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루이 Oct 17. 2022

자연의 위로, 어얼구나 강과 중신슈뎬

바람이 거두어가는 삶

낯선 문 앞에서 이방인은 두 배로 서성인다. 어떤 브랜드인지 혹은 어떤 메뉴를 파는 곳인지,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싸지는 않을지, 점원이 중국어로 말을 시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 국경을 건너며 열 배는 늘어난 소심 세포가 나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서점 앞에서의 나는 거침이 없다. 그곳은 보르헤스의 말처럼 '천국과도 같은 곳', 누구도 거절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포용성을 자랑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자연과 함께하는 서점들도 있다. 자연과 책이 닮은 점이 있다면 둘 다 우리를 가만히 위로한다는 점일 텐데 두 개의 조합으로 위로의 깊이는 더 깊어진다. 그러니 평소보다 더 깊은 위로가 필요할 때 나는 자연과 어우러져 있는 서점으로 간다. <중신슈뎬(中信书店)>이다.


중신슈뎬은 중국에서 '신화슈뎬' 다음으로 체인을 많이 가진 서점이다. 중신(中信)이라는 이름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는데 역시 중신그룹은 금융업과 여행, 문화 분야를 주요 사업으로 하고 있는 거대 기업이다. 대략 우리나라의 교보 정도 되는 기업이라고 봐도 될 것 같다. 서점의 모회사는 중신 출판사로 그만큼 탁월한 안목으로 한 권의 책도 고심해서 선별한다. 수준 높은 책 선별 작업으로 궁극적으로 ‘독서가들의 시간의 가치를 높이는 것(提高每一位阅读者的单位时间价值)’이 목표다. 


중신슈뎬 치하오(启皓店) 지점을 완성시켜주는 것은 량마허(亮马河)라는 강이다. 서점 안에서 통유리를 통해 반짝거리는 햇살을 만끽할 수 있으며 문을 열고 나오면 갈대와 강가의 바람이 우리를 맞이한다. 따뜻한 바람을 가만히 맞으며 서점을 뒤로 하고 강을 따라 걸어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일렁거린다. 2년 연속 베이징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으로 뽑힌 이유가 명확했다.


서점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식사와 커피도 겸할 수 있는 카페가 있으며, 오디오북도 들을 수 있고, 꽃집과 전시 공간도 함께다. 평소 작가와의 만남이나 베이킹, 와인 수업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해서 반응이 좋다. 각종 대사관이 있는 곳에 위치해 있어 외국 서적도 많고, 아일랜드 문학기행, 멕시코 음식 축제 등 재미있는 이벤트도 많이 기획한다.


치하오 지점이 강과 함께라면 옥상에 자리 잡고 있는 옌칭 세원 공원(世园公园)의 중신슈뎬을 완성시켜주는 건 서점과 맞닿아 있는 구름과 하늘이다. 마지막 계단을 밟고 야외로 몸을 내미는 순간 가벼운 탄성이 새어 나온다. 이렇게 아름다운 하늘 바로 아래 서점이라니, 이 장면을 당장 한 장의 엽서로 만든다 해도 손색이 없다. 서점의 야외 테라스는 전망대도 겸하고 있어 세원 공원 주변 풍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나는 하늘과 어우러진 중신슈덴에서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살아간 <어얼구나 강의 오른쪽>의 어원커 부족을 떠올렸다. ‘어얼구나 강의 오른쪽’은 소수 민족 이야기를 환상적으로 그려내는 작가 츠쯔젠(迟子建)의 대표작으로 순록을 방목하며 살아가는 중국 최후의 수렵민족 어원커족의 마지막을 담았다. 그들은 밤에도 별을 볼 수 있는 '우리렁(어원커족의 보금자리)'에서 이끼를 먹는 순록과 함께 그들의 먹이를 찾아 이동하며 살아간다. 소설은 추장의 마지막 여인인 '나'와 그녀의 손주 안차오얼을 제외한 부족민이 정부가 새로 마련해 준 이주지이자 문명의 세계인 부쑤로 이주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다른 이들의 설득에도 오래된 보금자리인 숲을 떠나지 않기로 결정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별을 볼 수 없는 집에서 잠을 자고 싶지 않다. 나는 생이 다할 때까지 별을 벗 삼아 까만 밤을 보내고 싶다. 만약 한밤중 잠에서 깨었을 때 눈에 보이는 것이 칠흑 같은 지붕이라면 눈이 멀고 말 것이다. 12p


어원커족이 몇 백 년째 사는 곳은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지대로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어얼구나 강 근처다. '어얼구나'는 몽골어로 '손으로 물건을 건네준다'라는 의미를 가졌을 만큼 강폭이 넓지 않지만 강의 '맞은편'은 어원커족이 결코 갈 수 없는 남의 땅이다.


4대에 걸친 이야기라 많은 등장인물과 그들의 탄생과 죽음, 갖가지 사건을 품고 있다. (읽다 보면 인물 관계도가 필수다.) 자연재해, 전염병, 맹수 등 거친 환경과 싸우고, 일본의 침략과 문화 대혁명의 강풍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본능에 충실하며 행복한 숲 속의 삶을 영위하지만 결국 더 큰 문명을 만나 소멸해 가는 어원커족. 그들에게 자연은 친구이자 종교다. 자연을 친밀하게 대하지만, 경외하고 두려워한다.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믿음으로 자신의 아이를 잃을 것을 알면서도 신의 무당으로서 다른 이들을 구하고, 나무를 해치고 싶지 않아 말라비틀어진 죽은 나무에 목을 매고, 아버지를 데리고 가버린 천둥소리를 기다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산에 이름을 붙여준다.


-니하오는 울면서 자기가 야영지를 떠나면서 아픈 아이를 구하면 아이 하나를 잃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고백했다. 내가 그 까닭을 묻자 니하오는 "하늘은 그 아이는 원하는데, 내가 그 아이를 남겨 놓았으니 내 아이가 그 아이 대신 하늘에 가야 해요"하고 대답했다. 263p


-니하오는 선량한 진더가 목을 매어 죽을 때에도 생기발랄하게 살아 있는 나무를 해치고 싶지 않아 그 나무를 선택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진더는 목을 매어 죽은 사람은 반드시 목을 맨 나무와 함께 화장해야 하는 우리네 풍습을 잘 알고 있었다. 242p


-천둥 신이 아버지를 데리고 가버렸다. 이때부터 나는 비 오는 날 우르릉 쾅쾅 하는 천둥소리가 좋았다. 마치 아버지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천둥과 번개 속에 숨어 있는 아버지의 영혼이 나에게 말을 걸고 빛줄기를 발사하는 것이라고 느꼈다. 116p 


-산맥을 강물과 달리 이름이 없었지만 우리는 산에 이름을 붙여 주었다. 높이 솟은 산을 '아라치 산'이라고 불렀고, 하얀 빛깔의 바위가 노출되어 있는 산을 '카라치 산'이라고 불렀으며, 야거 강과 루지댜오 분수령 위에 마미송이 잔뜩 자라나 있는 산을 '앙거치'라고 불렀고, 다싱안링 산맥 북쪽에 소뿔처럼 생긴 산을 '아오커리두이산'이라고 불렀다. 325p


-와뤄쟈가 "왜 나무에다가 소변을 누웠을까! 산신의 노염을 산 게 틀림없어"하고 말했다. ... 나무 그루터기나 돌 위에 감히 앉지도 못했고, 잡초도 함부로 꺾지 않았어요. 소변을 눈 것이 산신의 노여움을 살지 누가 알았겠어요. 362p


함께 살아가는 순록에 대한 존경과 존중 또한 놀랍다.


-우리 순록은 여름에는 이슬을 밟고 걷소. 순록이 풀을 먹을 때면 꽃봉오리와 나비가 함께 있고, 물을 마실 때도 물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를 볼 수 있다오. 겨울에 적설에 엎드려 이끼를 먹을 때면 눈 아래 묻혀 있는 팔도 볼 수 있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소. 387p


-우리와 순록은 숲과 화목하게 지냈소. 수천, 수만 명이 되는 벌목꾼들과 비교하자면 우리는 강물 위를 스치며 날아가는 고추잠자리 몇 마리에 불과하오. 숲에 있는 강이 오염되었다면 어찌 고추잠자리 몇 마리 탓이겠소? 461p


루쉰 문학상을 세 번이나 수상한 유일한 작가인 츠쯔젠은 행정구역 상으로는 내몽고 지역, 다양한 소수 민족이 살고 있는 어얼구나 강 근처에서 자랐다. 유년의 기억을 바탕으로 소수 민족의 삶을 작품의 주요 소재로 삼는다. 450 페이지가 넘는 <어얼구나 강의 오른쪽>도 어원커족의 마지막 무당과의 만남이 도화선이 됐다. 그들의 이야기를 남기고 싶었던 작가는 오랜 취재 끝에 이 책을 완성한다. 책의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몇 문장만 읽어보면 누구나 알 수 있겠지만 그녀의 문장들은 가히 놀랍다. 어원커족이 살아온 풍경과 고단한 삶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그려진다. 자연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는 덤이다. 아침이 가고, 밤이 오고, 봄이 가고, 겨울이 오는 지루하고 지겨운 일, 자연이 우리에게 하는 공평무사한 일, 우리의 모든 우울과 고민들을 아주 작고 보잘 것 없게 만드는 일이 작가의 문장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어원커 사람들은 우울하고 답답하면 바람 속에 잠시 서 있다. 그러면 바람이 가슴에 쌓인 우울을 불어 흩날려준다. 생의 마지막도 바람과 함께 한다. 고인을 대부분 풍장(风葬)으로 기리기 때문이다. '네 그루의 곧고 커다란 나무를 골라 나무 막대를 나뭇가지 위에 가로로 놓고 사방을 평평하게 만든 다음 시신의 머리는 북 쪽으로 향하게 하고 다리는 남쪽으로 놓은 다음 나뭇가지로 덮는' 방식이다.


중신슈뎬에서 가을바람을 맞으며 나는 어원커 부족과 함께 14년에 걸쳐 '풍장'이라는 시를 지은 황동규 시인을 떠올렸다. '내 세상 뜨면 풍장 시켜 다오/.../바람 이불처럼 덮고 화장도 해탈도 없이/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바람과 놀게 해 다오'


'피가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 수 있는' 마지막이라면 더 바랄 것 있을까? 그렇게 바람이 인간을 거두어간다.


치아오 중신슈뎬
옌칭 중신슈뎬

---

서점과 맥주, 후통(胡同)을 사랑하는 도시 산책가. 매일 조금씩 걷고, 매일 조금씩 쓴다. 

이전 23화 안녕 어린이, 요우신슈뎬과 아키야마 료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