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애도법
1.
아빠는 텍스트 중독자다. 운동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 종일 무언가를 읽거나 적는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종이 신문. 작은 가방에 그날의 신문을 돌돌 말아 보물단지처럼 모시고 다니며 부고까지 샅샅이 읽었다. 아빠 가까이 가면 늘 신문지 냄새가 났다.
2.
세계 최고 짠돌이 심크루지 선생이 유일하게 과소비하는 분야가 바로 서적이다. 예전부터 나는 그 점이 신기했다. 택시 타는 돈은 아깝지만 책 사는 돈은 아끼지 않으시는구나. 아빠의 책장에는 책이 많았고 아빠는 늘 소파에 누워 책을 읽었다. 은행원이라는 직업에 걸맞지 않게 경제 서적은 하나도 없었고 주로 이상문학상 작품집 따위였다. 하나코는 없다, 하얀 배, 천지간, 사랑의 예감, 아내의 상자 등의 낯선 제목을 마주하며 막연한 호기심과 지레짐작 사이에서 나는 조용히 자라났다.
뭐든 남기길 좋아하는 아빠는 책에 밑줄을 많이 그었다. 읽기 시작한 날짜와 완독한 날짜도 적어두고 어떤 책에는 별점을 매긴 포스트잇을 붙였다. 나는 아빠의 책을 빌려 밑줄을 훔쳐보는 걸 좋아했다. 하필 왜 이 문장이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서. 그것은 깊은 대화가 어려운 부녀의 새로운 대화 방식이었다.
3.
은퇴를 한 뒤 아빠는 매일 도서관으로 출근했다. 공부하고 시험 보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아빠라 몇 개월새 아빠의 자격증은 열몇 개가 됐다. 요즘은 달라졌다. 예전처럼 독서나 공부를 하기에는 시력과 집중력이 많이 떨어졌다고 한다. 독서에 대한 열정도 사람과 함께 늙어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오후는 슬펐다. 하지만 아빠는 여전히 책을 산다. 시력을 잃은 후에도 <레 미제라블>을 항상 손에 쥐고 있던 <자기 앞의 생>의 하밀 할아버지를 떠올린다.
4.
첫 직장이 광화문에 있었기에 아빠와 노포 <광화문집>에서 종종 김치찌개를 먹었다. 광화문집을 좋아하셨던 이유도 어쩌면 교보문고와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김치만 맛있으면 다 맛있는 게 김치찌개 아닌가 하는 마음으로 갔다가 이렇게 허름한 공간에서 이렇게 경이로운 맛을 내다니, 하며 놀랐던 기억. 그러니 깊은 맛을 위해서는 '김치만 맛있으면 장땡'은 아닌,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은 메뉴가 바로 김치찌개가 아닌가.
삼겹살과 김치를 달달 볶고, 버섯과 호박, 양파를 넣고 팔팔 끓인다. 김치의 신맛은 올리고당으로 잡고 밍밍한 육수에 다진 마늘을 추가했다. 조리 수업을 진행하면 할수록 요리가 이렇게 간단한 것이었나 새삼스럽다.
매 수업마다 계란 프라이를 해보고 있는데 오늘 처음으로 동그란 노른자가 살아있는 써니사이드업이 만들어졌다. 그간 아빠가 몇 개의 계란을 깼던가. 탱글한 노른자가 마치 정오의 태양처럼 거룩하게 빛난다.
5.
세상에 천 개의 이별이 있다면 천 개의 슬픔과 천 개의 애도법이 있을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의 서점 <시티라이트>에서 일하는 스테이시 루이스는 어느 날 젊은 여성에게 짧은 편지를 받는다. 알리고 싶은 사실이 있는데 다 듣고 나서 모멸감을 느끼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운을 떼는 무서운 편지다. 그녀는 아버지의 유골을 아버지가 생전에 가장 좋아했던 장소인 이 서점 시 코너 갈라진 틈새 곳곳에 아무도 모르게 뿌렸다고 고백했다. 그녀는 아버지가 거기 계신다는 생각에 지금도 위로받고 있다고 했다.
<H마트에서 운다>를 쓴 작가 미셸 자우너는 엄마가 떠난 뒤 엄마 손맛을 떠올리며 김치를 만든다. '네게는 항상 김치 냄새가 날 테니 김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는 절대 사랑에 빠지지 말라'라고 했던 엄마. 그녀에게 요리는 엄마를 그리워하고 스스로를 치유하는 애도의 방식이다. 아니 에르노는 치매에 걸려 떠난 엄마를 추억하는 <한 여자>를 쓰는 10개월 동안 매일 어머니 꿈을 꾼다.
김설 작가는 은퇴 기념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떠난 산티아고 순롓길에서 오빠의 부고를 듣고 갑작스럽게 자살 유가족이 되었다. 또 다른 자살사별자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찾기가 쉽지 않았던 그녀는 스스로 애도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아직 이 죽음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릅니다>는 그녀가 2년간 적어내려간 일기를 책으로 묶은 것이다.
얼마 전 아버지를 하늘로 보낸 친구는 요즘 아버지가 좋아하셨던 클래식 곡들을 새롭게 듣고 있다고 했다. 감정 표현이 크지 않은 그녀에게 참 걸맞은 애도다. 가만히 앉아서 베토벤 교향곡을 듣고 있을 친구의 모습을 종종 떠올린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아주 천천히 부모님을 추억하며 살아가겠지.
아빠가 떠나도 아빠의 책과 밑줄은 남을 것이다. 적요한 어느 공간에서 그 문장을 읽는 것이 먼 훗날 나만의 애도법이 될 것이다. 그 사실이 내게 꽤 큰 위안이 된다.
-매일 읽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 친구 같은 남편 춘, 친구 같은 딸 심이와 살고 있습니다.
나의 기록이 당신에게 작은 영감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