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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Oct 20. 2023

배신하지 않는 주방에서, 위로의 레시피를

삶의 가장 위대한 기술

1. 

신입사원 시절 큰 실수를 하고 실의에 빠진 내가 춘의 손에 끌려간 곳은 집 앞 중국집이었다. 고개를 떨군 내 앞에 김이 모락모락나는 뜨근한 게살 수프가 놓였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 나는 그럴 자격이 없어, 이대로 사라지겠다고!!를 반복하던 내 목구멍으로 마침내 게살 수프가 들어왔을 때 그 때 내 식도를 통과한 것은 음식이 아니라 작은 위로였다. 아무 것도 못 삼킬 줄 알았는데 이거 왜 이렇게 맛있냐, 하며 엉엉 울었다. 눈물 섞인 수프를 반 정도 먹었을때 나는 아주 조금 괜찮아졌다. 한 그릇 비우고 나니 배짱까지 생겼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지, 어차피 다 지나가, 잘 버티려면 역시 잘 먹어야 해라는 문장으로 포장된 두둑한 배짱이.  


그러니 너무나 절망적일 때에도 입속으로 허락할 수 있는 위로의 음식 하나쯤은 있는 것이 좋겠다. 먹을 자격이 없는 그런 시간은 결코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2. 

<냉정과 열정 사이>를 쓴 일본 소설가이자 싱글대디인 츠지 히토나리가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혼자 키운 아들에게 전하는 레시피를 담은 <네가 맛있는 하루를 보내면 좋겠어>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네게 요리를 가르치고 싶은 건 인생에 도피처 하나쯤은 만들어 주고 싶어서야. 

힘들 땐 언제든 이곳으로 도망쳐 오렴. 

있잖아, 주방은 절대 배신하지 않아.


마음이 왠지 따뜻해졌다. 암요, 주방과 정성을 담은 요리는 절대 배신하지 않지. 그러니 사는 게 힘들 땐 언제든 주방으로 도망치겠어요,라고 다짐하며 에피소드를 조금 더 읽어보니 어랏, 제일 먼저 도망친 건 다름 아닌 아빠 자신이었다. 혼자 어린아이를 잘 키워내야 했던 싱글대디는 매일 아침 부엌의 작은 창을 통해 하늘을 보고 씩씩하게 쌀을 씻으면서 '지지 않을 거야'하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그는 절대 '배신하지 않는' 주방에서 파스타를 삶고 고기를 구우며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정성껏 요리했다. 그의 주문은 이것이었다. 인생은 힘들어도 요리는 맛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적어도 하루에 세 번 행복할 수 있다.  


아빠는 덧붙인다. 


-자신이 딱 좋아하는 스타일의 파스타 면 삶는 시간을 찾는 것이 중요해. 잊지 마, '너는 3분 45초 익힌 페델리니를 먹고 자란 거야'.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는 메뉴와 알맞은 레시피, 내가 딱 좋아하는 면의 삶기 정도를 알아내는 것은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가.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인간 행복의 중요한 요소를 발견했다고 비장하게 밝힌다. 엄청난 철학적 깨달음이 튀어나와야 할 것 같지만 정작 그의 발견은 그런 것들과는 무관했다. 그가 찾아낸 것은 완벽한 리소토 조리법이었다. 


3.

면을 삶는 것은 오묘한 일이다. 삶기는 쉽지만 완벽하게 삶기는 어렵다. 면의 종류는 또 왜 그리 많은지. 파스타, 쌀국수, 소면, 메밀면, 우동과 냉면 혹은 라면. 세상의 수많은 면들은 자신에게 딱 맞는 정도가 있다. 어제의 성공이 오늘의 성공을 보장해 주지도 않는다. 츠지 히토나리도 완벽한 3분 45초를 찾아내기 위해 얼마나 시간과 마음을 썼을까. 


편안한 속을 위해 요즘은 부드러운 소면을 즐겨 먹는다. 파스타는 별로지만 소면은 좋아하는 아빠를 위해 새우토마토 소면을 만든다. 내가 소면을 삶는 방법은 정확하지도 과학적이지 않다. 소면을 넣고 물이 바글바글 끓어오르면서 거품이 보이면 찬물을 살짝 부어준다. 또 한 번 그 과정을 반복한 뒤 불을 끈다. 아빠에게 '고추장 적당히'와 유사한 나의 비과학적이고도 결코 실패한 적 없는 비법을 전수한다. 


마주 앉아 후루룩 후루룩 소리를 낸다. 좋은 요리를 만드는 것, 한 끼의 음식을 맛있게 먹는다는 건 결국 잘 살고 싶은 마음과 같다는 것을 안다. 


4.

절망과 위로의 레시피 사이를 오가며 살아간다. 엄마표 강된장찌개로 이별의 아픔을 달래고, 치즈 불닭으로 업무 스트레스를 날리고, 토마토 훠궈로 이방인의 불안감을 녹였다. 어른이 된다는 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음식으로 스스로를 달랠 수 있는지 데이터를 쌓아가는 것이다. 


일상의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은 <사유 식탁>에 이렇게 썼다. 자기 자신을 돌보는 방법은 삶의 가장 위대한 기술로 대접받아야 마땅한데 스스로를 돌보는 일에는 음식도 빼놓을 수 없다고. 음식의 힘을 빌려 절망과 공포를 극복하기 마련이니까. 


그러니 스스로를, 혹은 내 옆의 소중한 사람을 절망과 아픔에서 건져올려 줄 알맞은 레시피를 수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 레시피를 적재적소에 활용할 수만 있다면 당신은 이미 위대한 기술자다. 


5.

조금은 늦은 밤, 입맛이 없어서 저녁을 거른 아빠를 위해 주방에 반듯하게 선다. 마음을 다해 토마토를 예쁘게 썰어 올리브유, 계란과 함께 '토달토달' 볶는다. 소금을 한 꼬집 넣으며 '맛있어져라', 후추를 살짝 뿌리며 '힘내봅시다'라고 중얼거린다. 색감도 예쁘고 맛있는 토마토달걀볶음을 아빠 앞에 살포시 놓는다.  


어떤 음식은 기도다. 누군가를 위한. 간절한.* 


*김혼비, <다정소감> 중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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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읽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 친구 같은 남편 춘, 친구 같은 딸 심이와 살고 있습니다. 

나의 기록이 당신에게 작은 영감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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