면서 살았더니 생각보다 스트레스가 없다. 여러 분야에서 불평불만이 줄어든 스스로를 보며 큰 그릇이 된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내가 이 구역의 호구지만 뭐 괜찮다. ‘어제 베이징에 도착한 외국인’이 바라는 것은 큰 것이 아니니까. 안 좋은 일에 휘말려서 경찰서에 가지 않는 것. 큰 사건, 사고 없이 무탈하게 오늘을 보내는 것.
나이를 먹는다는 게 비슷하겠지만 타지에서 나이가 든다는 건 더욱 무던해지고 소박 해지는 일인 것 같다. 작은 것에 일희일비하던 열정적인 나를 통과해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내가 좀 손해 보면서 사는 것도 좋지'의 나를 만났다. 잃는 게 있으면 다른 어디에선가 얻는 게 있을 거라고, '자기 합리화 세포'는 내게 이야기한다.
그러니 비현실적일 만큼 크고 밝게 뜬 보름달을 바라보며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베이징에서 경찰서 안 가게 해주세요’라는 웃픈 기도를 하고 있는 마흔의 나는 아주 자연스럽다.
무탈(無頉). 병이나 사고가 없다.
그저 ‘무탈한 하루’가 소원이라는 회사 선배의 말에 ‘꿈이 참 소박하시네요’라고 생각했던 스물다섯이 내게도 있었다. 그때 ‘무탈’이라는 단어는 나의 빛나는 청춘을 형용하기에는 너무 작고 시시해서 나의 사전에는 없는 단어였다. 판타스틱하고, 어메이징 하고, 짜릿한 하루하루가 되었으면 했다. 이제는 안다. 무탈한 하루를 선물 받는 축복, 그 축복은 아무에게나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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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다섯, 갑자기 내게는 ‘외계’와도 같은 베이징이라는 도시에 떨어진 이후 언어가 익숙지 않은 외국인으로 살다 보니 나는 가끔 아주 건방지거나, 아주 공손한, 그리고 자주 이상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평생 이불 킥할 만한 에피소드를 모으는 이방인, 어쨌거나 나만의 방식으로 이 도시를 들여다보고 적응해 온 일상의 기록들.
서점과 맥주, 마라(麻辣)를 사랑하는 도시 산책가. 매일 조금씩 걷고, 매일 조금씩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