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과 절망 사이,라오서의 뤄퉈샹쯔와 즈샹셩인슈뎬

인력거꾼의 팍팍한 삶

by 심루이

이동 수단의 속도와 그 공간을 이해하는 깊이는 반비례하는 것이라고 했다. 차를 타고 베이징 시내를 달리면 고궁의 정문은 찾을 수 있겠지만 후통 정육점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기를 써는 인상 좋은 사장님의 활기는 만날 수 없다. 사합원 지붕에서 한가롭게 낮잠을 자는 고양이들이나 아주 천천히 걷는 후통의 어르신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도시의 면모를 구석구석 살펴봐야 하는 도시 산책자에게 제일 어울리는 이동 수단은 역시 걷기. 다음은 차창 너머로 거리를 살펴볼 수 있는 버스. 답답해서 선호하지는 않지만 시간에 쫓기는 ‘애데렐라’에게 늘 정직한 도움을 선사하는 것은 전철이다. 중국판 카카오 택시 ‘디디츄싱(滴滴出行)’은 빠르고 편리하지만, 혼자 이동할 때는 최소한으로 이용한다.


하지만 베이징에는 이 모든 교통수단을 능가하는 것이 하나 있으니 바로 인력거다. 베이징 유명 관광지인 스차하이 근처에 가면 호객 행위를 하는 무수한 인력거꾼들과 인력거 뒤에 앉아 낯선 도시를 즐기는 파란 눈의 외국인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인력거는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니라 베이징 문화의 한 축이다.


다른 이가 내 몸을 끈다는 게 죄스럽기도 하고, 편한 자전거가 있는 우리에게 인력거라는 선택지는 먼 얘기였지만 부모님과 베이징 시내 일일 투어를 할 때 딱 한 번 타본 적이 있다. 막상 타보니 기대보다 훨씬 스릴이 넘쳤고, 짧은 중국어로 유쾌한 인력거 꾼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맛이 있었다. 그의 고향은 광저우 근처의 작은 도시고, 가족들은 그곳에서 생활한다고 했다. 땀에 젖은 그의 등을 보며 반사적으로 '뤄퉈샹즈'를 떠올렸다.


<뤄퉈샹즈(骆驼祥子)>는 베이징을 대표하는 작가 라오서(老舍)가 1930년대에 쓴 소설로 '낙타(뤄퉈)'라는 별명을 가진 가난한 인력거꾼 ‘샹즈’의 불행한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내 찬사를 받았다. 소설은 베이핑의 다양한 인력거꾼을 구분하며 시작된다.


젊고 힘이 넘치며 발걸음이 날랜 이들은 1등급이다. 이들은 멋진 인력거를 종일 임대해서 자기 마음대로 인력거를 차고에서 뺐다 넣었다 하며 일한다. 짧은 거리는 상대하지 않고 주로 급행차를 타는 손님만 기다린다. 여전히 상당한 체력을 가지고 있어 차비를 흥정할 때도 나름 품위를 유지하지만 1등급에는 속할 수 없는 이들이 2등급. 반일제나 종일제를 선호하지만 주로 오후 4시부터 밤새워 인력거를 끄는 '밤치기'를 한다. 3등급은 낡은 인력거를 몰고 감히 밤치기를 할 수 없는 꾼들을 칭한다. 새벽부터 오후 3-4시까지 열심히 달리지만 사납금(인력거 대여료)이나 하루 생활비 정도를 겨우 번다. 속도가 느리니 들어오는 돈은 적다.


인력거꾼 사이에도 스페셜 등급이 있었으니 외국어를 할 줄 알아서 전문적으로 서양 손님을 태우는 이들이다. 이들은 주로 장거리를 뛰며 '남들과 경쟁할 필요가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채 한 눈 팔지 않고 길가에 바짝 붙어서 달린다.' 절대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경쟁력인 외국어를 알려주지 않는다.


또 다른 마흔 살 안팎의 인력거꾼들이 있다. 그들은 이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인력거와 인연을 맺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다가 삶과 죽음을 분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어쩔 수 없이 인력거 채를 손에 쥔 이들이다. 딱히 등급을 매기기도 애매한 흙수저다.


부담되는 사납금이 있으니 다들 전세 인력거꾼이 되거나. 자기 인력거를 사고 싶어 한다. 샹즈도 그중 하나였다. 소설 초반 샹즈는 인력거를 사기 위해 술과 담배도 멀리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데 그 노력이 실로 눈물겹다. '인력거를 사는 것은 그의 소원이자 희망이며 심지어 종교와도 같았'고, 결국 인력거 구입에 성공하지만 순간의 판단 착오로 군부대에 끌려가며 잃어버리고 만다. 좌절한 그가 군부대를 탈출하며 힘들게 끌고 나오는 것이 바로 낙타 세 마리다. 그의 이름 앞에 '낙타'라는 애칭이 붙은 이유다.


-마흔이 넘은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미 10년 넘게 인력거를 끌어 근육이 쇠잔할 대로 쇠잔해 있었다. 다른 인력거꾼보다 처져도 감내할 수밖에 없었고, 조만간 길가에 고꾸라져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들 스스로도 점차 깨닫고 있었다. 7p


-부들부채 한 쌍으로 땅에 부채질을 하는 듯 팔자걸음으로 뛰는 건 의심할 바 없이 시골에서 갓 올라온 신참내기다. 고개를 깊이 처박고 양발을 땅에 끌면서 뛰는 속도가 걷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면서도 뛰는 듯 시늉을 내는 자라면 오십 줄에 들어선 늙은이다. 경험은 풍부하지만 기력이 부치는 이들에게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 가슴을 안쪽으로 깊게 움츠리고 다리를 높이 들어 올리며 걸음을 옮길 때마다 머리를 쭉 내민다. 그들은 힘차게 달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남들보다 조금도 빠르지 않다. 그들은 허세에 의지하여 자신의 존엄을 유지하고 있다. 15 p


-만약 노새나 말처럼 낙타들이 온순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그것에 주의하느라 정신을 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낙타란 녀석은 끔찍이도 온순해 도무지 견딜 수 없을 정도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심신이 멍해졌을 때는 낙타가 여전히 그의 뒤에 있는지도 의심이 들었다. 마치 거대한 얼음덩어리를 끌고 가는 느낌이었다. 그 커다란 짐승이 어두운 갈림길 저편으로 들어가 얼음처럼 녹아 사라진다 해도 그는 알아채지 못할 것만 같았다. 40p


'가진 능력은 오직 인력거를 끄는 것이었으니, 믿을 수 있는 희망 역시 자신의 인력거를 사는 일뿐이었던 그'에게 삶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거짓 임신으로 자신을 협박하고 회유한 후니우와 결혼하지만 그녀는 출산 중 사망하고, 이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이웃집 딸 샤오푸즈와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려고 하지만 그녀는 사창가에서 자살을 하고 만다.


루쉰, 바진과 함께 중국 3대 문호로 꼽히는 라오서(본명 수징춘)는 베이징의 만주족 출신 가정에서 태어나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다. 베이징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1924년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중국어를 가르친다. 당시 서양 문학을 접하면서 소설가의 꿈을 키웠다. 1936년 발표한 그의 대표작 뤄퉈샹즈는 1945년 미국에서 'Rickshaw Boy(인력거꾼)'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어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한때 '인민예술가'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그였지만 생의 마지막은 너무나 처참했다. 문화대혁명으로 홍위병의 표적이 된 라오서는 무차별한 구타를 당한 다음 날 타이핑호에서 사체로 발견된다.


바바오산에 있는 그의 비석에는 생전에 직접 썼던 글귀에서 따온 이 문구가 쓰여 있다.


-책임을 다한 문예계의 졸병, 이곳에 잠들다.(文艺界尽责的小卒,睡在这里)


라오서는 오랜 시간 베이징에 머물렀고, 베이핑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나도 특별한 이유 없이 라오서를 좋아했다. 라오서가 한때 일했다는 초등학교(方家胡同小学)를 찾아서 팡지아후통을 걷고, 펑푸(丰富)후통에 있는 라오서 기념관도 종종 들렀다. 베이징에는 고인이 직접 살았던 집을 개조해서 그를 추모하는 기념관으로 운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곳도 라오서 사망 후 약간의 리모델링을 거쳐 1999년 문을 열었다. 라오서 탄신 100주년 하루 전날이었다. 작가가 생전에 직접 사용한 가구들과 모자, 안경이 놓여 있는 소박한 생가를 살펴보며 소박했던 라오서를 생각한다.


'종이 위 목소리'라는 낭만적인 이름을 가진 중고서점 <즈샹셩인슈뎬(纸上声音书店)>에서 라오서의 뤄퉈샹즈를 싼값에 살 수 있었다. 이곳은 오래된 소설책을 30위안에 구입할 수 있는 곳이다. 시청취와 둥쓰후통에 위치한 서점에 들를 때마다 낡고 오래된 책을 열심히 고르는 어르신들을 만났다. 이미 인생의 절망도 희망도 바닥까지 맛보셨을 것 같은 어르신들이 책을 고르는 장면은 나를 제일 안심시키는 풍경이어서 자주 그곳을 찾았다. 그 풍경은 내게 '읽기'보다 더 실용적이고 효과적인 것들을 해야 하지 않느냐는 세상의 재촉에 아직 더 헤매며 읽어도 괜찮다고, 당장의 쓸모가 유일한 정답은 아니라고 말해주는 느낌이었달까.


그들은 츠타야 슈뎬의 마스다 대표의 말처럼 ‘오랜 시간 문화 콘텐츠를 곁에 두고, 좋은 공간을 경험한 끝에, 자신만의 취향과 감각이 일상에 스며든 어른들’이다. 차림새와 상관없이 우아하고 여유로워 보이는 어르신을 곁눈으로 살피면 ‘나도 저렇게 노년을 살고 싶다’는 마음이 아지랑이처럼 피어났다.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종교와도 같던 인력거를 샀지만 금세 빼앗기고,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에 벅차 올랐을 때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린 샹즈의 절망적인 운명은 현진건 <운수 좋은 날>의 또 다른 인력거꾼 김첨지와 겹쳐진다. 손님이 유난히 많은 운수 좋은 날에 갑자기 다가온 아내의 죽음처럼, 희망에 차올랐을 때 무참하게 무너지는 삶. 희망을 줄 듯 줄 듯 하지만 끝내 내어주지 않는 삶. 우리가 언젠가 마주한 혹은 마주할 삶의 모습이다. 그럼에도 계속 나아가야 할까? 김소영 작가는 이런 문장을 썼다. '언제나 절망이 더 쉽다. 절망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얻을 수 있고, 무엇을 맡겨도 기꺼이 받아 준다. 희망은 그 반대다. 갖기로 마음먹는 순간부터 요구하는 것이 많다. 바라는 게 있으면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외면하면 안 된다고, 심지어 절망할 각오도 해야 한다고 우리를 혼낸다. 희망은 늘 절망보다 가차 없다. 그래서 우리를 걷게 한다.'


희망은 잔인하고, 가차 없다. 하지만 인력거보다 더 무겁고 눈물겹도록 힘겨운 삶을 이끌게 하는 것은 결국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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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과 맥주, 후통(胡同)을 사랑하는 도시 산책가. 매일 조금씩 걷고, 매일 조금씩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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