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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Oct 22. 2023

괜찮아요, 공동현관 비밀번호는 아직 못 외우셔도

여름의 기록을 마치며 

1.

음식은 아빠를 오래 괴롭히던, 그리고 가장 오래 위로하던 친구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오랜 친구 앞에서도 아빠는 늘 주저했다. 어느 날 아빠가 말했다. 


-이 정도 나이가 됐으면 식당에서 메뉴판 가격에 구애받지 않고 막 시켜 먹어야 하는데. 


그 말이 마음에 오래 남아서 메뉴판을 볼 때마다 아빠 생각이 났다. 가격이 아예 없는 메뉴판을 상상해 보다 문제는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문제는 여전히 심크루지에, 걱정 인형이 필요한 아빠다. 어떻게 하면 아빠의 마음이 편해질 수 있을까? 엄마가 완전히 나으면? 집이 팔려서 빚을 모두 청산하면? 100억 로또에 당첨되면? 뭐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이 우리에게 가장 빛나는 순간이다. 아빠에게 지금 이 순간의 힘을 믿어보자고 말하고 싶어서 생존 조리 수업을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2. 

아파트 단지 안 북카페에 잠시 왔는데 수업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공동현관 비밀번호가 뭐였더라? 


아흔여섯 번째 정도 받은 그 질문 앞에서 나는 차분하지만 재빠르게 나의 부캐, 상담사를 소환해 거의 0000으로 이루어진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알려드렸다. 

 

-#이야, *이야?

-(제가 10초 전에 샵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라는 말은 삼킨다. 상담사는 핵심만 말한다) 

#이에요. 샵샵샵샵샵

-그냥 너 올 때까지 기다릴게. 

-.........


저기요, 아부지, 이제 외우실 때도 된 것 같은데... 허겁지겁 뛰어왔더니 공동현관 앞에 아빠가 없다. 전화도 받지 않으신다. 걱정되는 마음에 집으로 뛰어갔더니 한가하게 침대에 누워 신문을 보고 계시는 아빠. 


-누가 들어올 때 같이 들어왔지. 더운데 선풍기 좀 켜봐라. 


내 몸속에서 자꾸 빠져나가려고 하는 부캐 상담사 언니를 간신히, 아주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3.

처음으로 글을 조금 더 잘 썼으면 하는 열망에 사로 잡혔다. 한 사람의 인생을 조금 더 입체적이고 멋지게 기록하고 싶은데 나의 필력은 그렇지 못해서. 부족한 필력을 아부지에 대한 애정(혹은 애증)과 나만의 유머로 덮어버렸다. 


이 기록을 쓰며 부모를 먼저 떠나보낸 이들과 유쾌하게 늙어가는 선배들을 많이 만났다. 날 것의 생생한 감정과 언어로 '상실'을 이야기한 치마만다 은고지 아디치에, 유쾌하게 아빠를 기억한 마스다미리, 남들을 죄책감에 빠지게 할 정도의 깊은 슬픔을 보여주는 롤랑바르트, 죽음 앞에서조차 낄낄 웃게 만드는 필립로스와 데이비드 실즈, 이렇게 나이 든다면 괜찮지라는 희망을 준 키키 키린과 밀라논나, 심혜경 작가까지. 다들 자신만의 방식으로 늙음을 받아들이고 이별을 기억했다. 세상에 천 만개의 이별이 있다면 그 빛깔도 그만큼이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이미 부모와 이별한 친구들도 떠올렸다. 당시 고심하며 전한 나의 위로가 얼마나 같잖은 것이었는지도 명확하게 깨닫게 되었다. 아디치에는 아버지를 잃고 <상실에 대하여>에서 이렇게 적었다. '"더 좋은 곳으로 가셨다"는 황당할 정도로 주제넘고 좀 부적절하다. 당신이 어떻게 아느냐.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 정보는 유족인 내가 더 먼저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더 좋은 곳에서 편안하실 거야'라는 문장은 이제 감히 담지 않기로 했다. 


조리 교실을 진행했던 올여름, 아빠의 증상은 악화됐고 엄마의 컨디션도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며 우리의 슬픔은 늘어났다. 슬픔을 앓을 때면 박준 시인의 문장을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고아가 되고 있거나 이미 고아입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같이 울면 덜 창피하고 조금 힘도 되고 그러겠습니다. 


생로병사 앞에서는 아무리 사랑하는 가족이라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그저 같이 울고 웃는 수밖에. 


4.

조리 교실을 통해 아빠를 한층 이해하게 됐음은 분명하지만 내가 아는 아빠는 여전히 10% 미만이고, 나머지는 미지의 세계로 남을 것이다. 이 기록을 쓰면서 아빠를 내 멋대로 묘사하며 낄낄 웃기도 하고 차마 외면했던 아빠의 슬픔이 쓰나미처럼 덮친 날에는 엉엉 울기도 했다. 요즘 여성호르몬 폭발인 아빠가 언젠가 이 글을 읽는다면 "내가, 뭘 이렇게까지"하면서 서운해하실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가 아빠를 주제로 무언가를 썼다는 것을 꽤 마음에 들어 하실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아빠와 함께 무언가에 한없이 집중했던 공기를 기억하는 것이다. 아빠와 함께 한 여름의 순간들을 차곡차곡 상자에 넣는다. 


5.

고다마 미쓰오의 <오타니 쇼헤이의 쇼타임>에 이런 문장이 있다. 


-저는 인생이 식사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식사의 목적은 식사를 끝내는 것이 아니라 식사하는 시간을 즐기는 것입니다. 슬프게도 인생에서 꿈을 이루는 것에서만 의미를 찾고, 그 과정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난 후의 만족감도 중요하지만, 식사를 마칠 때까지의 시간을 즐기는 것이 그보다 몇 배나 더 중요하다는 이치를 자신의 인생에도 적용해야 합니다.


아빠의 남은 생이 온갖 유머와 맛있는 음식으로 가득하기를, 누구보다 식사 시간 자체를 즐기실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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