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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Dec 15. 2021

춤과 책, AGORA阿果拉와 후스

우리의 목표는 소신있는 불효자가 되는 것

내가 남들에 비해 ‘행복’이라는 단어에 민감하게 된 건 사실 초등학교 때 읽은 한 권의 책 때문이었다. 지금은 제목도 기억나지 않지만 대강의 내용은 이랬다. 축구를 사랑하는 한 아이가 경기를 앞두고 발을 다쳐서 경기에 못 뛰게 되었다. 상심하고 있던 주인공에게 친구가 다가온다. 위로의 말을 건네며, 지금의 상황은 불행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다리를 아예 못쓰게 된 것도 아니고, 너의 다리는 금방 나을 거고, 너는 다음 경기에 참여할 수 있게 될 거야. 얼마나 행복해? 팔은 안 다쳐서 글씨를 마음껏 쓸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해? 나는 언제나 현재 상황에서 행복을 찾아내는 놀이를 하곤 해. 이 놀이를 하다 보면 우리가 행복할 이유는 너무나 많아. 함께 하지 않으련? 지금 생각하면 조금은 약 오르는 위로를 건네는 내용이지만 어린 나는 큰 감동을 받은 모양이다. 나는 막상 주인공은 참여하지 않았을 것 같은 이 행복 찾기 놀이에 조용히 동참했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더 불행한 상황을 상상하며 ‘다행이다, 행복하다’를 주문처럼 외우곤 했던 것이다. 모든 불행의 끝에는 죽음이 있으니 행복 찾기 놀이는 '그래도 살아 있다'로 귀결되었다. 10대 시절을 그렇게 지내다 보니 불행이 딱히 불행처럼 여겨지지 않고, 사소한 행복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행복을 선택하는 것도 능력이라면, 나는 그 책 덕분에 인생에서 꽤 쓸만한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가끔 그 책을 떠올릴 때마다 내게 더 행복한 삶을 선물해 준 책의 작가에게 대단히 감사하다…라기 보다는 책 한 권이 나처럼 단순하고 다독하지 않는 어린아이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해 생각한다. 최근 두 가지 흥미로운 문장을 읽었는데, 하나는 어릴 때 단 한 권이라도 잊을 수 없는 책을 읽은 아이라면 책과 멀어지는 시기가 있더라도 언젠가는 책을 다시 만나게 된다는 한길사 김언호 대표의 주장이다. 대학 시절 쇼핑과 연애에 미쳐서 책을 멀리하다 다시 돌아온 내가 증거다. 또 하나는 “책을 읽자. 춤을 추자. 이 두 즐거움은 세상에 어떤 해악도 끼치지 않는다"라는 계몽사상가 볼테르의 글이었다. ‘내 아이는 그래도 책을 꽤 좋아하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깔끔하게 저버리고 하루 종일 춤만 추고 있는 아이를 보면서 위안 삼을 수 있는 글귀였던 것이다. 춤과 책이 이렇게 의미심장하고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세상에 어떤 해악도 끼치지 않는 춤‘만’ 추는 아이에게 그저 감사해야 할 것이다. 


좋아하는 서점 <AGORA阿果拉>에 아이와 함께 갔다.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동네 쇼핑몰 '비타오마이(毕淘买广场)'의 제일 위 층에 문을 연 아고라라는 서점은 왁자지껄한 시장통 안에 위치한 비밀의 지하 창고처럼 신비한 분위기를 풍긴다. 3층이면서 지하로 내려가는 듯한 계단을 가지고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꼬치 훠궈, 마라탕 등을 열띠게 호객하는 직원들을 지나쳐 걷다 보면 불현듯 어디로 연결되는지 알 수 없는 계단과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 고풍스러운 입구가 나오는데 그곳을 통과하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것이다. 처음 방문했을 때 시골 5일장 속에서 유서 깊은 만년필 가게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공간도 취향을 저격했지만, 울창한 나무 뷰를 가지고 있는 통창 옆 소파는 독서하기 완벽한 자리였다. 그리고 이곳에는 읽기에 더욱 집중할 수 있는 도서관식 책상과 커피 맛이 어떠냐고 직접 물어봐 주는 섬세한 바리스타가 만드는 계화 라테(계화 나무는 직접 심어서 키운다고 한다, 계절 한정 음료다), 우리 집에 살고 있는 2인의 ‘문구인’들을 흥분 시킬만한 멋진 문구류가 있다. 정기적으로 '대부'같은 영화 상영회도 무료로 진행하고 있다. 


서점 이름을 고민하던 창업자는 가치와 감정이 교환되는 편안한 시장의 이미지를 떠올렸고, 이는 고대 그리스어인 ‘시장= Αγορά’로 연결되며 아고라라는 이름으로 탄생했다. 교환할 수 있는 물건은 책, 물건, 그리고 이야기라는 글귀를 보고 무릎을 쳤다. 서점은 정말 이야기가 교환되는 공간이 아닌가. 


나를 기쁘게 했던 또 다른 정체는 깨끗하게 소독된 채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중고책들이었다. 아고라에는 새 책도 있지만 중고 책을 사고팔 수 있다. 중국 책들은 한국 책들보다 월등히 저렴하지만(소설책 한 권이 6-7천 원 수준이다) 내 중국어 실력으로는 천원 어치도 제대로 못 읽는다는 죄책감 때문에 책 구입을 망설이는 나에게 저렴한 중고책은 늘 매력적이다. 평생 읽어도 소화하기 어려운 중국어 책을 이미 가지고 있으면서 나는 미친 듯이 책을 고르기 시작했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유명한 작가들의 어디서 본 것 같은 유명한 책들을 10-20위안에 구입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의 취향을 닮아 있었던 이 서점은 이후 아고라바(AGORA Bar)까지 오픈하며 ‘술 파는 서점’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는 나를 더욱 흥분시켰다. 매일 오후 6시부터 자정까지 다양한 칵테일을 만날 수 있으며 신청자에 한해 칵테일 수업도 진행한다. 


멋진 서점을 보여준다고 야심 차게 아이를 데리고 갔건만 역시나 아이는 책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아니, 여기에 이런 서점이 있어?’하며 3분 정도 신기해하더니 책이 아닌 문구류 코너 앞에서 만년필을 한참 동안 들었다 놨다 하며 주황색이 예쁜지, 민트색이 예쁜지를 고심했다. 내가 사줄 의향이 전혀 없음을 깨닫고는 제니의 솔로(SOLO)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런 아이를 보며 행복 찾기의 달인인 나는 볼테르의 글귀를 또다시 떠올렸다. 엉덩이를 흔들며 웨이브를 타는 아이로 인해서 그곳에는 세상에 아무 해악도 끼치지 않는 위대한 두 가지 일-춤을 추고, 책을 읽는-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존재했다. 


나는 아이에게 책을 읽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시켜서 억지로 읽는 책은 억지로 먹는 밥만큼이나 몸에 해로울 것 같기 때문이다. 책이 주는 즐거움을 한 번 깨닫고 나면 세상에 그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아챌 수도 있다. 이렇게 저렴한 가격에 한 사람의 지식과 인생을 통째로 빌린다니 미안할 지경이다. 나는 그 기쁨을 베이징에 와서야 알았다. 아이도 서른 다섯쯤에는 책이 주는 진짜 기쁨을 깨닫고, 책장 앞을 서성일 수도 있다. '읽을 책을 고르는 일은 어떤 사람이 될지를 고르는 일과 비슷하다'라고 했던 북튜버 김겨울님의 문장처럼 고심해서 고른 한 권 한 권이 아이의 얼굴과 말투와 하루가 될 것이다. 


일찍이 '가장 위대한 중국 지성'으로 불렸던 후스 선생이 1919년에 이런 시를 썼다. 요점은 효자가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인데 내가 평소 아이에게 바라는 바와 같아서 적잖이 놀랐다. 


나무가 본래부터 열매 맺을 생각이 없는 것처럼/나 역시 너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 아니다./그러나 네가 이왕 태어났으니 나는 너를 먹이고 가르치지 않을 수 없다./이는 사람의 도리로서의 의무일 뿐./너에게 은혜 베푼 것이 아니다./훗날 네가 장성했을 때 내가 어떻게 아들을 가르쳤는지 잊지 마라./나는 네가 당당한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나의 효자가 될 필요는 없다.


대부분 의미 있는 성공은 실패에서 나오고, 실패는 자유에서 나온다. 자유는 나를 지배하고 있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 혹은 '되어야 한다'는 관념을 떨쳐야 짙어진다. 효자는 그런 실패를 과감하게 선택하기가 어렵다.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자신의 열망이나 가치보다는 가족이나 주변의 시선 등 다른 요소를 더 많이 고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시민 작가도 말하지 않았는가. 자유의지를 버리면 삶의 존엄성도 잃어버리고, 스스로 설계한 삶이 아니면 행복할 수 없다. 


편지 말미에 '착한 심이가 되어서 효도할게요'라고 쓴 딸아이를 불러서 절대 착한 딸이 될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 엄마, 아빠가 바라는 건 그저 네가 원하는 삶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살아가는 것, 그래서 네가 온전히 후회 없는 하루를 보내며 행복한 것이라고. 그 선택이 책이든, 춤이든 그것은 너만의 인생이라고. 착한 딸이 되겠다는데 정색해서 만류하는 엄마를 보고 아이는 조금 의아해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목표는 소신 있는 불효자가 되는 것. 그것은 스스로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지하 세계로 가는 문
마음을 빼앗긴 이 소파 자리
소독되는 중고책과 계화 라테
춤추는 문구인,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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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과 맥주, 후통(胡同)을 사랑하는 도시 산책가. 매일 조금씩 걷고, 매일 조금씩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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