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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Oct 12. 2022

모든 것의 시작은 첫 번째 페이지로부터, PAGEONE

베이징에서 만난 처음과 끝

베이징을 떠나기 전 딱 한 군데만 들릴 수 있다면 첸먼따지에(前门大街)의 랜드마크 서점 페이지원(PAGEONE)으로 가겠다. 3층 통유리를 통해 첸먼을 바라볼 수 있는 이곳은 서점이기도, 전망대이기도, 핫플레이스이기도 한 복합적인 공간이다. 첸먼이 지루해지면 톈안문 쪽으로 걸어보자. 베이징에서 처음 톈안문을 봤을 때 9시 뉴스에서 보던 장면을 실제로 목격했다는 실감 말고는 특별한 감정이 없었는데 톈안문과 국기 게양식 관람을 평생의 소원으로 가지고 있는 중국인이 많다는 문장을 본 후로는 지나칠 때마다 겸허해진다. 다른 이의 버킷 리스트를 너무 쉽게 침범했을 때의 겸연쩍음일까. 중국 지방에 위치한 사진관에는 대부분 톈안먼 광장 사진이 벽에 붙어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톈안먼을 실제로 보고 싶은 희망을 유예하며 그 배경 앞에 선다. 작가 위화도 청소년 시절 동네 사진관에서 가짜 톈안먼 사진을 찍는다. 그렇게 탄생한 사진의 유일한 단점은 광장에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이었다고 그는 적었다.


유명 관광지에 위치한 서점이니만큼 페이지원은 내가 베이징에서 처음 만난 중국 서점이다.


‘Everything begins with PAGE ONE’


페이지원의 무거운 검은색 문 위에 쓰여 있던 이 문장을 밀면서 서점으로 들어갔다. 낯선 도시 생활의 첫 번째 페이지가 진짜 시작되는 기분이었달까. 그렇게 만난 첫 번째 중국 서점은 내게 적잖은 충격을 안겨줬다. 한국의 어떤 핫플레이스와 비교해도 빠지지 않을 만큼 감각적이고, 스타일리시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날 '중국과 중국 서점'에 가지고 있던 편견을 모두 지웠다. 그리고 3층 통유리를 통해 첸먼을 바라보며 비로소 타국에 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페이지원은 원래 싱가포르에서 온 서점이다. 중국 전통을 간직한 거리 초입에 싱가포르 서점이 크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게 흥미로웠는데, 찾아보니 페이지원은 2017년 8월에 '신징뎬(新经典)'이라는 중국 출판사에 이미 인수됐다.


신징뎬은 차별화된 서점을 보여주겠다는 신념으로 서점을 단순하게 책을 파는 소매업으로 보지 않는다. 카페, 소규모 전시관, 오프라인 강좌 등으로 영역을 넓혀 독자를 만날 수 있는 종합 문화 콘텐츠 공간으로 정의한다. 페이지원은 랜드마크 지점, 도심 지점, 커뮤니티 지점이라는 3가지 유형으로 공간을 기획하는데 예를 들어, 베이징팡 지점은 랜드마크 지점, 싼리툰 지점은 도심 지점, 인디고나 궈마오 쪽은 비교적 작은 규모의 커뮤니티 지점이다. 하지만 같은 커뮤니티형 지점이라도 결코 비슷한 분위기로 꾸미지 않고, 위치의 특색을 한껏 살린다. 그리하여 독자보다는 관광객들이 많아 보이는 첸먼 지점도, 칭화대, 베이징대 등 각종 대학이 몰려 있는 하이디앤 지점도, 책은 많지 않지만 후통을 끼고 있는 화위앤(花园)후통 지점도 모든 다른 빛깔의 분위기를 뽐내고 있다.


신징뎬 CEO의 인터뷰에서 페이지원의 미래를 엿볼 수 있었다. 카페나 이벤트 구역의 면적을 늘려서 여백이 많은 공간으로 만들고, 진짜 고급 지식을 나누는 유료 수업에 힘을 싣겠다고 했다. 대부분의 서점은 일본 문구, 팬시 위주로 제품을 구성하지만 그들은 중국 오리지널 브랜드를 앞세워 차별화를 꾀할 계획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책에 가장 큰 가치를 두는 것이다. '책 그 자체가 가장 훌륭한 마케팅'이라는 사실은 동서고금 불변의 진리이기에. 베이징 후통 어딘가에 작가들이 상주하며 글을 쓸 수 있는 공간도 마련할 계획인데 공간 기획은 무지 호텔에서 맡기로 했다고 하니 기대되는 프로젝트다.


안딩먼(安定门) 근처에 위치한 화위앤후통의 페이지원은 브런치 카페를 겸하고 있는데 책 권수는 현저히 적다. 훑어보니 인문, 문학보다는, 디자인, 그림, 요리, 베이징 관련 서적들이 많았다. 서점 내 통창으로 후통을 바라보며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이 이곳의 특별한 매력이다. 푹신한 올리브그린 의자에 앉아 ‘현대 미술의 4대 천왕’이라 불리는 웨민쥔(岳敏君)의 그림과 한가하고 반복적으로 평일 후통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 떼들을 번갈아 바라봤다. 왔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다시 정확히 그 자리로 나타나는 새들. 이 풍경은 내 마음 속에 영원히 그리운 풍경으로 남을 것만 같았다. 산책을 하다 가끔 눈물이 핑 돌았는데 이런 기분이 들 때 그랬다. 그럴 때면 나는 그 풍경을 외우기 위해 온 마음을 집중했다. 


배가 슬슬 고파와서 자전거 페달을 밟아 근처 샹얼(香饵)후통에 있는 충칭 소면집 <胖妹面庄>을 찾아 나섰다. 무려 미쉐린 스티커가 붙어 있는 충칭 소면 식당이다. 베이징을 돌아다니다 보면 제일 많이 만날 수 있는 식당이 다름 아닌 충칭 소면과 란저우 라멘집이다. 우리의 비빔밥처럼 어느 푸드코트에나 하나쯤은 있을 만큼 흔한 요리인데 흔한 것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 제일 어려우니 그 맛이 궁금했다. 평일 오후 2시에 갔는데도 식당 앞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충칭 소면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종류는 완자멘(豌杂面)인데, 익힌 완두콩과 고기장, 청경채 등을 섞어서 먹는 요리다. 땅콩이 들어간 딴딴멘보다 더 부드럽게 씹힌다. 완자멘은 국물 여부를 선택할 수 있는데 국물이 없는 것을 그간 많이 먹어온 터라 이번에는 국물이 있는 것으로 시켜 보았다.


사람이 많은 곳은 틀림없는 이유가 있다. '완자멘이 맛있어봤자 거기서 거기지'라고 생각한 편견을 와장창 깨는 맛. 두부처럼 부드럽고 고소한 완두콩과 매콤한 고기볶음이 입안을 풍성하게 감싼다. 1958년부터 생산하고 있는 충칭의 대표 맥주 산청(山城)도 한 모금 들이켜니 천국이 따로 없다. 나는 ‘혼면’을 즐기며 마오우의 <지옥 주방>을 떠올렸다.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나 중산(中山) 대학교 의대를 졸업한 마오우는 어느 날 인터넷에 <지옥 주방>이라는 이름의 에세이를 연재한다. 지옥 주방은 고인이 된 이가 다른 세상으로 가기 전 마지막으로 들러 끼니를 해결하는 곳이다. 이곳에는 누군가의 마지막 식사를 요리하는 맹파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주 만들어주던 갓절임청대콩국수, 얼큰한 마오쉐왕, 인스턴트커피, 버터 맥주, 치즈 버거, 흰토끼 유가 사탕, 생강 푸딩 등 고인은 고심하며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맛볼 음식을 고른다. 식사를 하며 그들은 자신의 삶이 한 편의 드라마처럼 펼쳐지는 주마등을 본다. 어떤 이는 생에 결국 하지 못한 말에 눈물을 쏟고, 어떤 이는 본인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 이 콘텐츠가 <열여섯 밤의 주방>이라는 책으로 탄생했다.


가끔 지옥 주방에서 먹을 나의 마지막 끼니를 상상한다. 지루하고 지난했던 끼니의 마지막은 어떤 모습일까. 딱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작가는 '그건 현재까지의 인생을 돌아볼 때 내가 어느 시절을 가장 그리워하는지 자문하는 것과 같았다'라고 썼다.


베이징에서 마지막 방문지로 톈안먼 앞 페이지원을 떠올리는 것도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 처음 들린 중국 서점이자 내게 이방인의 감각을 일깨워준 곳, 베이징에 있는 서점을 모두 찾아가 보고 싶다는 소망을 안겨준 곳, 그곳에서 처음 알에서 깨어났던 그 순간을 그리워하는지도.


페이지원의 까만 문에 적힌 '모든 것의 시작은 결국 첫 번째 페이지부터'라는 문장을 종종 떠올린다. 어떤 걸작도, 어떤 졸작도 '처음'이 필요하다. 이런 평등함에 마음이 놓인다. 섣부른 확신이나 자신은 없지만 최소한의 용기를 가지고 무언가를 시작할 수는 있으니까. 이 서점 산책기도 작은 용기로 시작되었다. 유지혜 작가의 <쉬운 천국>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고민하고, 계획하고, 골머리를 앓아도 행동하기 이전은 0이야. 0은 0일뿐이야. 그런데 후지게라도 한 번 해 버리고 나면, 그 사람은 1이야. 1을 가진 사람인 거야. 우린 1을 만들어야 돼. 내일 한다고, 더 나이가 들어서 멋진 1을 만든다고 하면 안 돼. 지금 1을 만들어야 해. 지금 당장.


멋들어지게 고뇌하더라도 아무것도 안 하면 0, 후지더라도 해버리면 1. 나는 매일 후지게라도 1을 가진 사람이 될 터이다. 모든 것의 시작은 첫 번째 페이지니까. 처음과 끝은 결국 그렇게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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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과 맥주, 후통(胡同)을 사랑하는 도시 산책가. 매일 조금씩 걷고, 매일 조금씩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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