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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Oct 22. 2023

속상함으로 해내는 일들

아이와 함께 끓이는 소고기뭇국

1.

마스다 미리의 <사와무라씨 댁에 밥이 슬슬 익어갑니다>를 보면 69세 엄마와 외식을 하면서 엄마가 튀김덮밥과 튀김메밀국수 중 고민하자 기뻐하는 딸이 나온다. 상대적으로 속에 부대끼는 튀김 요리를 엄마가 골랐다는 것으로 기력의 왕성함을 확인하는 것이다. 식욕은 생욕과도 같으니. 


아빠의 건강 적신호는 식욕 감퇴와 함께 왔다. 허구한 날 제철요리 타령에, 일행보다 젓가락을 먼저 놓은 적이 없어서 눈앞의 모든 것을 먹어 치울 작정이신가 하는 마음이 들 정도였는데, 이제 많이 드시지 못한다. 일찍 젓가락을 놔버리는 아빠를 바라보며 "소식하면 장수해, 아주 좋지"라고 깨방정을 떨어보지만 마음이 쓰다. 아빠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식욕이 감퇴한다는 것이 마치 생의 불꽃이 희미해지고 있는 것일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2.

아빠의 잃어버린 식욕을 찾으러 스시원정대를 꾸렸다. 아빠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인 스시 맛집 투어. 회전초밥, 해산물 스시뷔페, 오마카세 등 유명한 집들을 찾아 모시고 다녔다. 하지만 맛있는 스시 역시 아빠 입맛을 되찾아주지 못했다. 아까우니 다 먹어야지, 의욕적이던 아빠는 이제 없었다. 


아빠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예전 양의 반도 드시지 못하고 '더 이상 못 먹겠다'라고 손사래를 치던 아빠모습이 떠올라 엉엉 울어버렸다. 늙어가는 스스로를 아빠가 혼자 감당하고 있듯 늙어가는 아빠의 모습을 감당하는 것도 자식의 온전한 몫이라는 것을 아는데 아직은 이 변화가 낯설기만 하다.  


3.

한 동안 조리교실을 하지 못했다. 아빠의 어지럼증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처음 시작할 때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수업이라고 생각했는데 수요일 점심이 되면 마음이 슬퍼졌다. 내게도 아빠의 웃긴 찰나들을 포착하고 기억을 나누는 이 시간이 귀했다. 각종 병원을 돌아다녀도 원인을 찾지 못하고 증상이 호전되지 않자 결국 이 수업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부정적인 생각마저 들었다. 


앞으로의 삶은 상실을 견디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나도 모르게 한동안 우울의 강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김신지 작가가 남편과 나눴다는 대화를 읽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부모의 고단하고 투박한 삶을 안쓰러워하는 작가에게 남편은 이야기한다. 속상한 마음이 들 때마다 잘해드릴 것을 하나씩 찾아내 잘해드리자고. 부모의 삶을 안쓰러워하는 건 서로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그래, 속상함을 껴안고 웅크려 있지 말고 드릴 수 있는 것을 하나씩 찾아보자. 속상함을 사랑으로 바꿔 무언가를 해내게 하자. 그것은 내가 올해 먹은 마음 중 가장 훌륭한 것이었다. 


4. 

다음 수업 메뉴는 소고기뭇국이었다. 당분간 아빠와는 끓이지 못할 메뉴이기에 심이와 함께 직접 만들어 갖다 드리기로 했다. 예전 같았으면 배달앱을 켰을 것이다. 클릭 몇 번으로 내가 끓이는 것보다 훨씬 맛있는 국이 30분 만에 배달된다는 것을 아니까. 하지만 나는 아이와 함께 재잘재잘 떠들며 소고기 핏물을 빼고 간장, 액젓, 다진 마늘과 참기름을 섞은 양념장을 고기와 함께 야무지게 버무렸다. 내 손의 온기와 간절함이 조미료가 되어 주기를 바라면서. 고기와 무를 달달 볶고 우려낸 멸치 육수를 넣어 한참을 끓였다. 졸아 들면 육수를 더 붓고, 졸아 들면 육수를 더 붓는 과정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진미채 볶음을 담당한 심이는 디지털 세대답게 평소 좋아하는 백종원쌤의 레시피 영상을 틀어 백쌤과 대화하듯 양념을 만들었다. 마요네즈를 먼저 넣어 진미채에 부드러움을 입히고 고추장, 설탕, 올리고당, 다진 마늘, 물을 섞어 팬에서 끓였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진미채를 버무리니 맛있는 밥반찬이 완성됐다. 

따끈한 소고기뭇국과 진미채볶음, 미리 만들어 둔 무말랭이무침과 그 외 각종 식재료들을 박스에 담아 부모님 집으로 향했다. 


-띵동, 음식 배달 왔습니다. 


바쁜데 뭘 만들어와, 타박하던 엄마, 아빠는 흐뭇하게 한 그릇을 비웠다. 속상함을 동력으로 움직인 오늘의 일상에 마음이 편해졌다. 몇 십 년 전 유년의 아빠가 느꼈을 거대한 허기와 생로병사라는 자연스러운 흐름 앞에서 속절없이 마음 아파하지 말고, 오늘 마음이 담긴 한 그릇의 국으로 부모의 몸에 온기를 보태는 일. 더 나빠질 것 같은 상황에 절망하고 걱정하기보다는 맛있게 먹은 귤 한 상자를 집으로 보내는 일. 보고 싶을 때 지체하지 않고 전화 버튼을 눌러 당신의 목소리를 저장하는 일. 


나는 앞으로의 매일을 그렇게 살기로 했다. 오래 굳은 마음의 상처를 일상의 소소한 기쁨으로 덮으면서. '사랑하는 데에, 더 잘 사랑하는 데에 남은 시간을 쓰면서.'


5.

자식은 언제나 부모보다 늦게 도착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이제야 조금은 의지가 되는 자식의 자리에 서서 나는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다는 듯 장바구니에 무얼 주섬주섬 주워 담는다. 서둘러도 삶에 자꾸만 지각하는 사람에게 유일한 위로가 되는 것은, 시간이 없다는 자각 속에서만 비로소 제대로 하게 되는 일에 사랑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 


사랑하는 데에, 더 잘 사랑하는 데에 남은 시간을 쓸 것이다. 


김신지,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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