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후통의 이딩슈워에서 옌롄커를 떠올리다

어둠을 잘 느끼도록 하늘과 삶이 지정한 사람

by 심루이

남성 간의 중국 3대 현대 소설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옌롄커(阎连科). 그는 1958년 뤄양시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78년 군에 입대한 뒤 28년간 직업 군인으로 살았다. 소속 부대의 문예창작반에 들어가서 문학을 접한 것이 작가 인생의 시작이었다. 그의 여러 작품이 중국에서 ‘금서’로 선정됐을 만큼 중국 지식인과 사회를 비판하고 풍자하는 거침없는 글쓰기로 늘 뜨거운 화제를 몰고 다닌다. 그로 인해 그의 작품은 세계 20여 개국에서 번역 출간되었으나 정작 자신의 조국에서는 출간이 불발된 경우가 많았다. 루쉰 문학상, 라오서 문학상 수상을 비롯해 프랑스 페미나 문학상 최종 후보, 영국 맨아시아문학상 최종 후보, 매년 노벨 문학상의 강력한 후보이기도 하다.


내가 처음 접한 그의 작품 <그해 여름 끝>의 원제는 <샤를뤄(下日落)>로 '여름 해가 지다'라는 뜻이다. 한 때 금서로 지정되었던 책이다. 작가의 말에 인상적인 문구가 있다. '내 모든 문학의 변고와 운명은 전부 ‘그해 여름 끝’에서 시작되었다… 이 소설이 유일하게 담고 있는 것은 인간의 곤경에 대한 진실과 진실, 그리고 진실이었다.'


예전부터 금서 독서에 대한 이상한 로망이 있었다. 친구들과 금서를 몰래 돌려보는데 내게 허락된 시간이 아주 짧다면 어떨까… 곧 빼앗길지 모르는 책의 한 문장, 한 문장을 읽어 내려가는 순간은 얼마나 짜릿하고 달콤할까. 오죽하면 '눈 내리는 밤, 문을 닫고 금서를 읽는 즐거움'이란 표현이 보편적일까. 금서가 많은 중국에는 그런 시간을 통과한 지식인들이 꽤 많다.


<고양이의 서재>를 쓴 중국의 과학사학자이자 천문학자 쟝샤오위안도 그런 달콤한 순간을 맛봤다. 게다가 금서의 존재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책을 읽게 된 원인이었다고 한다. 금서를 몰래 돌려보던 때 그는 하루에 톨스토이의 ‘부활’을, 반나절 만에 레르몬토프의 ‘우리 시대의 영웅’을 완독했고, 그와 동기들은 조르주 상드의 ‘안지보의 방앗간지기’를 스물네 시간 동안 다섯 명이 돌아가며 읽는 기록을 세웠다. 당시 그에게 배정된 시간은 자정부터 새벽 네 시까지였단다. 아, 나도 이렇게 책 한 번 읽어보고 싶다.


옌롄커의 샤를러는 길지 않은 중편 소설로 단숨에 읽힌다.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변고', ‘곤경과 진실’, ‘중국 군대의 현실’이라는 키워드에 흠칫했다. 군대 내에서 갑자기 총성이 울리고 모두의 인생이 뒤틀리는 스토리 또한 긴장감을 배가시켰다. 읽어 보니 고통과 좌절에 빠진 사람의 심리와 심정 묘사가 탁월했다. 더불어 그의 섬세하고 남다른 표현력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특히 해가 있는 정경에 대한 묘사가 황홀해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이후 해를 보면 그의 문장들이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불에 타듯이 붉기만 하던 해가 점점 엷어지는 모습이 마치 불덩어리가 빗물을 맞아 젖어 있기는 했지만 물과 불이 서로를 받아들이지 않아 수증기와 안개가 자욱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대지 위에는 맑고 투명하게 밝은 기운이 내려와 하루 종일 쌓여 있던 열기를 천천히 발산시키기 시작했다.


-들판으로 나오자 해는 더 이상 조금 전처럼 그렇게 맑고 아름답지 못하고 몹시 끈적끈적해 보였다. 마치 노란 물 같았다. 개 한 마리가 땅바닥 위를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맑고 아름다운 해가 둥근 불덩이처럼 하늘 높이 걸려 있었다. 솜털처럼 엷고 흰 구름이 햇빛 아래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대대에 있는 건물 어느 곳이나 온기가 따사로웠고, 가을 낙엽이 쉴 새 없이 허공을 맴돌다 떨어지고 있었다.


<그해 여름 끝> 중


난뤄구샹 맞은편 베이러우구샹에 위치한 느낌 있는 서점 <이딩슈워(一定书屋)>에 처음 갔을 때는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낡은 고동색 문 앞에는 나를 뚫어지게 보는 헤르만 헤세의 사진이 붙어 있었을 뿐 아무런 공지도, 소식도 적혀 있지 않았다. 이방인에게 자주 찾아오는 '오늘 쉽니다' 공격. 이런 일이 잦으니 이제 짜증도 나지 않았다. 오히려 기뻤다. 한 번 더 이 골목을 걸을 이유가 생겼으니까.


효율적인 동선을 중시하던 예전의 나는 막히거나 길을 잘못 들어 시간을 허비하게 되면 쉽게 우울해지고 짜증이 났다. 자책하기도 하고, 은근슬쩍 옆 사람 탓으로 돌리기도 했다. 이제는 안다. 산책을 완성시켜주는 건 목적지만이 아니라 설레며 가는 길, 헤매며 스치는 풍경들, 여운을 안고 돌아오는 시간, 그 모든 여정이라는 걸. 그러니 지금의 나는 오늘 쉽니다 공격 앞에서도 한 없이 초연하다.


이딩슈워를 다시 찾아간 날은 눈부신 여름이었다. 마침내 열려 있는 문을 반기며 들어가 보니 서점이라기 보다는 작은 차방에 가까웠다. 책의 종류는 많지 않았지만 오래된 책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루쉰, 라오서, 헤르만 헤세, 밀란 쿤데라 등 실내에 가득 붙어 있는 대가들의 사진만 봐도 범상치 않은 컬렉션을 자랑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확실한 취향을 가진 공간만이 내뿜을 수 있는 아우라가 있다. 그 아우라를 가득 받아 서점 근처 후통을 걸었다. 7월의 후통과 하늘은 유난히 아름다웠다. 이 정경을 보게 하려고 서점 문이 계속 닫혀 있었고 이 후통을 여러 번 오게 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중국 여행기를 건축가의 시선으로 써내려 간 <중국인은 왜 시끄러운가>에서 오영욱은 이런 말을 했다. “청명한 햇살 아래의 도시는 어쩔 수 없이 아름답다. 건축의 시작과 끝은 빛에 의해 완성되기 때문이다.” 후통과 햇살을 한 눈에 담고 있자면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다.


강렬한 햇볕이 비치는 구역과 나무 그늘을 왔다 갔다 번갈아 걸으며 옌롄커의 문장도 떠올렸다. '팽팽하게 조인 가죽끈처럼 좁고 곧게 나 있는 오솔길', '달빛 속을 흘러 다니는 물 같은 귀뚜라미 울음소리', '막막하고 아득하게 퍼져가는 맑고 투명하게 걸러낸 듯한 공기', '가슴 속에 미친 듯이 달리는 토끼 한 마리가 들어 있는 느낌’ 등 몇몇 표현이 마음에 두둥실 떠올랐다. 나는 미친 듯이 달리는 토끼 한 마리를 가슴에 품고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들으며 걸러낸 듯한 공기를 들이마시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빛나는 그의 문장들 뒤편엔 아득한 어둠이 있다. 길고 긴 금서 목록은 그가 투쟁해 온 세월과 그 속의 좌절을 대변해 준다. 자신이 쓴 소설로 인해 그는 절대 받아들여지지 않을 운명을 지닌 반성문을 끝없이 쓰고, 하루아침에 군대에서 쫓겨나고, 사람들의 질타를 받고, 영문도 모른 채 집이 철거되는 시련을 겪는다. 심지어 귀향했을 때는 촌장에게 찾아가 다시는 고향에 관한 글을 쓰지 않겠다고 사죄하기도 한다.


에세이 <침묵과 한숨>에서 그는 스스로를 '어둠을 가장 잘 느끼는 사람'이라고 칭한다. 첫 번째 글의 제목은 '어둠을 느끼도록 하늘과 삶이 지명한 사람'이다.


-걸어가는 어머니의 뒷모습이 바람에 날리는 마른 낙엽 같았다. 그리고 나는 먹을 수 있다는 그 점토 앞에 서서 지는 해와 마을의 집들, 들판과 황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내 눈앞으로 천으로 된 거대한 막처럼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나는 어둠을 가장 잘 느끼는 사람이 되었다.

이때부터, 나는 너무 일찍 시련이라는 단어를 기억하게 되었다. 16p


-나는 그 광활하고 온통 혼란과 생기로 가득한 땅에서 나와 나의 글쓰기가 많든 적든 간에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굳게 믿는다. 왜냐하면 삶과 운명, 하늘이 나를 태어나면서부터 어둠을 느낄 수 있고 느껴야만 하는 사람으로 지정했기 때문이다. 20p


숙명적으로 어둠을 잘 느끼는 사람이기에 그는 왕성한 성장 뒤의 왜곡을, 발전 뒤의 부패와 부조리를, 일상적인 이치를 넘어서고 있는 매일을 선명하게 본다. 심연의 불안, 경계심, 권력에 대한 두려움까지 고스란히 전해지는 에세이 속의 그는 소설 속 거침없는 문장들과 괴리가 컸다. 문학을 하는 예술가로서 중국 사회의 탄압을 온몸으로 받아온 세월의 고통은 몇 장의 글로는 결코 묘사할 수 없는 어둠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비천하기 때문에 계속 쓴다.


-확실히 말하건대 나는 중국의 현실이 우리가 말하는 문학을 필요로 하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문학 창작이 중국의 현실 속에서 어느 정도의 의미를 갖는지도 알 수 없다. 이는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 어떤 힘 있고 필연적인 죽음을 마주해야 하는 것과 같다. 존재와 무의미, 출판의 실패와 글쓰기의 막막함, 그리고 여기에 더해 거대한 시장과 매체의 조작, 현실 속에서의 문예 정책과 그 규제 및 제한을 마주해야 한다. 이리하여 중국 현실 속에서는 작가들의 글쓰기에 거대한 비천함이 형성된다. 하지만 비천하기 때문에 더욱더 글을 써야 한다. 비천함 때문에 비로소 글을 써야 한다. 비천함 때문에 글을 쓰는 수 밖에 없다. 이리하여 또 사람들이 쉽게 무시하고 생략하는 순환의 역설이 이루어진다. 작가는 비천하기 때문에 글을 써야 하고 글을 쓰기 때문에 비천하다는 것이다. 글을 쓸수록 더 비천해지고 비천해질수록 더 글을 써야 한다. 61-62p


-그리고 이때부터 내 글쓰기는 영원히 뭔가를 피하고 뭔가를 감추기 시작했다. 유년의 아이가 겁에 질려 외롭고 조심스럽게 길을 가면서 발밑에 뱀이 있지나 않을까, 하늘에 매가 있지나 않을까, 갑자기 길 위에 늑대나 개, 혹은 방어하기 어려운 또 다른 들짐승이 나타나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것 같았다. 이때부터 나는 인생의 길에서 갈수록 뭔가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무슨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을 경계하게 되었다. 나는 줄곧 자신의 글쓰기가 뭔가를 쓰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쓰지 못하는 상태에 놓여 있다고 느꼈다. 줄곧 뭔가를 생략하고 뭔가를 회피하고 있었다. 57p


-어떤 각도에서 보자면 작가는 인간과 기억을 위해 느끼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기억과 느낌 때문에 우리는 글쓰기라는 행위를 뜨겁게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15p


자신의 소설을 모국어로 조국에서 출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자신의 영혼을 먼 곳으로 쫓아버린 듯한 황량함을 느꼈다. 그 황량한 어둠에서 잉태된 그의 빛나는 문장들을 오래 볼 수 있을까? '어둠을 제일 잘 느끼도록 하늘과 삶이 지정했다'라는 그의 문장에 '빛'이라는 단어를 추가하고 싶다. 어둠을 잘 느끼는 사람만이 빛도 가장 선명하게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의 문장들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여름 후통에 서서 글쓰기라는 행위를 뜨겁게 사랑하는 그가 닳지 않는 펜을 소유하기를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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옌롄커 (2).jpeg 옌롄커(阎连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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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과 맥주, 후통(胡同)을 사랑하는 도시 산책가. 매일 조금씩 걷고, 매일 조금씩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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