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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Apr 21. 2022

이방인의 책등 독서, 떠우반슈뎬에서 바진 읽기

차갑고 차가운 밤

내 최초의 자발적 독서는 아빠 책장을 가만히 바라보는 ‘책등 독서’였다. (책등은 책을 책꽂이에 꽂았을 때 보이는 모습, 즉 책 제목 등이 쓰여 있는 옆 면을 말한다.) 제목을 읽은 것뿐이니 ‘자발적 독서’라는 표현이 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그 책등 독서의 기억이 어쩌면 모든 것을 바꿨으니까. 그것은 책을 읽은 것보다 마음에 담은 것과 유사한 경험이라 오히려 더 큰 영향을 끼쳤다.


문학청년이었으나 가정 형편 상 일찍 은행에 취직한 아빠는 소설을 좋아했다. 그래서 아빠의 책장에는 경영, 경제, 자기 계발 서적이 아닌 소설과 에세이집이 가득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책장 중앙에 연도별로 꽂혀 있던 ‘이상문학상 작품집’. 이상이 누구인지 모를 때부터 나는 그 작품들의 책등과 함께 살았다. 책을 제대로 펼쳐본 적도 없으면서 대상 작품의 제목들을 꿰고 있었던 건 그 때문이었다. 하나코는 없다, 하얀 배, 천지간, 사랑의 예감, 아내의 상자 등을 마주하며 막연한 호기심과 지레짐작 사이에서 나는 조용히 자라났다. 이상문학상의 표지는 너무 어른스럽고 왠지 모르게 우울해서 펼쳐서 제대로 읽어볼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 슬쩍 읽어 본 작품집 안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처투성이의 주인공들이 즐비했었다. 제대로 된 어른이 되어 세상 살기가 참 어렵구나 혹은 이게 뭔 내용이라고 대상까지 받았나…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굳이 나누자면 나는 다독과는 거리가 먼 아이였고 그렇게 책등 독서는 나를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어떤 무의식은 나를 문학의 세계로 이끌었다. 불현듯 문학을 공부해 보고 싶다는 꿈이 생긴 것이다. 아빠 책장에 이상문학상 작품집이 아니라 사람의 두뇌나 식물도감, 혹은 부동산 분야의 책이 가득 꽂혀 있었다면 어땠을까? 조금 달랐을 것 같다. 작은 아이가 까치 발을 하고 고개를 빼꼼히 들어 부모의 책장을 바라본다. 그때 책장은 하나의 작은 세계다.


화려한 수식어를 거느린 완성슈위앤 맞은편에 위치한 떠우반슈뎬(豆瓣书店). 인문, 사회, 과학 분야의 중고 책을 중심으로 하는 작은 독립 서점이다. 펑루송슈뎬(风入松书店)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부부가 운영하는데 내가 들린 베이징 서점 중에 규모가 가장 작았다. 서점의 규모와 서점이 소개하는 책의 퀄리티는 아무 관련이 없다. 작가 뤼차(绿茶)는 중국 서점 기록 <如果没有书店>에 이 서점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이곳에서 마음먹고 책을 고른다면 반드시 수확이 있을 것이다.(有心的读者在这里好好淘书, 总会有一些收获)’. 수확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주는 서점이라니. 쉬워 보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이방인의 독서는 어린 시절 내가 즐겼던 책등 독서와 매우 유사하다. 이곳에서 나는 책을 펼치기보다는 가만히 바라보고 쉬이 읽을 수 없는 책들 사이를 그저 헤매며 서점이라는 공간과 타국의 서점인들을 ‘구경’한다. 하지만 그 시간이 책을 읽는 시간보다 하찮은 시간이라고 그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서점의 말들>을 쓴 윤성근 작가의 문장을 빌리고 싶다. ‘내 기억 가장 밑바닥에 있는 최초의 독서는 책이 아니라 책등에 있는 제목을 본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그냥 ‘보았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 책을 전부 읽은 것만큼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1904년에 중국 쓰촨성 청두에서 봉건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바진(巴金). 루쉰, 라오서와 함께 중국 3대 문호라고 하던데 두 사람에 비해 한국에서 인지도는 낮은 편이다. 어린 시절에 경험한 상류층의 허례허식과 그들의 착취에 신음하는 노동 계급의 비참한 삶은 훗날 바진 문학의 토대가 되었다. 1919년 5.4운동을 계기로 혁명 운동에 눈떴으며 프랑스 유학 후 중국으로 돌아와 신문화 운동을 이끌었지만 문화혁명기에는 한때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였다는 이유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노년에 파킨슨병으로 펜을 들지 못할 때까지 글을 썼다. <차가운 밤>은 101살에 삶을 마감했던 바진의 마지막 장편소설이다. 전쟁으로 온 세상이 어둠에 잠긴 것처럼 암울했던 1940년대의 중국, 매일 비상경보가 울리면 방공호로 달려가야 했던 충칭에서 슬픈 일상을 살고 있는 소시민의 삶을 그렸다. 제목처럼 차갑고 차갑고 차가운 밤의 시간이다. 실제로 바진이 당시 국민당이 피신해 있던 충칭에서 지내던 시기에 이 작품을 구상했다고 한다. 


읽다 보면 고구마 백 개를 먹은 것처럼 답답한데 전쟁의 암울한 상황과 심각한 고부 갈등 때문이다. 아들과 손자는 사랑하지만 며느리는 끔찍하게 싫어하는 시어머니. 며느리가 집을 나가면 속으로 매우 기뻐하며 나중에는 '너는 정부일 뿐'이라는 험한 말까지 서슴지 않는다.


며느리 수성은 새로운 세대의 상징이다. 자기를 탐탁지 않아 하는 시어머니를 답답해하며 우유부단하고 미래가 없는 남편과 새롭게 다가오는 직장 상사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우울한 독백을 몇 십 번쯤 반복한 끝에 그녀는 결국 가족을 떠나 란저우의 새로운 인생을 선택한다. 2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와보니 호전되고 있다던 남편은 이미 생을 마감했고 시어머니와 아들은 어디로 갔는지도 모른 채 사라져 버렸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차가운 밤의 무거운 공기뿐.


어머니와 부인 사이에서 괴로운 나날을 보내는 주인공 왕원쉬안. 지식인으로 교육 사업에 큰 뜻을 품었지만 전쟁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별 볼일 없는 문장을 끝없이 다듬는 지루한 일뿐이다. 두 여자 사이의 격렬한 다툼과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서 힘들어하던 그는 몸의 병을 얻는다. '우리 같이 이렇게 천한 사람은 쉽게 죽지 않는 법'이라던 그는 결국 승전 경축행사가 있던 날, 바깥에서 들려오는 승리의 환호성을 들으며 극한의 괴로움 속에서 생을 마감한다. '전쟁의 승리는 그들의 승리였지, 소시민들의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이 소설을 두 번 읽었다. 처음에는 주인공의 마음에 빙의해서 감정적으로 읽었고, 다음에는 중국 근현대라는 시대에 초점을 맞춰 읽었다. 구세대와 신세대 사이의 갈등, 그리고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중국이라는 사회를 잘 그려낸 작품이다. 우울한 문장들이 계속 나열되어 마음이 가라앉는다. 집을 갉아먹는 쥐와 매일 밤 울리는 비상경보 등 반복되는 소리 묘사를 읽고 있자면 마치 한 편의 무거운 연극을 보고 있는 느낌도 든다. 무언가 크게 잘못되어버린 듯한 현실이지만, 사실 잘못한 사람은 없다. 모두 각자의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현실이 그랬을 뿐.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바진이라는 사람의 생각에 매료되었는데 그가 쓴 이런 문장들 때문이었다.


-나는 단지 소설을 내 생활의 한 부분으로 여길뿐이다. 나의 창작 여정은 삶과 일치한다. 내 작품은 직접 독자에게 호소하는 것으로, 널리 읽혀서 광명에 대한 사랑과 암흑에 대한 증오를 일으키기를 바란다. 그리고 사명을 다한 후 시간이 흐르면 잊히길 바란다.


자신의 글이 암흑에 대한 증오를 일으키기를 바라면서도 시간이 흐르면 잊히길 바라는 겸손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작가라니 멋있지 않은가. 그저 그런 삶이 있었다고, 그때의 상황이나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은 솔직하고 담백한 그의 문체도 좋았다.


绿茶가 쓴 중국 서점 기록 <如果没有书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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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과 맥주, 후통을 사랑하는 도시 산책가. 매일 조금씩 걷고, 매일 조금씩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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