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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Apr 04. 2022

맥주는 술이 아니야, 인생을 적셔 줄 뿐이지

마맥의 시간

냉장고 문을 닫는 순간 몇 시간 후 시원한 술을 마실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듯이, 신나서 술잔에 술을 따르는 순간 다음 날 숙취로 머리가 지끈지끈할 가능성이 열리듯이, 문을 닫으면 저편 어딘가의 다른 문이 항상 열린다. 완전히 ‘닫는다’는 인생에 잘 없다. 


김혼비, <아무튼, 술>


아침 8시, “시앤짜이넝흐어피지우?(现在能喝啤酒_지금 맥주 마실 수 있나요?)”라고 수줍게 물었더니 사장님이 수줍게 웃으며 “크어이(可以_가능해요)”라고 답했다. 베이징에서 맥주를 함께 파는 카페를 종종 찾을 수 있는데 ‘大小咖啡(Bigsmall)’도 그중 한 곳이다. 잔인하게 따사로운 월요일 오전 8시, 테라스에서 아침 햇살과 함께 베이징 맥주 브루어리 京A의 대표 맥주 ‘Worker’s Ale(노동자의 에일)’을 마신다. 백수의 특권을 누리는 내 귓가에 울려 퍼지는 노래는 아이러니하게도 ‘아르디토 프라모노’의 ‘925’. 925는 9 to 5의 줄임말로 정시 근무하는 보통 직장인의 시간을 이야기한다. 


-보여줘 너의 월급, 내가 기분이 가라앉을 땐 나를 다시 빛나게 해주는 그것. 네가 얘기했던 승진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왜 주변에서 돌고 있는 느낌이지. 


봄바람을 쏙 빼닮은 상큼한 멜로디에 이런 획기적인 가사를 덧붙인 노래다. 일하는 사람들의 애환을 이렇게 솔직하게 풀어내다니 대단하군, 하면서 맥주 한 모금을 더 들이켰다.


-맥주는 술이 아니야, 인생을 적셔줄 뿐야 


일찍이 이런 가사를 가진 바비빌의 노래도 있었다. 이 노래를 인생가(歌)로 삼고 있는 나에게 베이징은 천국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물처럼 싼 맥주 값과 마시다가 살짝 부족할 때 위챗 메시지 하나로 10분 만에 맥주가 도착하는 어메이징 베이징. MSG 가루 좀 뿌려서 맥주를 진짜 물만큼 마신다. 


처음 ‘중국 맥주는 칭다오(青岛)’ 정도의 지식으로 촌스럽게 이곳에 도착한 나는 몇 차례 충격을 받았다. 칭다오 맥주만 해도 열 종류가 넘는다! 중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마시는 맥주는 칭다오가 아니다! 종업원이 미지근한 맥주를 가져다준다! 등의 충격, 충격 대 충격의 순간들. 그러니까 최근 배운 중국어로는 ‘崩溃(bēngkuì/멘붕!)’(어쩐지 이 단어의 뻥쿠이라는 발음은 멘붕과도 잘 어울려서 잘 잊히지 않는다). 물론 그중 최고는 시원한 맥주 달라는 나에게 ‘차가운 맥주는 몸에 안 좋으니 미지근한 걸로 마셔라’고 학생 주임 선생님처럼 이야기하던 종업원을 만날 때였지만. 미지근한 맥주는 보약인가요? 




중국에서는 맥주를 보리 '맥(麦)'이 아닌 맥주 '비(啤)'를 써서 '피지우(啤酒)'라고 부른다. 'Beer' 발음에 맞춰 이전에 없던 한자를 만들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맥주는 미국의 버드와이저도, 네덜란드의 하이네켄도 아닌 중국의 설화(雪花) 맥주다. 이 말인즉슨 중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맥주가 칭다오가 아니라 설화라는 이야기다. 칭다오, 하얼빈(哈尔滨), 옌징(燕京) 맥주가 그 뒤를 잇는다. 세계 맥주 판매량 10위권에 중국 맥주 브랜드가 4개나 들어가 있으며 1위인 설화 맥주는 2위 버드와이저에 비해 판매량이 2배 이상 앞선다고 하니 중국 내수 시장의 폭발력은 대단하다. 뻥쿠이!  


이쯤에서 나의 사랑 '허마(盒马)' 마켓에서 확인해 보는 감탄 나오는 중국 맥주 가격. 특별 할인 중인 설화는 한 캔에 한국 돈 300원, 옌징은 250원 남짓. 이건 뭐 물보다 싸다. 이런데도 맥주를 안 마신다면 예의가 없다고 말할 수밖에. 


처음에는 칭다오를 많이 마셨고, 그 뒤로 하얼빈으로 갈아탔다. 한국에서 유명한 칭다오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진 게 바로 하얼빈 맥주다. 1900년에 시작된 하얼빈 맥주에는 꿀맛과 유사한 특유의 단맛이 있는데 그게 좋았다. 중국에서는 ‘하얼빈 피지우’를 앞 글자만 따서 ‘하피(哈啤)’라고 줄여 부르는데 ‘happy’와 음역이 비슷해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맥주와 해피는 정말이지 찰떡궁합이니까. 


그 이후로 정착한 맥주는 신장 지역 맥주인 우수(乌苏)다. 알코올 도수 4%, 맥아즙 농도 11P로 조금 진하지만 먹자마자 내 스타일인데 싶었다. 네티즌들은 우수 맥주가 한 번 취하면 깨기 어려운 강력한 맥주라는 의미로 '대우수(大乌苏)'라는 별명을 붙여 틱톡에 '우수 맥주 안 취하고 마시기'같은 영상을 마구 올렸더랬다. 그 후 변두리 맥주에 지나지 않던 우수는 하루 260만 병이 팔리는 등 열풍을 일으켰다. 빨간색의 강렬한 디자인 또한 인상적이다. 





베이징의 뒷골목 후통에도 다양한 맥주 브루어리가 있다. 징에이, 대약비어, 슬로우보트, 베이핑지치 (北平机器)등. 제일 좋아하는 곳은 후통과 사합원, 그리고 맥주가 한데 어우러진 대약비어 후통점. 10여 년 전, 대약 비어가 첫 번째로 선보인 공간으로 ‘豆角胡同’에 위치하고 있는데 초행길이라면 찾기가 쉽지 않다. 스차하이 맞은편, 상업화가 덜 이루어진 ‘方砖厂胡同’으로 깊숙이 들어가 ‘豆角胡同’으로 우회전을 하고 또 직진을 하다가 살짝 좌회전을 하고… 그저 바이두 지도가 알려주는 대로 고분고분하게 따라가다가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싶을 무렵 만나게 되는 공간. 조용한 후통과는 사뭇 다른 왁자지껄한 분위기라 마치 다른 세상으로 진입한 느낌이 든다.


평일 오후 2시에도 사합원의 정원 자리는 거의 만석이고, 이미 흥이 오를 때로 올라 목소리 톤이 높아진 웨스터너들을 목격할 수 있다. 사합원 정원에서 햇살을 받으며 무려 '쓰촨의 산초'와 '산둥의 꿀'이 들어가 있는 이곳의 대표 수제 맥주 허니마 골드(Honey Ma Gold)를 들이켠다. 너무 좋아서 눈물 한 방울이 맥주에 섞일지도 모르겠다. 


딸기맛 맥주가 매력적인 팡지아(方家) 후통의 베이핑지치는 어떤가. 다양한 수제 맥주와 중국 전통 음식인 전병(煎饼) 콜라보를 선보이는데 이 조합이 또 끝내 준다. 동인당의 훈제 자두와 설탕을 함께 푹 끓여 만든 ‘Smoked Plum Ale’도 있다. 화자오가 들어간 맥주를 만드는 대약 비어나, 중국인들이 여름에 즐겨먹는 전통 음료인 쑤안메이탕으로 맥주를 만드는 京A나 중국의 젊은 창업가들은 중국 문화 혹은 중화 정신과의 접목을 항상 고민하는 듯하다.  


대약비어 후통점
베이핑지치의 맥주와 전병




맥주 사랑의 정점은 칭다오 맥주 박물관에 들렀을 때다. 맥주 박물관이라니! 갓 만든 맥주를 마실 수 있다니! 너무나 들떴지만 또 경건했는데 마치 성지순례자의 기분이랄까. 맥주의 역사가 잔뜩 소개되어 있는 박물관 한편에 서서 만든 지 7일이 채 되지 않은 원장 맥주를 마셨다. 그 옆에는 취기를 느낄 수 있는 방이 마련되어 있는데 들어가 보니 진짜 취한 것처럼 머리가 빙빙빙 돈다. 아이는 1초 만에 그 공간과 사랑에 빠졌는지 계속 돌고 돌고 또 돌고. 그래도 멀쩡한 걸 보니 ‘술꾼’으로서 이 아이의 장래도 심히 촉망된다. 칭다오 사람들이 사랑하는 세 가지는 맥주, 바지락, 해변. 우리도 바다가 보이는 해변에서 매 끼니 바지락에 맥주를 마시며 그들의 사랑에 부응했다. 


칭따오 곳곳에 팔고 있던 원장 맥주와 맥주 병 속의 심이





예전에 어떤 선배는 ‘우리는 맥주가 싱거워서 쥐포를 먹는 걸까, 쥐포가 짜서 맥주를 마시는 걸까’라는 진지한 질문을 던졌다. 그때 나는 정답을 열심히 생각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역시 맥주에는 쥐포라는 딴생각을 했다. 쥐포는 단가가 너무 높아서 엄마 품을 벗어난 후에는 귀한 음식이 되었다. 베이징에서 쥐포를 대체할 만한 안주들을 발견했는데 바로 마라 땅콩(麻辣花生)과 라티아오(辣条)다. 황비홍(黄飞红)에서 나온 마라 땅콩은 땅콩의 짭짤고소한 맛과 마라의 매운맛이 적당히 조화로워서 견과류 애호가인 나에게 맞춤이다. 맥주가 집에 없으면 절대로 이 땅콩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라티아오(辣条)’라는 아이를 발견하게 됐다. “제일 좋아하는 중국 간식 좀 추천해 줄래?”라고 언어 교환앱인 헬로우톡에 올렸더니 너도 나도 라티아오를 먹어보라는 거였다. 이름 그대로 ‘맵고 긴’ 무언가인데, 밀가루를 반죽해 만들었다. 쉽게 ‘마라맛 쫀득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여러 브랜드에서 생산하고 있지만, 내 입맛에 제일 맛있는 건 ‘卫龙’ 제품이다. ‘约吗’맛을 즐겨 먹는다.    


나만큼이나 술을 즐기는 한 친구가 추천해 준 ‘深海小鱼’는 마라로 양념된 멸치다. 5가지 맛으로 출시되어 있는데 나는 역시 마라 맛을 먹는다. 소포장되어 있어 가벼운 맥주 안주로 일품이다. 내가 제일 처음 좋아했던 중국 배우인 등륜이 모델이라 더 애정이 간다. 


바비빌의 노래를 부르고 다녔더니 여섯 살 심이는 진심으로 맥주가 술이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맥주 마셔서 운전을 못한다는 아빠에게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맥주는 술 아니잖아?”라고 되물었다. 그래, 맥주는 술이 아니야. 인생을 적셔줄 뿐이지. 사하라 사막 같은 건조한 인생을 적셔주기 위해 나는 오늘도 맥주를 딴다. 


마라 땅콩과 라티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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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다섯, 갑자기 내게는 ‘외계’와도 같은 베이징이라는 도시에 떨어진 이후 언어가 익숙지 않은 외국인으로 살다 보니 나는 가끔 아주 건방지거나, 아주 공손한, 그리고 자주 이상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평생 이불 킥할 만한 에피소드를 모으는 이방인, 어쨌거나 나만의 방식으로 이 도시를 들여다보고 적응해 온 일상의 기록들. 


서점과 맥주, 후통(胡同)을 사랑하는 도시 산책가. 매일 조금씩 걷고, 매일 조금씩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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