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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Nov 21. 2021

집주인이 우리 집 변기에 머리를 박았다.

바로 바로 앞집에 사는 집주인

고등학교가 항구 도시에 있었기 때문에 내 주위에는 꽤 많은 중국인이 있었다. 중국인이라고 해도 딱히 우리와 어딘가가 다른 것은 아니다. 또한 그들에게 공통되는 확실한 특징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은 제각기 다르고 그런 점은 우리와 완전히 마찬가지다. 항상 생각하지만 개개인이 지닌 개체성의 기묘함이란 어떤 카테고리나 일반론도 뛰어 넘는다.    


무라카미 하루키, <중국행 슬로보트>, 21p


베이징으로 먼저 떠난 남편이 혼자 집을 구해야 했다. 철저하고 완벽한 성격에 엑셀, PPT 따위를 애정 하는 남편은 베이징에 현재 나와 있는 매물을 모두 보겠다는 열정으로 부동산 투어를 하기 시작했다. 약 열여덟 개의 집을 보더니 매물별 사진과 동영상 폭탄을 내게 보내왔다. 나중에는 평면도가 그려진 PPT 파일까지 도착했다. 그때 나는 독박 육아 워킹맘 신세라 정신이 안드로메다에 있었기에 노력하는 남편이 고마우면서도 일일이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자료들에 대강 호응하다 보니 아이 유치원 제일 가까이에 있는 아파트로 의견이 모아졌다. 작지만 깨끗하고, 무엇보다 ‘아이 유치원 보내기 편한 게 장땡’이라는 안일한 생각이 들어 더 고민하기가 싫었던 것이다. 그런 내게 남편이 주저하며 말했다. 


-이 집에 한 가지 단점이 있는데 집주인이 바로 앞 집에 살아.

-단지 중간에 큰 호수도 있고, 몇 천 개의 집이 있는 대단지인데 집주인이 바로 앞 집에 산다고? 그건 너무 별로인데? 마주치면 아무래도 불편하고, 우리가 자기 집 더럽게 쓰지는 않을지 호시탐탐 감시하지 않을까? 절대 싫어!

-그래, 내가 다른 집 알아볼게.


하지만 불행히도 ‘괜찮은 다른 집’은 쉽게 구해지지 않았다. 부동산 실장님은 혼자 강아지를 키우는 집주인의 사업이 무척 바빠서 거의 집에 없으니 마주칠 일이 없을 거라고 우리를 설득했다. 탐탁지 않았지만 대안이 없었던 우리는 그 집과 계약을 했고 그렇게 문 두 개를 사이에 두고 집주인과 동거 아닌 동거가 시작되었다. 처음에 신발장 따위를 보충해 준다고 몇 번 교류한 것 외에는 부동산 실장님 말씀대로 거의 마주칠 일이 없었다. 하지만 집주인 아주머니의 출근하고, 퇴근하는 시간만큼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는데 목소리가 컸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신기할 만큼 언제나 전화를 하고 있었는데 목소리가 굉장히 하이톤인데다 속도가 빨라서 누가 보면 싸우고 있는지 착각할 정도였다. 




때는 바야흐로 기말고사 시즌. 시험공부를 한답시고 집을 난장판으로 해두고 소파에 널브러져 있었는데 누군가의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택배 기사인 줄 알고 별생각 없이 문을 열었는데 열어보니 주인아주머니의 다급한 얼굴이 있었다. 엉망진창으로 더러운 집이 생각나 머리가 삐죽 섰다. 최근 드라마에서 ‘완러완러(完了_망했다)’라는 표현을 보았는데 이럴 때 쓰는 거였군. 집주인은 이런 생각을 하는 나를 지나쳐서 다짜고짜 화장실로 직행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갑자기 변기에 머리를 박고 이것저것 살피더니 이빨을 쑤시는 시늉을 하며 무언가를 찾았다. 나는 왜 그러시는지 물어볼 생각도 못 하고 귀신에 홀린 듯 황급히 손을 더듬어 옆에 있는 치실을 들었다. 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부엌에서 이쑤시개를 들고 나왔다. 그러더니 비데 구멍을 이쑤시개로 쑤시고, 내게 뭐라 뭐라 이야기를 하더니 본인이 가져온 변기 세제를 내 손에 건네주고 사라졌다. 이 믿기지 않는 모든 일들은 불과 5분 사이, 상황을 파악할 새도 없이 무척이나 빠르게 일어났다. 


나는 기분이 매우 별로였는데 시험을 망쳐서, 집주인이 우리 집 안에 처음 들어왔는데 집이 개판이라서, 집주인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아니 무엇보다 집주인이 하는 말을 여전히 하나도 못 알아듣고 치실 따위를 건네고 있는 현실에 절망해서 그랬다. 눈물을 흘리고 싶었지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파악해야 했다. 침착하게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화장실 비데가 갑자기 작동을 멈췄다. 남편이 내게 언질 없이 부동산 실장님께 전화를 했다. 부동산 실장님이 집주인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마자 성격 급한 집주인이 다섯 걸음 앞에 있는 우리 집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문을 열어준 사람은 시험공부를 핑계로 설거지도, 샤워도 하지 않고 떡진 머리로 소파에 누워있던 나였다. 최근에 본인 집의 비데도 말썽이었는데 그 이유가 물이 나오는 부분에 이물질이 껴 있어서 그랬다며 우리 집도 같은 상황인지 변기에 머리를 박고 확인을 했고, 이쑤시개로 그 부분을 뚫었다. 그러면서 중국에서 제일 유명한 변기용 세제를 불쌍한 세입자에게 호탕하게 전달하고 떠났다. 그런데 집주인이 간과한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었는데, 거실이 아니라 안방 화장실 변기가 말썽이었던 것이다. 


세상 끝까지 가라앉은 내 목소리를 들은 남편은 위험을 감지했는지 미리 언질을 못해서 미안하다고 급히 사과했다. 하지만 남편의 잘못이 아니다. 남편이라고 집주인이 그렇게 득달같이 달려와서 변기에 머리를 박으리라고 상상했겠는가. 비데를 수리하는 기사님이 다시 들렀고, 강렬한 인상을 안겨준 변기 에피소드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베이징에 아파트 5채를 보유하고 있는 100억 원 자산가인 집주인과의 동거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처음엔 목소리가 커서 무서웠지만 가끔 까만 봉지에 갈치를 담아 건네주시는 좋은 분이었다. 참, 집주인이 추천해 준 변기 세제는 신세계였다. 역시 현지인의 안목을 믿어야 한다.


호수가 있는 단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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