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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Oct 14. 2022

데자뷔 같은 삶과 우정, 뚸쭈아위슈뎬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의 칠월과 안생 

중고 물품은 중국어로 '얼쇼우(二手)', 두 번째 손이라고 한다. 첫 번째 손을 거쳐 두 번째 손으로 간다는 직관적인 표현이라 기억하기 쉬웠다. 중고 서적(二手书)을 파는 이 서점을 처음 접했을 때 가장 인상적인 것 또한 이름이었다.


<뚸쭈아위슈뎬(多抓鱼书店)>


뚸쭈아위를 직역하면 물고기를 많이 잡으라는 뜻인데 서점 이름 치고는 특이해서 찾아봤더니 프랑스어 데자뷔(Déjà vu)를 뜻했다. 중고 물건들이 지니고 있던 세월과 감정들이 ‘어디선가 본 듯한(似曾相识)’ 데자뷔의 순간을 촉발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졌다. 중고 물품을 이렇게 감성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니 감탄했다. '정말 좋은 물건은 두 번 살만 하다(真正的好东西值得买两次)’는 꽤 괜찮은 모토를 가지고 책을 포함한 다양한 중고 물품을 취급하는 '뚸쭈아위슈뎬'이다.


창업을 결심한 서점 대표는 기내용 캐리어만 하나 달랑 들고 항저우에서 베이징으로 옮겨 왔다. 그는 원래 ‘맥시멀리스트’였지만 여행자처럼 생활하는 시간 동안 항저우에 있는 수많은 물건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 시간을 거치며 그는 사람에게 원래 그렇게 많은 물건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나에게 한때 매우 중요했지만 지금은 필요 없는 물건이 다른 이에게 간편하게 전달되는 순환 상점’을 구상한다. 물건이 잘 유통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인구가 많은 중국에 굉장히 중요한 사업이라고 생각했던 점도 한몫했다. 그렇게 뚸쭈아위슈뎬은 2017년 5월 처음 온라인에 문을 열고 2019년 10월에 베이징 매장을, 2020년에 상하이 매장을 오픈했다. 이곳의 중고책은 모두 깨끗하게 소독한 후 판매한다. 


이 서점은 ‘조양구 영화산업단지(朝阳区电影产业园)’안에 위치해 있는데 큰 고가 도로 근처라 찾아가는 길은 험난했다. 어렵게 당도한 서점은 햇살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오래된 공장 건물에 벽돌담 구조를 그대로 두고 통나무 책장과 나무 마루를 덧대서 만들었다는 서점의 외관을 보는 순간, 이리저리 헤맸던 고생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귀여운 고양이 캐릭터를 지나쳐 문을 열고 서점으로 들어가며 나는 알았다. 이곳과 사랑에 빠질 것이란 것을. 그리고 그 예감은 적중했다.


서점의 중고 책들은 귀하게 다뤄졌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나를 사로잡은 건 평일 점심 그곳까지 찾아와 책을 고심해서 고르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멋진 공간은 디자인이 좋은 곳이 아니라 멋진 사람들이 있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으며 그 속에 있는 나도 조금 더 멋진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서점 구석에 서서 책을 진지하게 고르고 읽는 중국인들을 한참 구경하며 김겨울 작가의 <책의 말들>에서 읽은 글귀를 생각했다. '도서관이 특별한 줄은 도서관을 좋아하는 사람들만 아는 것 같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만 책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서점도 비슷하겠지. 그러니 그곳에 있던 우리는 '서점이 특별한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때로 무섭기도 한 15억 중국인들 사이에서 나는 그렇게 강렬한 내적 친밀함을 느꼈다.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면 그건 책과 서점을 사랑하는 당신이 될 거예요’라는 나만의 선고를 무수히 내리면서. 


그들 사이에서 나도 서점이 권해주는 4권의 책을 집었다. 일면식도 없는 음악 평론가가 권해주는 중국 음악 이야기, 아이들에게 전하는 좋은 시 모음집, 두 권의 심야 식당. 4권에 60위안도 하지 않는 가격이었다. 좋은 책을 좋은 가격에 사는 것만큼 기쁜 일이 있을까? 귀하게 다뤄진 책들, 감성적인 공간, 책에 진지한 사람들까지 삼 박자가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는 공간을 발견해서 마음이 얼얼할 지경이었다.


그 마음을 즐기며 주변을 한 바퀴 거닐었다. 영화 관계자들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줄곧 바쁘게 오가고 곳곳에서 촬영이 이어졌다. 텍스트 중독자인 나는 영화를 잘 보지 않는다. 베이징에 와서 처음으로 제대로 본 중국 영화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다. 원작 소설은 작가 칭산의 단편인 <칠월과 안생>. 정반대인 듯 비슷하고, 비슷한 듯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두 여자, 칠월과 안생의 우정을 그린 작품이다.


영화와 책 모두 이 문장으로 시작한다.


-칠월이 안생을 처음 만난 건 13살 때였다.


어린 시절의 우정이란 이랬다.


-어린 시절의 우정은 마치 한 마리 나비처럼 예쁘고 맹목적이다. 안생은 그녀의 첫사랑이었다.


약혼자에게 버림받고 새로운 인생을 찾아 떠나는 칠월에게 엄마는 이야기한다.


-괴로운 삶을 산다고 불행한 건 아니야. 좀 많이 힘들 뿐이지.


어긋나는 인생을 살아가는 두 사람이 다시 만났을 때 오래 그리웠던 친구에게 건네는 말.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맨 처음 말해주고 싶은 사람이 너였어. 매일 매일 배 속의 아이가 자라는 걸 느끼면서 뭐가 중요하고 뭐가 안 중요한지 점점 또렷해졌어. 안생, 넌 내 가장 좋은 친구야. 네가 미웠었어. 그래도 내겐 너뿐이었어.


영원과 순간 사이에서 친구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된다면.


-영원이란 게 대체 얼마나 멀리 있는지도 모르겠어, 어쩌면 모든 건 아주 잠깐일지도 몰라.


저우동우, 마쓰춘에게 금마장 영화제 최초 여우주연상 공동 수상이라는 영광을 안겨 준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트로피를 들고 입을 맞추는 두 배우의 인상적인 사진을 먼저 보고 영화, 책 순으로 접했다. 영화로 마주한 두 여배우의 연기에 감탄했다. 캐릭터에 늘 몰입하는 저우동우의 연기야 토를 달기 어렵지만, 마쓰춘이라는 배우도 이렇게 연기를 잘했구나.


평탄한 가정에서 사랑 받고 자라 안정적인 삶을 지향하는 칠월과 자유로운 영혼의 안생. 열 세살에 처음 만난 둘은 자신의 결핍을 채워주는 서로에게 끌려 소울메이트가 된다. 매일 붙어 있던 학창 시절이 끝나고 그들의 삶은 완전히 다른 궤적을 그린다. 태어나고 자란 도시에서 은행원으로 일하며 모범적인 남자친구와 평범한 일상을 이어가는 칠월. 최승자 시인의 시 구절 “말하자면 나는 애초에 내 인생을 눈치챘다. 그래서 사람들이 희망을 떠들어댈 때에도 나는 믿지 않았다. 불확실한 희망보다는 언제나 확실한 절망을 택했다."의 주인공처럼 내일은 없다는 듯 전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스스로를 혹사시키는 안생.


두 사람은 떨어져 있어도 편지를 주고 받으며 서로를 그리워하지만 안생이 칠월의 남자친구인 가명에게 품은 특별한 감정이 드러나면서 서로를 할퀴고 상처 낸다. 첫사랑 가명과 파혼을 감행하며 사랑과 우정을 동시에 잃어버린 칠월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상징과도 같았던 긴 머리를 짧게 잘라버리고 안생의 흔적을 쫓아 낯선 세상으로 뛰어든다. 반면 어느새 안정적인 삶 속에 있는 안생. 그들은 다른 시간을 통과해 비슷한 삶을 산다. 마치 데자뷔처럼.


이 영화를 보며 더 이상 연락이 되지 않는 내 인생의 안생들을 떠올렸다. 마냥 생의 기쁨과 환희에 차 있던 철없던 내게 불행이나 염세라는 단어의 어렴풋한 뜻과 세상의 쓴맛을 알려주던 친구들. 비겁하고 얼떨떨하게 '불확실한 행복' 쪽에 서 있던 내게 ‘확실한 불행’을 선택하는 삶을 보여주던 친구들. 친구의 한 마디에 세상이 환해지고, 세상이 무너지던 시기를 나는 어떻게 통과했던가. 어느 순간 내 삶에서 사라져버린 그녀들은 마치 시간을 박제한 듯 열 여섯, 열 여덟 근처 소녀의 모습으로 내 마음 속에서 늙지 않는다. 


이 영화에는 깜짝 놀랄 반전이 있다. 칠월과 안생은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지킨다. 칠월 엄마의 말처럼 괴로운 삶을 산다고 불행한 것은 아니다. 좀 많이 힘들 뿐. 우정이 전부인 시절과 우정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을 지나 우리는 어른이 되고 연대는 우정의 다른 이름이 된다. 우정은 행복을 담보해 주지 않지만 때로 힘든 인생을 버틸 수 있는 힘을 준다.


뚸쭈아위슈뎬의 지하 1층에는 눈길을 끄는 환한 공간이 있었는데, 알록달록한 장난감과 벽면에 크게 쓰인 글귀가 인상적이었다.


-잠시 이별, 어린 시절은 사실 줄곧 여기 있었지, 다만 우리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을 뿐. (暂时离开, 童年其实一直在这里,只是我们还没回来.)


갑자기 어린 시절의 내가 그곳에 햇살을 받으며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사실 그 아이는 늘 그곳에 있었다. 내가 아직 돌아가지 않았을 뿐. 어쩌면 다시 그 곳으로 가기 위해 나는 지금도 어딘가를 지나가는 중일 지도.


잠시 이별, 어린 시절은 사실 줄곧 여기 있었지, 다만 우리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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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과 맥주, 후통(胡同)을 사랑하는 도시 산책가. 매일 조금씩 걷고, 매일 조금씩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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