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여운 할아버지들
1.
<언어의 온도>의 이기주 작가 할아버지가 이승에서 남긴 마지막 말은 "손..."이었다. 그 단어는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의 몸과 마음속에서 오랫동안 쟁여진 단어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병원에서 일하는 작가의 지인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힘겨운 싸움을 벌이던 환자가 숨을 거둘 때 '손'이라고 발음하는 경우가 꽤 있다고 알려준다. 입을 벌릴 기운조차 남지 않은 생의 마지막 순간에 한 번 더 가족의 체온을 느끼고 싶어서 "손 좀 잡아줘..."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생에서 느끼는 마지막 온기.
문득 베이징의 한 미술관에서 관람한 작품이 떠올랐다. 아빠를 쓰다듬는 것을 기록한 프로젝트였는데 작가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비로소 아버지의 몸을 제대로 만진다. 작가는 이 ‘쓰다듬’을 비디오로 기록해 두었지만 깊은 슬픔 때문에 한 번도 틀어본 적은 없다고 했다. 벽을 가득 메운 아빠를 향한 그리움에 나도 내 아빠가 생각나서 자꾸 눈물이 맺혔다. 떨어지는 눈물을 감추려 괜스레 애꿎은 벽만 만졌던 기억.
2.
보드라움과는 거리가 먼 두툼한 아빠 손을 제대로 잡아본 적이 언제였는지 아득하다. 일으켜 세우기 위해 손을 잡거나 가끔 팔짱을 끼는 것 말고, 안마해드릴 때 어깨를 두드리는 것 말고 손을 꼭 맞잡는 일. 요리를 함께 하다 보니 아빠의 손을 자주 관찰하게 된다. 두꺼운 무를 칼로 썰 때 손등의 핏줄, 가위로 파를 자르는 손 모양 같은 것들. 아빠의 손이 이렇게 앙증맞고 어설프고 귀여웠나, 하는 생각을 한다.
3.
아빠는 두꺼운 무를 두 동강 내 열심히 썰었다. 아직 칼질의 요령이 없어 꽤 힘겨운 싸움이었다. 냄비 물이 끓길래 아빠, 도마 위 무 가져오세요~라고 했더니 썰지 않은 반대쪽 무 반 통을 자랑스럽게 들고 오시는 것 아닌가.
- 그... 그건 다음 요리에 양보하고 이번에는 써신 걸 가져오세요.
아빠가 집으로 가신 후에도 나는 아빠 손에 들려 있던 무 반 통이 생각나서 큭큭 웃었다
4.
노인이 된다는 건 보살핌이 필요한 어린아이와 비슷해지는 것 같다. 혈기 왕성하던 젊을 때보다 확실히 귀여워지는 측면이 있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세상에는 귀여운 할아버지들이 참으로 많은 것이다. 대표적으로 일본 작가 마스다 미리의 아버지가 있다. 마스다 미리는 시한부 선고를 받고 집에서 요양하고 있는 아버지를 인터뷰해 볼까... 생각한다. 살짝 운을 뗐을 뿐인데 1934년생 아버지는 신이 나서 이야기를 끝없이 쏟아낸다. 학교 가는 길에 지갑을 주워 주인을 찾아준 것, 체육복 살 돈이 없어서 체육 시간에 부끄러웠던 것, 어릴 때 살던 집의 구조와 툇마루에서 오줌을 누다가 엄마에게 혼난 것까지... '염주 엮듯 줄줄이 기억이 떠오르'는 느낌이었던 아버지의 수다는 딸의 메모가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끝이 없었다.
첫 번째 취재를 마친 다음 주, 마스다 미리가 집을 다시 찾았을 때 아버지는 안방에서 잠옷을 벗고 셔츠와 바지로 갈아입고 나온다. 마치 진짜 인터뷰에 응하는 유명인처럼 말끔한 복장으로. 이렇게 귀여운 할아버지라니.
최승자 시인도 <참 우습다>라는 시에서 '나는 아이처럼 팔랑거릴 수 있고, 소녀처럼 포르르 포르르 할 수 있'다고 했지. '할머니맹키로 흐르르 흐르르' 말고.
5.
딸과 함께 하는 시간에 관한 설렘은 우리 아부지도 비슷한 것 같다. 오전에 정기 위내시경 검진이 있으시다기에 한 주 미뤄도 된다고 말씀드렸더니 괜찮다며 병원에서 우리 집으로 바로 오셨다. '팔랑팔랑, 포르르' 오셔서 땀을 닦으며 '한 번 마음먹고 시작한 수업은 미루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아부지가 귀여웠다. 봄에는 도다리쑥국, 가을에는 전어회 등 이맘때는 꼭 이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똥고집도 요즘은 웬일인지 조금 귀엽게 느껴진다. 일부러 아껴 놓은 빵을 다 먹어치워버린 아빠의 식탐도. 할아버지들은 확실히 조금 더 세상의 귀여움을 받을만한 존재인 것이다.
채소를 자르는 아빠의 오동통한 손을 보며 조만간 저 손을 잡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손깍지도 껴볼 수 있을지도 몰라.
-매일 읽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 친구 같은 남편 춘, 친구 같은 딸 심이와 살고 있습니다.
나의 기록이 당신에게 작은 영감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