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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May 05. 2022

798 예술구에서 장자자의 세계를 지나치다.

지금의 나를 만든 그때의 세계 

집에서 가까운 798 예술구는 베이징에서 제일 자주 간 동네다. 이곳은 원래 라디오, 군수물자 공장 지대였는데 예술가들이 모여들면서 집단 창작단지로 변신했다. 갤러리도 많고, 거리에도 작품들이 즐비해 어디에 카메라를 대고 찍어도 꽤 그럴싸한 작품이 나온다. 이곳에도 내가 사랑하는 서점이 몇 개 있다. 


베이징의 여러 <PARAGON서점(佳作书局)> 지점 중에 798의 공간을 제일 좋아했다. 멀리서 바라보기만 해도 기분이 편안해지는 벽돌 건물. 햇살 좋은 날, 이 서점 주변을 어슬렁어슬렁 걸었다. 녹차 선생의 <만약 서점이 없다면(如果没有书店)>을 읽다 보니 역사가 깊은 서점이었다. 1942년 한 유대인이 상하이에서 이 서점을 연다. 2차 대전 후 서점은 주인을 따라 미국 시카고로 옮겨졌다. 얼마 후 한 중국인이 시카고에서 이 서점을 발견하고, 사들여서 다시 중국 베이징으로 가지고 온다. 서점 러그에 쓰여 있던 숫자 ‘1942’의 의미를 알게 됐다.


그런데 지금 이 곳은 문을 닫았다. 미술관 UCCA와 중앙미술학원 맞은편에 다른 지점이 있지만 아쉽고 아쉽다. 하긴 오늘날 서점이 문을 닫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할까? 그래도 제발 잘 버텨주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오프라인 서점에서 책을 사자. 그것이 올해의 내 다짐이다. 


<팡관슈셔(旁观书社)>도 있다. 뻔질나게 798 예술구를 드나들었지만 이 유명한 교차로에 서점이 있는 줄은 몰랐다. 목표물을 향해 빨리 걷는 사람에게 어떤 곳들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잘 안다고 자신하는 동네일수록 그런 경향은 짙어진다. 어느 날 가만히 서서 첫 마음으로 주위를 살펴보니 조용히 자신만의 멋을 뿜어내고 있던 작은 서점이 눈에 띄었다. 바로 이 곳. 서점 주인인 듯 보이는 중년 남성도, 벽에 걸려 있는 그림도, 전시된 책들도, 비스듬히 세워져 있던 서점 내 노란 자전거도 하나하나 남달랐다. 그 서점에 서서 내 인생에 늘 존재했으나 거들떠보지 않았던 것들은 또 얼마나 많았을지 가늠해 봤다. 이제 나는 비로소 이곳에 서점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되었다.


798에서 처음 발견한 서점은 <aiospace>다. 이곳 2층 테라스에 앉아 햇살을 받고 있으면 다른 세계에 진입한 것 같은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세상의 소란이 사라진 곳에 들어 온 느낌이랄까. 고요가 그리울 때 이 서점으로 갔다. 이곳이 더 특별한 이유는 중국어 책을 '처음' 샀기 때문이다. 간단한 안부 인사도 건네기 쉽지 않아 중국 문학을 원서로 읽을 엄두는 감히 내지 못했던 중국어 1년 차, 불쑥 들어온 이 서점에서 한 쪽 벽면을 모두 차지하고 있던 노란 책이 장자자의 <너의 세계를 지나칠 때(从你的全世界路过)>였다. 펼쳐 보니 역시나 외계어처럼만 느껴졌는데 책의 커버가 희망의 상징인 샛노란 색이었기 때문일까. 왠지 내게 '두려워하지 말고 한 번 사봐'하고 말을 걸고 있는 것 같아서 용기를 냈다. 중국 책 첫 구입기를 위챗 모먼트에 올렸더니 중국 선생님의 장문의 댓글이 달렸다.


알고 보니 보통 책이 아니었다. 중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꽤 인기 있는 장 작가가 13년 7월부터 '잠들기 전 읽기 좋은 이야기(睡前故事)'라는 테마로 짧은 글을 웨이보에 연재했는데 폭발적 인기를 얻었다. 중국에서 도서 출간 전 4억 명이 조회했으며 2013년 초판 출간 후 6개월 만에 200만 부가 판매되고 2014년 9편의 이야기가 추가된 개정판이 출간되면서 총 판매 부수 700만 부를 넘어선 어마어마한 책이었다. 와우. 이 책에 47편의 단편 연애담이 담겨 있는데 그 스토리를 바탕으로 무려 10편 가량의 영화가 만들어졌다. 원소스 멀티유스의 시대이지만 한 권으로 열 편이라니 그 분야에서는 신기록이라고 한다. (괜히 서점 벽 면을 한 가득 차지한 게 아니었다.) 대표적인 영화가 소설 제목과 같은 '너의 세계를 지나칠 때'와 왕가위 감독이 만든 '파도인'이다. 파도인의 기본 줄거리인 '뱃사공' 꼭지는 내가 제일 좋아했던 이야기였다.


집에 와서 야심 차게 읽기 시작했는데 한 장을 '대강' 읽는데만 2시간이 걸렸다. 이 속도면 5년 뒤 한국 귀국길에나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좌절했다. 이 책에서 학교 교재에는 절대 없는 단어들과 '여편네' , '그 X'과 비슷한 중국 욕도 처음 배웠다. 오르한 파묵은 '당신 주머니나 가방에 책을 넣고 다니는 것은, 특히 불행한 시기에,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 다른 세계를 넣고 다니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했는데 외계어 같던 이 책은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세계'가 아닌 '나를 혼란에 빠뜨리던 세계'였다. 그래도 쥐가 치즈를 파먹듯 포기하지 않고 찔끔찔끔 읽어나갔다. 정확한 내용이 파악되지 않는 에피소드들도 많았기에, 왕징 한국 도서관에서 한국 번역판을 발견했을 때는 유레카를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국어로 읽으며 스토리들의 진가를 알게 됐다. 내 조국의 언어라는 게 이렇게 아름다운 거였나. 정세경님의 번역에 감탄하면서 읽는다.


‘너의 세계를 지나칠 때’라는 제목에 책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우리가 무수히 지나온, 한때 목숨보다 소중했지만 이미 아득해졌거나, 희미해진 예전의 세계들이 담겨 있다. 지금의 우리를 만들어 준 것이 그 세계들인 줄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작가는 이야기한다. ㄱ1억ㄴr니(기억나니), 그때의 우리. 


직접 혹은 친한 친구가 겪었거나 주변에서 한 번쯤 들었을 법한 이 47편의 이야기에는 사랑을 만나고, 사랑에 아파하고, 사랑을 보냈던 우리의 지질하고 웃픈 한때의 단면들이 유머러스하게 담겨 있다. 오래 전에 쓴 싸이월드 다이어리를 다시 꺼내 읽는 기분이라 오그라드는 손발에 어쩔 줄 몰라 하다가, 키득키득 웃다가, 어느 부분에 다다르면 갑자기 울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 그때의 내가 그리워서. 이십 대의 나는 사랑 이야기를 참 좋아했는데 마흔의 나도 마찬가지네. 사랑 이야기를 좋아하는 내가 좋다. 


사람의 기억이란 도시와 같아. 시간은 모든 건물을 좀먹고 높은 빌딩과 도로를 사막으로 만들어버리지. 만약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금세 모래에 파묻히고 말 거야. 그러니 얼굴이 온통 눈물로 범벅되고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뒤돌아보더라도, 앞으로 나아가야만 해. 22p


한낮 네 곁에 있던 네 그림자는 이제 밤이 되어 나의 잠을 감싸네. 세상일은 책과 같다는 네 말 정말 좋아. 쉼표를 찍고 네 곁에 머물고 싶지만, 네 책을 읽어줄 사람은 따로 있는 거 같아. 나는 그저 배를 건네주는 뱃사공이지. 236~237p


세상에는 이렇게 사소하고 볼품없어서 평소에는 신경도 잘 쓰지 않지만, 어려울 때 힘을 주는 존재가 있어. 그러니 실제로 손에 잡히지도 않는 헛된 것에 집착하지 마. 뭐라도 되는 척하는 그런 것을 말이야. 차라리 그럴 힘이 있다면 사소하지만 아름다운 것들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라고. 241p


세상에 대해 절망하기는 쉽지만 세상을 사랑하기란 어렵지. 이렇게 험난한 세상에서 앞으로 나아가려면, 내 주위를 막아서는 사람들의 물결 속에서도 자신만의 색깔대로 쭉 한 방향으로 가야만 해. 354p


삭막한 도시의 연기가 나를 지배하려고 할 때 이 책을 꺼내 말랑말랑한 문장들을 읽는다. 예전의 나와 그 때의 감정들을 잊고 싶지 않아서, 잃고 싶지 않아서. 이 책은 순서대로 읽을 필요도, 한 번에 읽을 필요도 없다. 작가의 의도대로 자기 전 침대에 기대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하나의 이야기를 읽고, 그 여운을 간직하며 잠들면 된다. 마흔 일곱 번의 꽤 괜찮은 밤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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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과 맥주, 후통을 사랑하는 도시 산책가. 매일 조금씩 걷고, 매일 조금씩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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