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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Jun 02. 2022

베이징 사랑 벌레 (ft. 나이 들어 외국어라니)

나의 동지 윌리엄

내 생각에 양을 적당히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양을 아주 싫어하거나 아주 좋아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이슬아, <일간 이슬아 수필집>    


베이징 생활 첫 2년간 나의 SNS 프로필 한 편엔 ‘중국어와 연애 중’이라는 글이 콕 박혀 있었다. 그 문장처럼 연애하듯 하루 종일 중국어를 생각했다. 살림도, 육아도 뒷전으로 밀어버린 나를 걱정하거나 의아해하는 지인들도 있었다. 나도 몰랐다. 내가 서른다섯에 무언가에 흠뻑 빠지게 될 줄은, 그것이 외국 나라의 언어, 게다가 중국어가 될 줄은! 이슬아의 문장에서 그녀의 친구 이름인 ‘양’을 베이징으로 바꾸면 정확하다. 베이징을 적당히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주 싫어하거나 아주 좋아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성적 장학금을 연달아 받으며 고시생 향수를 뿌리고 다니던 내게 어느 날 학교 선생님이 물었다.


-아는 중국인 이름을 쭉 이야기해 볼까요?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졌다. 앞집 주인아주머니, 유채 나물을 준 일층 할아버지라고 말할 수는 없는데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마윈? 탕웨이? 판빙빙? 등륜? 


빌어먹을! 이 정도는 중국에 오기 전에도 알았다.


그 순간, 중국을 알고 싶어서 중국어를 시작했는데, 희한한 매력의 중국어에 빠져 정작 ‘중국’은 모르고 있다는 깨달음이 강하게 내 머리를 내려쳤다. 베이징 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 세운 계획은 대략 이랬다. 2년 정도 중국어에 매진하고, 그 이후에는 이 나라의 문화와 브랜드를 파보자. 이미 계획을 실행할 시간이 지났건만 생각보다 중국어가 어렵고, 재미있어서 계속 미루고만 있었던 것이다. 다 변명이다. 책상에 앉아 HSK 공부를 하는 것이 낯선 세상으로 걸어나가는 것보다 더 쉬워서 인지도 모른다.


갑자기 이 도시를 향해 뛰쳐나가야 할 타이밍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더 연마하고 나가자’는 변명 따위는 이제 필요 없다. 책상에 앉아 있다고 나아질 것도 없다는 마음의 소리가 아우성쳤다. 이후 나의 시선은 중국어가 아닌 베이징을 향했고 이방인 생활은 180도로 변했다. 춘의 출근 차를 얻어 타고 매일 오전 8시에 베이징 시내 어딘가로 내 몸을 던져두었다. 목적지도 없이 매일 신나게 걸었다. 산책에 재미가 붙자 효율적인 동선을 짜기 위해 매일 잠들기 전 바이두 지도 APP을 열었다. 걷고 싶은 길을 찾아 내일의 스케줄을 짜고, 공간에 대한 다양한 스토리를 찾아서 읽었다. 중국어에 대한 두려움을 덜어내고 낯선 문을 열고, 낯선 이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베이징이라는 도시와 사랑에 빠진 기분이었다. 이 지저분하고, 때로 무모한 도시와 사랑에 빠지다니! 중국과 베이징을 향한 알 수 없는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종종 있었던 데다, 조국의 도시가 아니기에 나는 나의 사랑을 들키지 않으려 몸을 사렸다. 그것은 부모님 반대에 부딪힌 연인과 비슷하게 가끔 슬픈 감정을 안겨줬다.




이런 나를 완벽하게 이해할 동지를 태평양 건너에서 찾아냈으니 바로 <나이 들어 외국어라니>의 저자 윌리엄 알렉산더다. 윌리엄은 스물두 살에 배낭과 유레일패스만을 달랑 든 채 프랑스에 다녀온 후 그 도시와 사랑에 빠지고 이런 문장을 썼다.


-마치 프랑스에서 사랑 벌레에 물리고 집에 돌아와 열병을 앓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무릎을 쳤다. 나의 몽롱하고 무모한 상태를 설명해 줄 수 있는 단어는 ‘사랑 벌레’다. 나는 부지불식간에 그 벌레에 물려버린 것이다. 사랑 벌레에는 약도 없다. 저자 소개는 더 나아간다.


-프랑스를 미치도록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 심지어 꿈도 프랑스 꿈을 꾼다. 꿈속에서 그는 파리 어느 카페에 긴 스카프를 두르고 앉아 있다.


저도요, 저도요. 저도 베이징을 미치도록 사랑해요. 심지어 꿈도 중국어로 꾸고, 가끔 꿈속에서 중국인이 되기도 하지요. 이런 고백은 베이징을 너무 사랑해서 택시 기사 아저씨마저 부러워하는 S 언니와 윌리엄에게만 할 수 있었다. 굉장한 유머 감각을 가진 윌리엄 아저씨는 내게 이렇게 말하는 듯 했다. ‘낯선 도시에 무모하게 빠져드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란다. 나도 매일 프랑스인이 되는 꿈을 꾼단다.’ 


프랑스어를 향한 윌의 열망은 실로 대단하다. 나는 서른다섯에 늦었다고 징징댔는데 그가 프랑스어를 제대로 배우는 때는 무려 오십일곱이었다. 게다가 그는 프랑스어 스트레스로 심방잔떨림과 심실빈맥 증상까지 앓는다. (물론 의사는 이런 그의 주장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수많은 난관을 물리치고 어렵게 프랑스어에 매진하고 있던 그에게 누군가 충고한다. 


-프랑스 문화 자체를 염두에 둬야 해요.


이 문장은 나의 선생님이 아는 중국인 이름을 대보라고 내게 물었던 것과 비슷한 효과를 준다. 그도 나처럼 반성한다. 프랑스어를 8개월이나 공부했지만 프랑스 문화와 정신은 물론 프랑스산 치즈에 대한 토막 지식조차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마음속에 프랑스인을 키우기로 결심한다. 마음속 프랑스인이 시키는 대로 프로방스 특유의 밝은 노란색과 파란색으로 부엌에 페인트를 새로 칠한다. 나도 내 마음속 중국인이 시키는 대로 매일 훠궈와 마라탕을 먹고 마작을 뒀다. 중국 지리와 역사에 무지한 것을 한탄하며 각 지역별 성도와 도시 특징, 왕조별 수도를 리스트 업하는 막노동을 진행해 보았다.


학습 측면에서 보자면 윌의 프랑스 여정은 성공보다는 실패에 가깝다. 프랑스에서 만난 펜팔 친구와 제대로 된 대화를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헤어지기 때문이다. 그는 심장 수술을 앞둔 새벽 이런 생각을 한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은 프랑스어 공부 말고 골프나 배울걸! 하지만 인생의 전반적인 측면에서 보면 결코 실패가 아니다. 오히려 대성공이다. 프랑스어 공부 1년 뒤 진행한 뇌(fMRI) 촬영 결과는 놀라웠다. 독해력에 영향을 미치는 브로카와 이해를 관장하는 베르니케 영역의 신경이 엄청나게 활성화됐으며 인지 능력 점수가 로켓처럼 치솟았다. 그는 책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원하는 만큼 프랑스어를 익히지 못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내 인생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풍요로워졌다. 지난 몇 년 프랑스어를 배우면서 깨달은 교훈 중 이게 가장 중요하다. 그 어떤 것도 사랑할 뿐 소유할 수는 없다. 프랑스어가 나를 피해 다녀도 이 언어에 대한 나의 흠모는 커져만 간다. 나는 프랑스어를 사랑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것이 나를 사랑하든 아니든, 이 사랑을 막을 도리가 없다.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 


중국어를 배우며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었기에 조바심이 났다. 뚜렷한 목표 없이 무언가를 열심히 오랜 기간 해본 적이 없었기에 더욱 그랬다. 귀국 후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자격증을 따거나 부동산 공부를 하는 것이 더 현명해 보였다. 하지만 전혀 들리지 않던 드라마 대사들이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을 때 희열이 찾아왔다. 희열의 강도와 빈도가 고민과 좌절의 그것을 넘어서기 시작한 순간부터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것이 (치열하게 분투하며 살아가야 하는 바쁘다 바빠 현대 사회의 기준으로) 삶의 쓸모없는 ‘잉여’라고 할지라도 어쩔 수 없었다. 재미있으니까. 그렇게 나는 중국어를 통해 '쓸모'가 인생의 유일한 정답이 아니라는 믿음을 처음 만나게 됐다.


더 큰 수확은 도시 산책자로 살았던 후반기에 있었다. 낯선 도시를 걷고, 기록하는 시간에 나라는 인간에 대해 더 깊게 이해했을 뿐 아니라 잊고 지내던 스스로의 ‘진짜 마음(眞心)’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도시와 마음 사이, 오해와 이해의 중간에서 매일 헤매다 보니 도시의 지도와 내 마음의 지도가 조금씩 겹쳐지고 선명해졌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진짜 너무 늦었다’고 명수사마는 말했더랬다. 하지만 나와 윌리엄이 늦었다고 생각하고 중국어와 프랑스어를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설레는 마음으로 베이징과 파리를 둘러보지 않았더라면? 생각만 해도 식은땀이 흐른다. 책 말미의 그의 고백처럼 '그것'이 우리를 사랑할 확률은 매우 낮을 것이다. 하지만 이 언어에 대한 우리의 흠모와 저절로 풍요로워지는 삶은 막을 도리가 없다. 그러니 우리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중국어와 연애 중’이라고 쓰여 있던 SNS 프로필을 ‘중국과 연애 중’이라고 슬그머니 바꿨다.


도서관에는 읽고 싶었던 중국 관련 책이 많다. 닥치는 대로 읽어본다.
'정점을 지나온 작은 도시를 잔잔한 형태로 사랑하고 있다. 그런 형태의 사랑도 있는 것 같다' by 정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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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다섯, 갑자기 내게는 ‘외계’와도 같은 베이징이라는 도시에 떨어진 이후 언어가 익숙지 않은 외국인으로 살다 보니 나는 가끔 아주 건방지거나, 아주 공손한, 그리고 자주 이상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평생 이불 킥할 만한 에피소드를 모으는 이방인, 어쨌거나 나만의 방식으로 이 도시를 들여다보고 적응해 온 일상의 기록들. 


서점과 맥주, 후통을 사랑하는 도시 산책가. 매일 조금씩 걷고, 매일 조금씩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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