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과 학구열 천국
1.
에도 시대의 유학자이자 막부의 관리이기도 했던 사토 잇사이는 '언지사륵'이라는 수상록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어려서 배우면 커서 이루는 것이 있고
커서 배우면 늙어도 쇠하지 않으며
늙어서 배우면 죽어도 썩지 않는다.
아빠는 절대 썩지 않을 생각이신가 보다. 배움의 여정이 끝이 없다. 은퇴하고 거의 매일 도서관으로 출근한 아빠는 그곳에서 '자격증 콜렉터'라는 별명이 과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자격증을 땄다. 더 제대로 배우고 싶다고 방통대 교육학과도 수료했다. 몇 년 전에는 요양보호사 자격증도 취득하고 올해 수강하는 수업만 해도 하모니카, 중국어, 국선도로 다양하다. 필요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공부 그 자체의 기쁨을 즐긴다.
2.
시니어 IT 기업에서 일하시는 65세 이상의 직원분을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IT 분야에서 일하는 노인들이라니, 단순한 호기심에서 접근했다가 뺨을 맞은 듯 얼얼한 기분이 됐다. 최근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는 빨간 베레모의 K 할머니, 노인영화제에 출품하려고 영화를 찍고 있다는 나비넥타이의 Y 할아버지를 만났다. 인터뷰 말미에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이 너무 기쁘고, 손주가 쓰는 서비스에 기여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는 그들의 자부심에 완전히 압도당했다.
돌아 나오며 거울에 비친 나를 봤다. 다크서클이 짙게 깔리고 총기를 잃은 눈빛. 문득 그들이 아니라 내가 노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늙었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도전하지 않는다면 그게 노인이지 뭐. 그러니 우리는 스물에도 늙을 수 있고 여든에도 젊을 수 있다. 60세가 넘으면 삶의 환희가 줄어들 것이라고 단정했던 스스로를 반성하며 한동안 그들이 가르쳐 준 '청바지(청춘은 바로 지금부터)'를 외치고 다녔더랬다.
3.
<카페에서 공부하는 할머니>의 심혜경 작가와 강릉에서 <보헤미안커피>를 운영하는 박이추 선생님도 비슷하다.
번역가로 활동 중인 심혜경 작가는 배우는 게 취미라고 사방에 자랑하고 다닌다. 기타, 바이올린, 옷 만들기, 태극권, 중국어 등 배우고 싶은 게 생기면 주저하지 않는다. 일단 시작한 뒤 맞지 않으면 과감히 관둔다. 한 번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지,라는 고리타분한 생각의 자리에 일본 드라마 제목을 넣어 둔다.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비장한 마음을 버린 가벼운 마음이 그녀를 '강박 없는 공부 여정'으로 이끌었다. '학교'를 뜻하는 영어 단어 'school'이 '노는 곳'을 뜻하는 그리스어 'schole'에서 온 말이라고 하니 그녀는 자신만의 학교에서 즐겁게 노는 셈이다. 높은 호기심과 약한 지구력 사이에서 방황하던 내게 심할머니의 당부는 동력이 됐다.
강릉에서 <보헤미안커피>를 운영하며 30년이 넘게 커피를 내리고 있는 박이추 바리스타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커피를 공부한다. 월요일부터 수요일은 공장에 나가 커피콩을 직접 볶고,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카페에 나와 커피를 내린다. 손목 인대가 조금씩 고장 나고 있지만 그는 출근하는 날에는 다른 직원에게 커피를 맡기지 않는다. 2030년, 여든이 되면 경북 울진에 카페를 낼 계획도 가지고 있다. 그 나이에 또 일을 벌이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맛있는 커피를 향한 그의 열정을 막을 수는 없다.
4.
아빠를 닮아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는 내 학구열과 호기심이 닿지 않은 분야가 사실 요리다. 요리를 제대로 배워본 적도, 배워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 목표는 늘 '빨리빨리'였다. 책도 읽어야 하고, 산책도 가야 하고, 중국 드라마도 봐야 하고 세상에는 재미있는 것들이 차고 넘치니 그것들을 위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요리와 살림에 들어가는 시간을 아껴야 했다.
이런 열망과 급한 성격이 만나니 그야말로 시너지가 났다. 김밥도 20분이면 후딱 만든다. 중요한 것은 준비와 멀티태스킹이다. 김밥에 들어가는 재료는 계란, 햄, 어묵, 시금치 등 그때 냉장고에 있는 세 가지 조합으로 만든다. 필요한 재료를 모두 꺼내 일렬로 둔 뒤 해동이 필요한 것들을 녹이면서 계란을 깨고, 계란을 부치면서 어묵과 햄을 썰고, 계란을 부친 팬 위에 어묵과 햄을 볶아 버리는 식이다. 잽싸게 김밥을 말고 있으면 두부만 넣은 된장국이 팔팔 끓는다. 대부분의 요리는 25분 안에 끝난다.
5.
정신과 전문의로 학생들을 가르쳤던 이근후 교수 또한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끝없이 도전했다. 퇴임 후 아내와 사단법인 '가족아카데미'를 설립해 노년을 위한 생애 준비, 부모 교육 등의 분야에서 활동했고 30년 넘게 매년 네팔에서 의료봉사를 했다.
시력장애가 생겨 더 이상 글을 쓰기 힘들어지자 장애인 요양보호사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입으로 최근의 저작들을 썼다. 이근후 교수가 입으로 구술하면 보호사 선생님이 받아 적고 그 내용을 다시 교수님께 읽어 주며 글을 다듬고 첨삭해 한 편의 글을 완성하는 식이다.
그는 일찍이 76세의 나이에 고려사이버대학 문화학과를 최고령으로 수석 졸업하면서 화제를 모았다. 은퇴 후 다시 학생의 신분으로 돌아간 그에게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그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일흔 넘어 한 공부가 제일 재미있었어.
암요, 성적보다 성장이 중요한 공부, 강요가 아닌 진짜 하고 싶어서 하는 공부가 재미없을 리 없지. 30년 뒤, 나는 SNS에 이런 공지를 올리게 된다. 카페에서 같이 공부할 파티원(할머니, 할아버지) 대모집, 점심은 간편하게 김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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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읽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 친구 같은 남편 춘, 친구 같은 딸 심이와 살고 있습니다.
나의 기록이 당신에게 작은 영감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