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알러지와 평창 롱패딩
1.
빈곤한 환경에서 성장했고, 몇 십 년간 식구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온몸을 바쳐 일한 사람답게 아빠의 소비는 스크루지와 비슷했다. 물이든, 불이든 아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에어컨은 우리 집에서 가장 비싼 장식품이었다. 일년에 단 한 번도 켜지지 못하는, 딱히 예쁘지도 않은 장식품. 아빠의 옷과 신발은 엄마가 구입했다. 아빠가 스스로를 위해 하는 소비라고는 고작 술과 책이 다였다. 어쨌거나 하나 있는 집이 우연히 서울 강남에 있었고(우리는 양재천이 똥물일 때부터 쭉 근처에 살았다), 아빠는 꽤 부자가 된 것일지도 몰랐는데 오래된 아파트는 재건축을 30년째 기다리고 있으니 여전히 현금이 없었다.
현금이 있다면 아빤 팍팍 쓸 수 있을까? 친오빠 앤드류와 나는 아빠에게 백만 원을 주고 몇 시간 안에 돈을 모두 써야 하는 미션을 주면 아빠는 실패할지도 모른다고 낄낄거렸다. 아빠는 돈을 쓰는 방법을 잃어버렸는지도 몰라. 아, 어쩌면 백 만원치 책을 살지도 모른다.
2
어린 시절 외식의 추억을 떠올리면, 엄마 아빠 중 한 명은 얼굴이 어두웠다. 주로 시작은 아빠 얼굴 쪽이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아빠에게 화가 난 엄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런 분위기로 먹을 거면 차라리 외식이라는 걸 하지 말지라고 생각했다,면 거짓말이고 앤드류와 나는 열심히 돼지갈비를 뜯으며 자주 찾아오지 않는 만찬을 즐겼다.
택시도 갈등의 씨앗이었다. 명절에 부산 외가댁에 가서 김치고 생선이고 먹을 걸 바리바리 싸 들고 기차를 탄다. 기차가 서울역에 도착할 시간이 되면 오빠와 나는 긴장한다. 우리는 이 무거운 짐을 들고 '택시를 탈 것인지, 전철 혹은 버스를 탈 것인지'라는 전대미문의 어려운 결정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아주아주 가끔 택시를 탔다. 적막 속에 요금이 올라가는 미터기를 보고 있자면 누군가 내 목을 조르는 느낌이 들었다. 막히기라도 하면 쩜쩜쩜. 언젠가부터 외할머니는 고사리 같은 내 손에 오만 원을 쥐여 주시며 "이 돈으로 꼭 택시타라"고 일부러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역시 할머니는 위대하다.
3.
모르면 어렵지만 제일 쉬운 메뉴 중 하나가 미역국이다. 소고기든, 황태든, 참치캔이든 미역과 넣고 볶다가 육수를 붓고 간을 맞추면 그만이니까. 오늘은 황태 미역국을 끓여보기로 했다. 황태와 미역을 살짝 불리고 참기름과 국간장, 멸치액젓을 적당히 넣어 달달달달 볶는다. 물을 넣고 끓이다가 소금이나 물로 간 봐주면 끝. 맛있는 김치만 있다면 한 그릇 뚝딱이다.
4.
동계 올림픽이 열리던 2018년 평창에서의 아빠는 지금도 미스터리다. 베이징에서 잠시 귀국했던 우리는 강원도 가족 여행 중이었다. 올림픽 경기장 바로 앞 굿즈 매장에서 구경을 하다가 핫하다는 평창 롱패딩을 입어봤다. 태극기가 박혀 있는 한정판이 탐이 났지만 비싸기도 하고, 집에 다른 패딩이 많아서 살 생각은 없었다. 바로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아빠가 갑작스럽게 본인 카드를 주신 것이다. 그날 내가 많이 추워 보였는지, 평창올림픽이라는 국가의 경사 앞에서 통이 커지신 건지는 잘 모르겠다. 얼떨결에 카드를 받아들고 심크루지 선생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잽싸게 결제해버렸다.
제일 추운 겨울날이면 나는 그 패딩을 입는다. 패딩이 워낙 길어서 이불을 뒤집어쓴 듯 따뜻해진다. 여름에도 가끔 옷장을 열어서 그 패딩을 보며 큭큭거린다. 그때 아빠가 진짜 우리 아빠가 맞았나? 아빠도 그 달 카드 명세서를 보고 '내가 왜 그랬지?'하고 놀랐던 것은 아닐까?
딱 하나의 옷만 남겨야 한다면 그것이 될 것이다. 그 옷을 입고서는 도무지 추워할 자신이 없다.
5.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아빠의 소비 울렁증은 여전하다. 식당 문턱을 넘지 않으실 걸 알기에 스시 오마카세 가격은 적당히 비밀에 부치고, 앤드류가 구입한 덴마크산 빈티지 소파의 가격 또한 반으로 후려쳐서 알려드리며 작은 효를 실천하고 있다.
암 재발 선고를 받은 날, <죽는 게 뭐라고>의 사노 요코는 외제차 매장에 들러 오랫동안 마음에 담았던 그린 재규어를 주문한다. 작가는 그것이 본인의 마지막 물욕이라고 적었다.
아빠가 오롯이 스스로를 위해 구입한 가장 비싼 품목은 무엇이었을까. 알고 나면 너무 슬퍼질 것 같아서 차마 묻지 못하고 마지막 미역국을 후루룩 마셨다. 아빠의 마지막 물욕도 요코님의 재규어 정도 되면 좋으련만,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그럴 리가.
-매일 읽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 친구 같은 남편 춘, 친구 같은 딸 심이와 살고 있습니다.
나의 기록이 당신에게 작은 영감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