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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Oct 18. 2023

내 부고문과 장례식 플레이리스트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

1. 

세계적인 음악가 류이치 사카모토의 마지막 이야기가 담긴 에세이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의 뒷부분에는 그의 장례식 플레이리스트가 첨부되어 있다. 그는 본인의 장례식에 울려 퍼질 음악을 직접 선곡했다. 사망 3일 전 "아, 이 곡은 안되겠다"라고 제외하며 곡목을 다듬기까지 했다고 한다. 정신을 놓을 만큼의 고통 속에서도 놓지 않은 음악에 대한 열정, 남아 있는 이들의 슬픔을 덜기 위한 다정한 마음에 몸이 가볍게 떨렸다. 


가을의 초입에서 류이치의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처음으로 죽음의 순간과 내 장례식장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상상해 봤다. 통계적으로 열 명 중 한두 명은 예고 없이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고 한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꽤 많은 이들이 죽음을 준비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미리 죽음을 연습해 보고 준비하는 것은 여러모로 좋은 일이다. 남겨진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생각해 볼 거리들이 꽤 많다. 어디에서 죽고 싶은지, 집인지, 병원이어도 괜찮은지, 어떤 냄새를 맡고, 어떤 음악을 듣고 싶은지, 어디에 묻히고 싶은지 등. 빵보다는 떡볶이를 좋아하지만 그때만큼은 빵 냄새와 커피 원두의 향을 맡고 싶어, 심이가 옆에 있다면 이 노래를 틀어달라고 해야지,라고 생각하며 나는 별로 슬프지 않았다. 


2. 

일본에서는 새해 전날 자신의 장례식 추도문을 쓰는 전통이 있다. 요즘엔 장례식에 쓸 영정사진을 찍고 시신을 위한 옷도 골라둔다고 한다. 꽤 마음에 드는 전통이다. 


월스트리트 저널 부고 전문기자 제임스 해거티는 <그렇게 인생은 이야기가 된다>에서 강조한다. 부고문은 직접 쓰는 것이 좋다. 본인이 제일 잘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평범한 사람인 내가 거창하게 무슨 부고문까지, 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평범한 한 사람의 이야기를 제대로 남겨두는 것이 중요하니까. '보나 마나 망칠 것이 뻔한 가족들에게 내 부고를 맡기지 말자'. 


그렇다면 부고문은 어떻게 써야 할까? 그는 누군가의 부고문을 쓰기 전에 세 가지 질문을 던진다. 


인생에서 무엇을 이루고자 했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목표를 이루었는가?


작가는 이 질문들을 너무 늦지 않게 스스로에게 던지라고 권한다. 한 달, 한 주를 마무리하며 자주 떠올릴 수 있다면 더욱 좋다. 이 질문들은 당신이 인생에서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3. 

부고문의 핵심은 유머에 있다. 저자는 묻는다. 부고마저 재미없다면 죽는 데 무슨 낙이 있을까?하고. 평소에 저질렀던 실수와 본인만 가지고 있는 괴짜의 면모를 잔뜩 넣는다. 이 책에서 유머와 재치가 넘치는 다양한 부고문 예시를 만날 수 있다. 


가령 캐나다의 정치 만화가 마이클 드애더는 어머니의 부고문에 이런 문장을 넣었다. '쿠폰 수집가이자 수제 쿠키 장인, 위험한 운전자'. 오리건주에서 목재 공장 관리자로 일했던 웨인 브로키의 부고는 손자가 작성했는데 첫 문장에서 웃음이 터진다. '2016년 9월 28일, QVC 채널은 충성스러운 고객 한 명을 잃었다.' 웨인 브로키씨는 평소 홈쇼핑 채널 QVC의 굉장한 애청자였다고 한다. 그 외에도 '성미 고약하고 불만 가득한 까다로운 노인네, 패배를 인정할 줄 모르는 사람, 사사건건 말다툼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모두에게 사랑받았다' 등 고인에 대한 솔직한 묘사들이 줄을 잇는다. 


짧은 조리교실 덕택에 아빠는 부고문에 넣을 만한 웃긴 순간들을 많이 생성해냈다. 


먹는 걸 누구보다 사랑했지만 계란 프라이도 못하는 요.알.못으로 오래 살아왔다. 하지만 끝없는 학구열과 딸내미의 희생 덕분에 72세 여름에 써니사이드업을 처음으로 성공했다. 감자칼을 쓰지 못해 감자는 껍질째 먹어야 했지만 밀키트가 담긴 플라스틱 통은 냄비에 넣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배웠다. 혹독했던 과거를 집요하게 묻는 딸내미 탓에 처음으로 본인이 끓인 된장찌개를 먹다 울기도 했다. 


아빠는 평소 유머감각이 부족했지만 부고문에서만큼은 제대로 웃길 수 있을 것 같다. 


4.

지난 추석에는 보름달을 보러 옷을 챙겨 입고 집 앞을 산책했다. 평소였다면 '귀찮아'를 연발했을 나지만 역시 류이치 사카모토의 문장 때문이었다. 에세이 제목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라는 문장은 류이치가 음악을 맡았던 영화 <마지막 사랑> 속 대사이자 그가 대수술을 끝내고 혼자 중얼거렸던 문장이라고 한다.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예측하지 못하고 인생을 마르지 않는 샘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은 고작 몇 차례 일어날까 말까다. 그러나 사람들은 기회가 무한하다고 여긴다. 


기회가 무한하다고 여기지만 고작 몇 차례 일어날까 말까 한 일들로 인생은 채워져 있다. 예를 들어, 보름달을 오래 바라보는 일, 내 장례식의 음악을 손수 골라보는 일, 아빠와 단둘이 요리를 하는 요즘의 시간도 그 속에 포함된다. 


5.

그나저나 장례식 플레이리스트를 구성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너무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고 적당한 명랑감을 유지하되 요란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힌트를 얻어볼까 싶어서 뮤직앱 히스토리를 뒤지니 올해 내가 가장 많이 들은 노래는 가수 이소라의 <신청곡>이다. BTS 슈가와 함께 한 노래인데 특유의 감성이 너무 좋아서 하루 종일 이 노래만 듣던 날이 많았다. 장례식 플레이리스트에 넣어도 될까 싶어서 가사를 찬찬히 뜯어본다. 


그래 난 누군가에겐 봄 누군가에게는 겨울/누군가에겐 끝 누군가에게는 처음/난 누군가에겐 행복 누군가에겐 넋/누군가에겐 자장가이자 때때로는 소음/함께 할게 그대의 탄생과 끝/어디든 함께임을 기억하기를/언제나 당신의 삶을 위로할 테니/부디 내게 가끔 기대어 쉬어가기를.


이럴 수가.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말랑한 감성에, 가사까지 완벽하잖아. 1번은 너로 정했다. 

-매일 읽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 친구 같은 남편 춘, 친구 같은 딸 심이와 살고 있습니다. 

나의 기록이 당신에게 작은 영감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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