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저 들어주세요
1.
아빠가 말이 이렇게 많은 사람이었나 하고 처음 느낀 것은 결혼 전 친척들께 인사를 드리러 부산으로 가는 차 안이었다. 운전하는 춘 옆의 보조석에 있던 아빠는 리액션 좋은 예비 사위 앞에서 완벽한 수다쟁이가 됐다.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둘의 대화를 통해 몰랐던 옛날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알았다. 대화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경청하려는 그 태도. 그 태도가 아빠의 말문을 트이게 했다는 걸.
아빠가 무언가 말을 꺼내려고 하면 귀찮은 요구일지 모른다고 지레 짐작하고 방어적 태세를 취해왔던 순간들이 어렴풋이 지나갔다.
2.
말하기 달인급인 이금희 아나운서는 모교에서 강연을 시작하면서 학생들이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한다. 그녀가 찾은 의외의 답은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이후 무려 15년간 1,500명 남짓의 학생들과 함께하는 일대일 티타임이 이어진다. 교수님이자, 선배인 이 아나운서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던 학생들은 서너 명에 한 명꼴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전적으로 몰입해서 들어주는 경험만으로도 마음에 위안을 얻는 것이다. 이금희 아나운서의 에세이 <우리, 편하게 말해요>에서 한 문장이 마음에 박혔다.
-진심으로 아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저 들어주세요.
누군가와 '진짜 대화'를 하기 위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말하기 기술이 아니라 들으려고 하는 마음이다. 가끔 대화에 몰입하고 싶을 때 나는 온몸이 귀로 변한 다소 그로테스크한 상상을 하며 상대를 바라본다.
3.
아빠와 나는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이지만 그것이 양질의 대화라고 보기는 어렵다. 매번 재테크와 병원, 부동산에 대한 비슷하고 지루한 대화를 나눈다.
조리 교실의 목표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아빠에게 생존에 필요한 기초적인 조리법을 습득시킨다. 둘째, 지금까지 해보지 못했던 깊은 대화를 나눈다. 그러니 수업 전에 요리 준비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대화 준비다.
알랭 드 보통은 <사유 식탁>이라는 책에서 132개의 레시피 뒤에 대화 목록을 제안한다. 일명 대화 메뉴다. 그는 말한다. 식사라면 저마다 노력을 기울인다. 요리책을 사고, 수업도 듣고, 최상급의 기술로 만든 조리 도구를 주방에 들여 놓고, 요리 솜씨를 가다듬는 시간을 들인다. 반면 대화는 '우연히' 잘 되기만을 바라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러한 번지수 틀린 낭만적인 믿음'이 우리의 식사를 망친다. 고루하고 감정이 결여되어 있으며,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대화나 주고받기 때문이다. 디저트를 먹을 때쯤이면 다들 지쳐서 맹렬한 누군가가 고정 관념에 얽매인 소리를 떠들도록 내버려 두며, 결국 요리는 끝내줬지만 교감은 완벽하게 실패한 식사 자리가 되고 만다.
그는 이런 실패를 줄이기 위해 사랑, 자기 이해, 삶의 의미, 비밀, 야심 등 여러 가지 범주에서 대화 메뉴를 제안한다. 헷갈리지 않게 전채, 주요리, 디저트로 구분해 질문 목록을 다듬어 두었다.
-'부모님은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셨나요?(야심, 전채)', '당신의 장례식에서 친구가 당신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길 바라나요?(비밀, 전채)', '딱 5년만 더 살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무엇을 하고 싶나요?(삶의 의미, 주요리)', '어떤 면에서 더 성숙해지고 싶어요?(자기 이해, 디저트)' 등이다.
물론 깜빡이 없이 깊은 대화로 진입하다 보면 나처럼 상대의 혹독한 과거를 건드려서 울리게 될 수도 있지만 (머쓱) 메뉴의 범위를 대화의 영역에까지 확장시켜야 한다는 작가의 주장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4.
모든 것을 포용해줄 것만 같은 따뜻한 계란말이를 만든다. 계란말이는 심이 전문이라 오늘의 조리쌤은 심이다. 노른자가 터질 것을 걱정하지 않고 편안하게 다섯 개의 계란을 깬다. 약간의 소금과 참치, 치즈, 양파, 명란, 콘옥수수, 김 등 원하는 재료를 넣고 휘휘 저어 달걀물을 만든다. 달궈진 후라이팬에 달걀물 삼분의 이를 넣고 부치다 어느 정도 익으면 돌돌 말아서 나머지 달걀물을 붓는다. 부드러운 맛이 생각날 때는 달걀물에 우유를 살짝 넣기도 한다. 완성된 계란말이는 좀 식혀서 잘라야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모양을 고정하기 위해서 김발에 잠시 말아주는 것도 방법. 케첩은 하트 모양으로 완성하고, 조금 느끼한 게 생각나는 날이면 마요네즈나 돈까스 소스도 살짝 뿌린다.
이 간단한 요리에도 비법이 필요한가?싶지만 매우 그렇다. 쉬워 보이는 것을 제대로 만들기가 오히려 어려우니까. 밑반찬으로 나온 계란말이가 끝내주는 백반집에 가면 메인 요리가 나오기도 전에 믿음이 가기 마련이다. 따근하고 폭신한 계란말이가 우리 사이의 빈 공간을 채운다.
5.
"마음을 다해 듣고 할 말을 하면서 살고 있나요?"
이금희 작가의 문장은 우리를 겨냥하고 있다. 이 단순한 질문에 자신 있게 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것은 믿을 준비가 됐다는 것, 사랑할 준비가 됐다는 것. 진짜 대화가 필요한 순간은 바로 지금이니 더 이상 미루지 말자.
-매일 읽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 친구 같은 남편 춘, 친구 같은 딸 심이와 살고 있습니다.
나의 기록이 당신에게 작은 영감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