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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Mar 30. 2022

가난하고 우아하게 산책하는 법

폰 쇤부르크씨의 삶의 방식에 입각하여 

생활 습관을 검열하고 주변을 정리 정돈하여 쓸데없는 것들을 버려야 하는 처지가 되면, 진정으로 사치스러운 일들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또한 가난해지면 우선순위를 정하는 법을 배우고 자신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비로소 인식할 수 있다. 


폰 쇤부르크,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


매일 베이징 시내를 산책한다고 하면 다들 신기해한다. 곧이어 몇 가지 질문이 쏟아지기 마련인데 대부분 첫 번째 질문은 “누구랑 같이 다녀?”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마음 맞는 지인들과 함께 걷는다. 하지만 대부분 혼자 걷는다. 어느 순간 나의 산책이 단순한 시내 구경이 아닌 하루 만 오천 보 이상의 걷기 혹은 취재의 양상을 띄게 되면서 혼자 걷는 시간이 많아졌다. 재빠르게 다녀야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데다 언어가 익숙하지 않은 이방인의 신분으로 낯선 도시를 걷는 것은 불확실한 요소가 폭발하는 일이므로. 누군가(특히 시내 산책에 익숙하지 않은)와 함께 다니다 따종디앤핑 사진과는 전혀 동떨어진 구리구리한 공간을 마주하거나 ‘오늘 쉽니다(今天休息)’ 공격*을 받으면 데미지가 커서 소심한 B형인 나는 미안함과 경미한 죄책감에 시달린다. 


*’오늘 쉽니다(今天休息)’ 공격: 아무 설명도, 공지도 없이 굳게 닫힌 문 앞에 휘갈겨 쓴 네 글자만 붙어 있는 공격, 그냥 소파에 누워서 넷플릭스나 볼걸… 하는 후회를 불러일으키기에 초보 도시 산책자에게 치명적이다.


다섯 번째쯤 되면 비용에 관한 질문도 나온다. 


-매일 시내에 나가면 돈 많이 들지 않아?


당연히 집에 있는 것보다는 돈이 든다. 하지만 오래 돌아다니다 보니 비용을 절약하는 여러 가지 노하우가 생겼다. 우선 5억 명이 넘는 사용자를 보유한 디디추싱(滴滴出行/중국의 우버 서비스)의 나라에서 이동은 대부분 대중교통으로 한다. 버스, 전철, 자전거가 기본이다. 베이징 버스는 한국 돈으로 200원, 전철은 800원 남짓으로 저렴하다. 자전거는 이벤트를 활용하면 2천 원도 안 되는 돈으로 월 정액권을 구입할 수 있다. 무제한으로 탈 수 있으니 몇 백 미터의 짧은 거리도 자전거를 타고 이동한다. 가끔 옆구리 터진 김밥이 생각나는 만원 전철을 만나기도 하지만, 그럴 땐 경로를 과감하게 변경하며 백수의 특권을 누리거나, 프랭크 시내트라의 격언을 떠올린다. “지하철에서 만원이라고 불리는 것이 나이트클럽에서는 기분 좋은 친밀함이라고 일컬어진다.” 


시내에 근무하는 남편의 출근 차도 자주 얻어 탄다. 아이를 학교 버스에 태워 보내고, 버스 뒤에 숨어 있던 춘의 차를 타고 회사원의 기분을 즐긴다. 회사 바로 앞 큰길에 내려서 바이두 지도를 살펴본다. 이후 동선은 지네의 다리처럼 많은 경우의 수가 있다. 30분 이내의 거리는 걷는다. 자전거를 탄다. 버스나 지하철로 이동한다. 혹은 이 모든 것이 섞인 경로를 선택한다. 




오전에는 시내 후통을 걷거나 미술관에 들리는데, 3천 개가 넘는 후통은 물론 공짜다. 대륙의 스케일인지 미술관도 무료로 제공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둥쓰역 쪽에 있는 ‘중국 미술관’. 예약만 하면 공짜로 감상할 수 있는 곳인데 막상 가보면 눈이 휘둥그레 해질 정도로 규모가 크고, 수준이 높다. 작품 교체 주기도 짧아서 달 별 혹은 분기별로 감상하면 좋다. 798 예술구에 위치한 각종 미술관들도 무료거나 가격이 저렴하다. 처음에는 소심해서 들어가지 못하고 서성였지만 도시 산책자의 미덕인 뻔뻔함이 조금 장착되고 나서는 거침없이 문을 열었다. 


상대적으로 입장료가 비싼 미술관들은 새로운 전시가 시작하기 전에 할인표(早票)를 판매하는 경우가 많다. 송 미술관, UCCA 등 좋아하는 미술관은 위챗 공중 계정을 등록해 두고 수시로 이벤트를 확인한다. 베이징의 뒷골목 후통에 무료로 개방된 다양한 공간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특히 둥쓰 4티아오(条)에 무료로 개방되어 있는 후통 박물관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감동적이라 여러 번 방문했다.   


혼밥 점심은 면이나 한 그릇 음식으로 간단히 먹는다. 가격은 30위안(한국 돈 5천 원) 남짓. 그렇게 먹다 보니 면의 종류가 너무 많아서 과연 이 넓은 대륙에는 몇 가지의 면이 있는지 궁금해졌다. 중국의 모든 면을 먹어보겠다는 일념으로 나 혼자 <중국 누들 로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먹고 싶은 각종 면들을 목록화하고 음식의 유래와 역사, 지역 특징, 들어가는 재료 등을 찾아본다. 목표물이 생기면 따종디앤핑(大众点评)으로 제일 유명한 가게를 찾는다. 따종은 인기 맛집 순위(排行榜_서점으로 따지면 베스트셀러)를 보여주는데 상위 다섯 개의 식당 중에 위치, 후기, 좋아요 순을 살펴보고 내 맘대로 고른다. 그냥 먹을 때와 알고 먹는 것은 천지차이였다. 아직도 평일 오후 2시, 용허궁 근처 香饵 후통의 핫플레이스 <胖妹面庄>에서 30분을 기다려 먹은 충칭 완자멘의 맛을 잊을 수 없다. 


중국에 처음 오시는 분에게 제일 먼저 추천하는 앱 서비스는 따종디앤핑이다. 모든 공간에 대한 정보가 집약적으로 모여 있는 이 앱에는 인기 메뉴로 구성된 세트 상품과 시간대별 할인 등 다양한 쿠폰들이 많아서 이를 잘 활용하면 한 달에 몇만 원은 아낄 수 있다. 가고 싶은 가게가 있으면 무조건 이 앱에서 리뷰를 읽고 쿠폰을 살핀다.     


베이징 도시 산책의 화룡점정은 한 잔의 커피다. 특색 있는 공간에서 커피를 마시는 그 순간이 나의 ‘소확행’. 그러니 커피값은 아끼지 않는다. 가고 싶은 카페를 찾아서 테이크아웃이 아니라 그 공간을 충분히 즐기며 커피를 마신다. 외국인은 없을 법한 공간을 찾아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글도 썼는데 그럴 때면 극강의 행복감을 맛봤다. 자의식 과잉 주의자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반경 10미터에서 내가 제일 행복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애데렐라의 시간이 다가오면 주로 전철을 타고 왕징으로 복귀했다. 


이렇게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며 산책을 했더니 돈이 많이 들지 않았다. 하루 기본 산책 비용은 70위안에서 100위안 수준. 산책 비용을 충분히 쓰고 싶어서 옷이나 가방 쇼핑은 거의 하지 않았고 중국 생활에서 누구나 경험해 본다는 집안일 도우미도 고용하지 않았다. 못 말리는 결정 장애 주의자로 살아왔지만 삶의 우선순위가 명확해지면 선택에 큰 고민이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


@둥쓰 후통 박물관




예전의 나는 소비에 훨씬 익숙한 사람이었다. 습관처럼 쇼핑을 했다. 화수분처럼 사도 사도 사고 싶은 게 줄을 이었고, 욕망은 또 다른 욕망으로 계속 이어졌다. 그러니 나도 몰랐다. 내가 가난해지는 데 이렇게 뛰어난 역량을 발휘할 줄은. 언젠가는 '페스코 베지테리언'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 베이징에서 채소 요리에 열광했더니 언제나 생활비가 남았고, 자상한 춘에게 얘기했으면 추가 비용을 받을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자발적으로 가난하고 소박했다. 나만의 상한선을 두고 그 안에서 최대의 발견을 해 나가는 즐거움이 컸다. 그렇게 나는 매일 알차고, 가끔 여유로운 이방인이 될 수 있었다.  


사실 나는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의 저자 폰 쇤부르크씨의 삶의 방식을 얼마간 흠모하고 있었는데(물론 그의 재기 발랄한 글 솜씨를 더 흠모하지만) 도시 산책자의 생활은 그를 따르기에 매우 적합했다. 아버지의 사업이 갑작스럽게 망해 부유한 일가친척 중 유일하게 가난해져 버린 쇤부르크씨는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다양한 방법과 이치들을 터득했는데 지워지지 않는 펜으로 가슴에 새기고 싶은 가치 있는 깨달음이다. 그는 ‘경제적인 쇠퇴는 전적으로 불행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의 생활 방식을 세련되게 할 수 있는 기회’라는 인식으로 언제나 흥청거리며 호사스럽게 사는 사람은 근사한 물건 앞에서도 더 이상 만족감을 느낄 수 없다는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을 자연스럽게 깨닫고 ‘삶의 우여곡절을 받아들이고 희생자의 역할에 파묻히는 대신 끝까지 행위 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는 능력’을 보여주는 로빈슨 크루소에 열광한다. (끝까지 행위 하는 사람이라니 그 얼마나 매력적인가) 값비싼 디자이너 브랜드에 많은 돈을 투자하고 옷장에 옷을 쌓아두던 시절보다 옷맵시가 훨씬 좋아진 아내의 친구들과 색다른 불만에 사로잡힌 (실크 와이셔츠가 제대로 다려지지 않았고 연방 총리가 다시 아는 체하지 않았으며 운전기사가 마늘 냄새를 풍긴다는 식인) 부자들을 목격한다. 


그는 종종 다른 사람들이 가진 것을 가지고 싶어 하는 마음속의 양을 극복하려는 소리인 ‘음매!’를 외치며 ‘지나치게 넘치는 삶은 피곤하고 권태로울 뿐만 아니라 완전히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사실을 아직 파악하지 못한 가난한 부자들’을 동정한다. 그에 따르면 ‘가난해지는 사람은 선구자에 속한다. 결국 머지않아 우리 모두, 정말로 모두가 예전보다 한결 더 가난해질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우아하고 침착하게 대처하는 법을 빨리 터득할수록 더욱 근심 걱정 없는 삶을 누리게 된다.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욕구를 품은 사람들만이 부자로 살 수 있다. 비록 은행 잔고가 줄어들지라도, 다행히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일들은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다.’


나는 그의 말을 명심하며 한 명의 가난한 선구자가 되어 낯선 도시를 ‘우아하게’ 걷고 자전거 페달을 돌렸다. 남의 시선에서 벗어나니 모든 것이 쉬웠다. 후통의 더러운 화장실 앞에서도, 초짜 산책자를 공격하는 갖가지 공격 앞에서도 쉽게 겪기 힘든 특별한 경험이라고 생각하면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문제를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얻는 소소한 기쁨들은 또 어떤가. 그의 말처럼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일들은 물질적인 것과는 큰 관계가 없는지도 모르겠다.



첫번째 스토리


https://brunch.co.kr/brunchbook/thebeiji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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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다섯, 갑자기 내게는 ‘외계’와도 같은 베이징이라는 도시에 떨어진 이후 언어가 익숙지 않은 외국인으로 살다 보니 나는 가끔 아주 건방지거나, 아주 공손한, 그리고 자주 이상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평생 이불 킥할 만한 에피소드를 모으는 이방인, 어쨌거나 나만의 방식으로 이 도시를 들여다보고 적응해 온 일상의 기록들. 


서점과 맥주, 후통(胡同)을 사랑하는 도시 산책가. 매일 조금씩 걷고, 매일 조금씩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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