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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Oct 06. 2022

위로가 닿는 자리, 종이동물원을 닮은 Naïve리샹궈

나의 마음이 네게 닿기를, 켄 리우의 종이동물원 

타국 생활이 길어지며 이방인의 삶에 관해서 자주 생각한다. 해방감과 외로움의 줄다리기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이방인의 글을 야금야금 읽는다. 열아홉에 프랑스에 처음 당도해 프랑스인 남편과 살아가고 있는 곽미성 작가의 <다른 삶>, 프랑스에서 한 시절을 보내며 공연예술이론을 공부한 목정원 작가의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을 읽었다.


곽미성 작가의 <다른 삶>에서는 '중력을 거스르는 압도적인 자유'에 대해서 오래 생각했다.


-다른 나라에 산다는 것은 중력을 거스르는 압도적인 자유이기도 하다. 누구도 나를 모른다는 것은, 비로소 나 자신으로 살 수 있다는 의미도 된다. 84p


목정원 작가의 글에서는 그저 존재하다 언제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몸을 생각했다.


-누군가 내게 파리에서 무엇을 하였나 묻는다면 나는 그저 존재하는 일을 했다 하겠다. 공간 속에 서거나 앉거나 누워, 세계를 전부 감각했으므로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몸을 마침내 연마했노라고. 그럼에도 거기 남아 있는 얼굴을 한 번만 더 보고 싶었다고. 18p


설움과 자유, 외로움과 해방감. 양면성이 명확한 이방인의 삶 속에서 저울의 추는 시시때때로 변하기 마련이지만, 나는 자유와 해방감 쪽이 더 컸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여러 차례 위기는 찾아왔는데 어린 딸 아이가 이방인의 설움을 크게 느낄 때 그랬다.


다섯 살부터 타의에 의해 이방인이 되어버린 아이는 종종 타국에 살지 않았더라면 겪지 않아도 됐을 아픔과 외로움을 쏟아냈다. 유치원에서 선생님이 읽어주는 중국어 동화를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고 울먹이던 여섯 살의 아이, 국제 학교가 너무 낯설어서 교실 문을 넘지 못하겠다고 서러워하던 일곱 살의 아이, 중국 친구가 일부러 자기 앞에서 영어가 아닌 중국어로 빠르게 이야기한다고 화를 내던 여덟 살의 아이, 자기가 쓴 말이 중국 욕인 줄도 몰랐는데 아이들이 몰려 들어 뭐라고 했다며 속상해하는 아홉 살의 아이가 마치 밀푀유나베처럼 층층이 겹쳐졌다. 시련은 끝나지 않는 장애물 경기처럼 잊을만하면 찾아왔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던 무능력한 엄마는 그저 고민에 빠져 한참을 뒤척이다 잠들곤 했다. 


그런 날이면 켄 리우가 쓴 단편 소설 <종이동물원>의 엄마가 생각났다. 소설 초반의 강렬한 문장은 이렇다.

 

-아빠는 엄마를 카탈로그에서 골랐다.


허베이성 쓰구르 출신인 엄마는 문화대혁명을 겪으며 고아가 된다. 굶주림을 못 이겨 흙을 먹는 부모를 목격한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중국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영어를 잘한다는 거짓 정보와 자신의 사진을 카탈로그에 올린다. 아시아인을 아내로 맞이하고 싶었던 미국 남자는 카탈로그에서 그녀를 고른다. 얼굴도 모르는 남자의 아내가 되기 위해 낯선 땅으로 온 그녀는 거짓말의 대가로 외톨이 생활을 시작한다. 자기를 닮은 아들 '잭'을 낳은 환희도 잠시, 아들은 영어를 못하는 영원한 이방인인 엄마를 못마땅해한다. 중국어를 하려는 엄마에게 영어로 말하라고 소리치는 아들. 얼굴은 하얗고 눈은 찢어진 조그만 괴물 같다는 소리를 들으며 엄마를 닮은 눈을 혐오하는 아들. 


그런 아들에게 엄마가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고향에서 배운 기술을 이용해 종이로 동물을 접어주는 것이다. 엄마가 숨을 불어 넣은 종이접기는 특별했다. 사자와 염소, 사슴, 물소들은 거실을 뛰어다니고 잭에게 놀아 달라고 졸라댄다. 간장 종지에 뛰어든 물소는 다리를 절고 참새 떼한테 덤벼들기를 좋아하던 사자는 참새의 습격으로 귀가 찢어진다. 


잭은 친구들이 비웃는 종이 동물들을 상자에 담고 테이프로 밀봉해 다락방에 넣어버린다. 엄마가 없는 세상으로 가려고 안감힘을 쓰는 잭의 노력은 무용했다. 엄마가 불쑥 하늘로 떠나기 때문이다. 엄마의 마지막 부탁은 고인을 기리는 중국의 명절 '청명절'에 종이 동물을 꺼내 엄마를 생각하는 것. 훗날, 잭은 종이 동물들 몸 안쪽에서 엄마의 편지를 발견한다. 중국어를 전혀 못하는 그는 중국 관광객을 찾아 나서고 마침내 엄마가 남긴 긴 편지를 읽는다. 낯선 중국인이 읽어 주는 엄마의 문장들은 살갗을 뚫고, 뼈를 뚫고, 결국에는 그의 심장을 꽉 움켜진다. 


-네 얼굴을 볼 때면 난 정말로 행복했단다. 네 얼굴에 우리 어머니가, 우리 아버지가, 내가 보였거든. 난 가족도, 고향인 쓰구루도, 내가 알던 모든 것과 사랑하던 모든 것을 잃어버렸어. 그런데 네가 생긴 거야. 네 얼굴은 그 모든 게 진짜였다는 증거란다. 내가 꾸며낸 기억이 아니라는 증거. 33p


그런 네가 엄마한테 말을 안 하려고 했을 때, 또 너한테 중국어로 말을 못 걸게 했을 때 엄마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이해할 수 있겠어? 그때 엄만 모든 걸 다시 잃어버린 기분이었어. 34p 


특히 여운이 많이 남았던 문장은 이것이었다. 


-"내가 사랑이라고 말할 때 난 그 말을 여기서 느껴요." 엄마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리켰다. "하지만 '아이(爱)'라고 말하면, 여기서 느껴요." 엄마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한동안 가슴에 손을 얹고 '아이'라고 발음하는 엄마를 떠올렸다. 낯선 언어로 가득한 공간에서 '고마워', '사랑해', '고생하셨어요'라는 말들을 들을 때면 얼마나 마음이 움찔거리고 포근했던가. 프랑스 작가 르 클레지오의 ‘나의 조국은 모국어’라는 문장, 김영하 작가의 ‘모국어가 양수처럼 편안히 감싸주는 곳’이라는 표현에 얼마나 공감했던가. 잭이 그녀에게 '마마'라고 한번 불러주기를 고대했지만 엄마의 시간은 매우 짧았다. 


평소 SF보다 에세이를 좋아하는 이유는 일상에서 자잘한 감동을 찾는 것을 즐기기 때문이다. 왠지 SF 소설은 로봇과 인공지능 혹은 인류의 거대한 미래에 대해서 다룰 것 같으니까. 하지만 켄 리우의 <종이동물원>은 뭔가 달랐다. 이렇게 은은하고 담담하면서 슬픈 SF 소설이라니. 스스로가 무기력한 이방인처럼 느껴질 때 나는 그 짧은 단편을 반복해서 읽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켄 리우는 1976년 중국 서북부 간쑤 성의 란저우 시에서 태어나 열한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종이동물원의 자전적 요소를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후 그는 하버드 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마이크로소프트 등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한 후 하버드 법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한다. 프로그래머이자, 변호사, 소설가인 그는 세 가지가 현대의 기호를 다루는 측면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했다. 프로그래머는 프로그래밍 언어에서 기능을 가진 프로그램을, 변호사는 법률 시스템 안에서 의뢰인을 지키는 논거를, 소설가는 말을 사용해 감정을 움직이는 이야기를 만든다. 


SF 소설보다 더 환상적인 경력과 능력을 가진 듯 보이는 켄리우는 <종이동물원>으로 사상 처음, 휴고상, 네뷸러상, 세계환상문학상을 모두 석권하는 주인공이 된다. 그의 판타지는 역사와 기록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여타 작품들과 차별화된다. 731부대, 위안부, 문화대혁명 등 굵직한 역사와 그 안의 상처를 적당한 무게를 지닌 문장으로 다룬다. 


이방인의 저울이 외로움과 무기력으로 기울기 시작할 때면 나는 켄 리우의 책을 들고 '따왕루(大望路)' 근처에 있는 서점 <Naïve리샹궈(理想国)>로 간다. 낮에는 카페 겸 서점이지만 저녁이 되면 바(bar)로 변신하는 이곳은 마음을 달래기 좋은 장소다. 요즘 특별한 칵테일을 선보이는 서점들이 많아져서 기뻤는데 18개의 문학 작품에서 칵테일 이름을 따온 이곳은 더욱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뿐인가. 감각적인 인테리어와 서점 곳곳에서 만나는 전 세계 작가들의 좋은 문장들, 주변 공간(朗园Vintage)와의 조화까지 완벽한 안식을 선사해 준다. 좋은 공간에 가면 몸이 먼저 반응한다. 몸이 조금쯤 유연하고 가벼워지는 느낌이랄까. 영혼의 배터리를 충전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아마도 이 공간과 꽤 닮았을 것이다.


이곳에서 <종이동물원>을 읽으며 새빨간 마음과 마음이 실제로 닿는 상상을 했는데 켄 리우가 서문에 이렇게 적었기 때문이다. '우리 정신은 어떻게든 서로에게 닿는다. 비록 짧고 불완전할지라도. 사유는 우주를 조금 더 친절하게, 좀 더 밝게, 좀 더 따뜻하고 인간적이게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그런 기적을 바라며 산다.' 


어쩌면 모두가 이방인으로 존재하는 삶. 하지만 어느 별에 있든, 어떤 모습을 하든 우리는 어떻게든 서로에게 닿을 수 있다. '비록 짧고 불완전할지라도'. 우리가 아주 간절히 바라기만 한다면. 


나 또한 그런 기적을 바라며 산다. 

--

서점과 맥주, 후통을 사랑하는 도시 산책가. 매일 조금씩 걷고, 매일 조금씩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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