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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May 13. 2022

잡지 같은 사람의 잡지 같은 삶, 싼리툰 젯랙

산만하고 아름다운 존재

나는 줄곧 스스로를 잡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아서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것도 많지만, 그만큼 산만하고 깊이가 얕은 사람. 우리에게 패션, 브랜드, 셀럽, 화장품, 여행 등의 최신 정보를 던져주지만 금세 더 새로운 정보를 향해 나아가는 잡지처럼.


이 일을 하면서 저 일을 생각하고, 책은 5권 정도를 늘 병독하고 있으며(침대와 책상, 버스에서 읽는 책이 모두 다르다), 끝까지 써 본 노트는 평생 10권도 채 되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은 넘치는데 시간은 늘 부족했다. 일 벌이기를 좋아하지만 마무리가 안 되는 경우가 많아서 작심삼일의 상징이었다. ‘나는 왜 하나에 집중하지 못할까’ 싶은 마음에 속상할 때도 있었지만 잦은 결심과 반성의 사이클에서 나만의 생산성과 즐거움을 찾아가면서 나는 잡지 같은 스스로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잡지에는 깊은 철학은 없을지 몰라도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생생한 이야기가 있다. 고등학교 시절 '신디 더 퍼키'나 '쎄씨'의 스트리트 패션 코너에서 얼마나 깊은 영감을 받았는지 모른다. 와, 가죽 재킷을 이렇게도 매치할 수 있구나. 이 난해한 패션을 이렇게 멋있게 소화하다니! 새로운 맛집과 호텔을 소개하는 코너들은 얼마나 오감을 자극하는지. 늘 잡지를 이리저리 뒤적이며 공간 정보들을 마구 저장해서 찾아가기도 했다. 명품 브랜드 뒤에 항상 붙어 있던 SS/FW의 정확한 의미는 한참 뒤에나 알게 됐지만 나는 잡지와 함께 조금씩 어른이 되어갔다.


대학교에서는 <대학 내일>과 <페이퍼>를 만났다. 토이나 이승환 노래를 들으며 페이퍼를 읽으면 세상이 그렇게 슬프고,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한 장에 '존재'라는 단어가 42번 정도 나오던 하이데거나 니체의 철학서를 읽다 머리가 터질 것 같으면 페이퍼를 펼쳐 들었다. 페이퍼의 발랄하고 감성적인 문장들은 다정하게 마음을 두드렸다. 역시 나는 철학 고전보다는 한 권의 잡지처럼 산만하고, 얕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잡지 안의 사유와 감성까지 마냥 얕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상을 변화시킬만한 무궁무진한 아이디어를 얻는 것은 책보다는 잡지 쪽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많으니 여행을 많이 다니라고 넌지시 권한 것도, 정리 DNA가 사라진 내게 당장 적용하고 싶은 수납의 팁들을 알려준 것도, 첫사랑을 어떻게 마음에 묻어야 하는지 친언니처럼 다정하게 알려준 것도 모두 잡지였다.


호기심만 왕성하고 깊이는 없는 평소 내 스타일답게 잡지에 대한 애정도 얇았다. 꼭 읽어야 하는 잡지 브랜드가 있거나 정기 구독을 한 것도 아니었고, 그냥 눈에 보이면 열심히 읽었고, 안 보이면 그만인 아주 얕고 얇은 애정. 하지만 누군가와의 수다가 간절해서 살짝 뒤돌아보면 늘 핀 조명을 받은 듯 반짝 반짝 빛을 뿌리며 자신의 자리에 있던 잡지. 졸업 후 대기업 홍보실에서 일하기 시작했는데 잡지를 닮은 내 성향은 그 일에 안성맞춤이었다. 쏟아져 나오는 다양한 서비스와 브랜드를 하나씩 알아가는 것이 무척이나 즐거웠고, 나의 방대하고 얕은 호기심은 커리어에 도움을 줬다. 나는 더 이상 산만한 스스로를 탓하지 않게 되었다.


서른다섯, 갑자기 백수가 되어 베이징이라는 낯선 도시에서 서점 산책을 하게 되면서 나의 잡지 사랑은 다른 국면을 맞게 된다. 하루라도 무언가를 읽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활자 중독자’로 문장에서 늘 위로 받던 나였지만 그곳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읽을 수 없는 책들이 즐비한 베이징의 서점을 괴롭게 배회하던 나를 반겨준 건 다름 아닌 잡지였다. 낯선 외계어가 적고 그림과 사진이 많은 잡지. 다양한 소식과 문화를 가득 담은 잡지. 나는 그렇게 베이징 서점에서 전 세계에서 온 잡지들을 만났다.


가장 대표적인 잡지 전문 서점은 베이징의 명동이라 불리는 싼리툰에 위치한 <젯랙(Jetlag)>이다. 젯렉은 잡지 편집자와 디자이너가 공동 창업한 디자인 전문 독립 서점으로 무려 코로나 시국이었던 2020년 오픈했다. 들어가자마자 파란 벽에 한 가득 진열된 잡지들이 반갑게 맞아준다. 이곳에는 런던, 베를린, 암스테르담, 바르셀로나, 멜버른 등 세계 각지에서 온 다양한 잡지들, 아니 다양한 영감(灵感)이 마치 잡지의 한 컷처럼 전시되어 있다. 베이징에서 처음 '매거진 B' 시리즈를 발견한 곳도 젯랙이었다. 근처에는 매거진 F의 김치 에디션도 놓여 있어서 마치 낯선 여행지에서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처럼 기뻤다. 나는 가끔 젯랙에 들러 잡지를 펼치며 활자 중독 증세와 이방인의 향수병을 조금씩 치유할 수 있었다.


비교적 이미지가 많고 쉬운 어휘로 구성되어 있는 잡지는 괜찮은 어학 교재이기도 하다. 어학당에서 기초 과정을 끝내고 나는 중국 잡지를 보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소설 책을 읽고 싶었지만 편하게 중국어를 읽기에 잡지 만큼 좋은 콘텐츠는 없었다. 중국에서 가장 많이 읽었던 잡지는 '두즈어(读者/독자)'다. 미국의 <리더스 다이제스트>, 우리 나라의 <좋은 생각>과 비슷한 월간 잡지로 평범한 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긴 사연들을 소개한다. 짧은 분량이라 읽기에 부담이 없고, 중국 문화를 습득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그렇게 잡지를 닮은 사람이었던 나는 이방인이 되어 새로운 방식으로 잡지를 다시 접했고, 중국 잡지들을 읽으며 꽤 괜찮은 외국어 실력을 갖추게 됐다.


<아무튼, 잡지>의 황효진 작가도 본인의 사진을 보다가 어느 순간 산만하기 그지없는, 한 권의 잡지 같은 스스로를 '발견'한다. 슈퍼에서의 그녀는 소스를 향해 손을 뻗으면서 눈은 위 칸에 놓인 파스타를 응시하고, 액세서리 가게에서는 핀을 잡으려고 하는 동시에 저 멀리 걸려 있는 가방을 보고 있다. 작가는 '언제나 지금 보는 것과 다음에 볼 것을 한꺼번에 보려는 기이한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딱 나였다. 주변을 끊임없이 두리번거리며 눈은 이쪽을 보고 손은 저쪽으로 뻗으며 시간을 보내는 사람. 그녀는 그런 스스로의 모습을 '모든 것을 다루고, 모든 것에 관심을 둬도 이상하지 않은' 잡지 같은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그것은 나의 모습과도 완벽하게 겹쳐졌으므로 그녀의 문장에 나는 위안 받았다.


-잡지에서 문득 대단한 교훈을 발견하고 단박에 인생이 바뀔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노트 한구석에 몰래 적어두고 싶을 만큼, 떠오를 때마다 펼쳐보며 감동할 만큼 마음을 때리는 글귀 역시 잡지보다는 책에서 찾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잡지의 훌륭한 점이다. 보는 이를 가르치려 하거나 거창한 이야기를 하려고 들지 않는다. 그야말로 실용적인 태도로 슬쩍 말을 건넬 뿐이다. ‘이거 어때?’


잡지는 늘 내게 슬쩍 말을 건넸다. ‘새로 나왔는데 이거 어때?’, ‘이렇게 재미있게 사는 사람들도 많아.’, ‘여기 한 번 가볼래?’라고. 가끔은 발랄한 친구처럼, 가끔은 다정한 언니처럼, 가끔은 진지한 선배처럼 위로와 공감과 제안을 내밀었다.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하지 않고 그저 오늘 하루 즐겁게 지내라고 했다. 그것들을 마음에 담아두고 내 삶에 적용시키면 조금 더 즐거워졌다. 삶의 기쁜 순간들은 거창한 담론이 아니라 그런 작은 시도에서 왔다.


베이징에 관한 나의 사랑도 매우 잡지스럽다. 후통, 서점, 커피, 맥주, 미술관 등 다양한 분야를 두루두루 사랑으로 마구 주워 담는다. 한 분야를 깊이 있게 파고 싶은데 그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 나는 진득하지 못한 스스로를 한심해하지 않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즐거운 일들을 하면서 앞으로도 매일을 잡지처럼 살아가고 싶다. 잡지를 닮은 삶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이제는 알고 있으니까. 황 작가의 고백처럼 '이런 잡다함과 산만함이야말로 생활에서도 일에서도 스스로를 지탱하는 동력'이다. 


아주 마음에 드는 일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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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과 맥주, 후통을 사랑하는 도시 산책가. 매일 조금씩 걷고, 매일 조금씩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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