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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Oct 22. 2023

마음은 청춘, 유머는 재주

경쾌한 다장조같은 콩나물을 씻으며

1. 

웬만해서는 열정과 유머를 잃지 않는 할머니들이 있다. 


<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의 75세 유키 할머니는 남편과 사별한 뒤 지루한 일상을 보내던 중 우연히 남성 간의 사랑을 그린 BL(BoyLove) 소설에 눈떠 덕질에 빠진다. 그 덕질을 계속하고 싶어서 아흔 살까지 살아야지! 힘내야지! 하고 주먹을 불끈 쥐는 귀여운 유키 할머니. 


일본의 유명 배우 키키 키린도 있다. 암으로 오른쪽 가슴 적출 수술을 하고 전신암으로 투병하다 떠난 그녀는 심지어 암도 유머 소재로 삼았다. 


-나는 어떤 일에서든 재미를 찾아요. 심지어 병에서도요. 재미를 찾으려면 치료를 그만둬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죠. 


그녀는 병에 걸려서 좋은 점에 대해서도 자주 이야기했다. 상을 받아도 시샘받지 않고 말을 못 해도 아무도 책망하지 않는다. 싸울 힘이 없으니 겸손해지기도 하고, 무언가를 거절할 때도 암 핑계를 대니 쉽다고 했다. 방사선 치료 후유증으로 어깨 통증이 있을 때도 "아프다"라고 하지 않고 "아아, 시원하다"라고 말했다. 이혼 서류를 내고 온 남편에게 '그렇게 무책임한 사람이 서류를 냈다는 건 하나의 진보'라고 추켜 세운다. 나는 몇 개의 영화에서 그녀의 연기를 봤을 뿐이지만 그녀의 삶의 자세가 담긴 글을 읽자마자 롤 모델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나도 세상만사를 재미있게 받아들이는 유쾌하고 웃긴 할머니로 살다가 마지막에 '이제, 그만 물러가겠습니다'라고 인사하고 싶다. 


2.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뇌>에는 전신마비로 한쪽 눈과 귀만 움직일 수 있는 환자 마르탱과 핀처 박사가 등장한다. 삶과 죽음의 갈래길에서 의사는 양전자 방출 단층 촬영 장치로 환자의 뇌를 살펴보는데 마지막에 확인하는 것이 환자의 유머 감각이다. 전두엽을 살피며 박사는 생각한다. 유머 감각은 뇌의 진정한 건강 상태를 재는 척도이자 의식의 맥박이라고. 따져보면 유머는 여러 생물 가운데 인간만이 지닌 고유한 특성이 아닌가. 


연구자들이 66세에서 100세 사이의 인구 가운데 형제자매보다 평균 7년 이상 오래 산 사람들을 조사했더니, 한 가지 성격적인 특징이 두드러졌다. 유머 감각이 더 뛰어났다는 것. 그러니 장수의 꿈을 품는다면 항산화제에 목숨 걸 것이 아니라 유머 교실에 등록해야 한다.


평소에 아무리 재미있는 사람이라도 죽음이 닥치면 별 수 있겠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의 저자 데이비드 실즈는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미국의 소설가 헨리 제임스는 말했다. '마침내 그것이 왔는가? 그 유명한 것이.'


17세기의 영국계관시인인 윌리엄 대버너트 경은 마지막 시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말했다. '외람스러우나 그만두어야겠다. 죽음이라는 실로 중대한 실험이 나를 방해하려 하므로.'

마르크스는 말했다. '유언은 충분히 말을 못 한 바보들이나 남기는 것을.'


가장 재미있는 분은 작가의 아버지다. 가족 여행을 떠나서도 갓길에 차를 대고 팔 벌려 뛰기 100번을 실시하는 아버지. 그는 '죽는 건 쉽다, 아무리 못난 사람이라도 그건 하잖니, 사는 게 재주지'라고 촌철살인 멘트를 날리고 '늙는데 위안이 하나 있긴 하지. 이 일을 다시 할 필요는 없다는 거야'라고 시크하게 읊조린다. 


'아무리 못난 사람이라도 그건 하잖니'라니. 하하


3. 

유쾌한 마음으로 콩나물을 씻는다. 아삭한 식감 때문인지 콩나물을 먹을 때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콩나물을 잔뜩 데쳐 일부는 국을 끓이고 일부는 비빔밥에 넣는다. 저렴한데 활용도도 높고 맛도 좋은 콩나물. 심이와 처음으로 집에서 키워본 채소도 다름 아닌 콩나물이었다. 물만 줘도 쑥쑥 자라는 그 생명력이 어찌나 신기하고 고마웠던지. 


요즘 알랭 드 보통의 <사유 식탁>을 읽고 식재료를 사람처럼 생각해 보는 버릇이 생겼는데 콩나물은 결코 포기를 모르는 에너지 넘치는 친구, MBTI로 표현해 보면 슈퍼 E의 느낌이랄까, 늘 경쾌한 다장조처럼 주위를 밝힌다. 


알랭 드 보통은 사유 식탁에서 핵심 식재료별 특징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것이 상징하는 바를 철학적으로 풀어낸다. 희망의 상징인 레몬, 익살스러운 라임, 안도감을 주는 아보카도, 내향적이면서도 구슬픈 버섯, 친화력 좋은 올리브유 등의 재치 넘치는 묘사를 접한 뒤로는 식재료를 접하는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요즘은 요리를 시작하기 전 주방에 서서 식재료를 가만히 바라보고 인사한다. 안녕, 오늘의 친구들. 조용한 위로가 필요한 날이니 버섯이 어울리지, 하고. 그런 마음가짐으로 집중하다 보니 요리는 즐겁고, 맛은 깊다. 대가의 레시피북 백 권보다 요리와 재료를 대하는 알랭 드 보통의 철학적인 유머가 내 마음을 건드렸다. 유머와 재치의 힘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4.

귀하디 귀한 유머를 잃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우선 유머가 제일 싫어하는 부정적인 마음을 멀리하자. 이제 내 인생은 끝났어,라는 탄식이 아닌 '노인력'이라는 말을 기억하자. 노인력은 노화로 인해 필연적으로 발생되는 증상들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기억력 감퇴는 세상과 사람을 향한 미움을 쉽게 잊을 수 있다로, 정력이 떨어지는 것은 쓸데없는 것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중요한 일만 생각할 수 있다로, 새로운 도전은 줄었지만 그간 쌓은 연륜으로 무슨 일이든 꿰뚫어 볼 수 있는 지혜가 생겼다고 생각한다. ‘혼자 있는 고통’의 ‘론리니스(loneliness)’가 아닌 ‘혼자 있는 즐거움’을 뜻하는 ‘솔리튜드(solitude)’를 떠올린다. 


그러고 보면 유머와 좌절은 한 끝 차이다. 잊지 말자, 우리는 꽤 오래 웃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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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읽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 친구 같은 남편 춘, 친구 같은 딸 심이와 살고 있습니다. 

나의 기록이 당신에게 작은 영감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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