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않는다면 존재하는 것이니까

할머니의 무말랭이무침

by 심루이

1.

할머니를 떠올리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무래도 '밥'이다. 전화하면 늘 듣던 말은 '밥 먹었냐, 뭐 먹었냐, 밥 잘 챙겨 먹어라'였고 심지어 밥을 같이 먹고 있는데도 끊임없이 '밥 먹어라, 더 먹어라' 권하신다. 앤드류와 심각하게 '밥을 먹고 있는데도 계속 밥을 먹으라고 하는 할머니의 심리'에 대해 토론을 한 적도 있다.


친할머니가 차려 준 소박한 밥상은 비싼 반찬이 없어도 맛있었다. 특히 무말랭이무침과 고들빼기김치. 나는 할머니 무말랭이에 김만 있으면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요즘도 무말랭이를 보면 작은 밥상에 오밀조밀 모여 있던 할머니 반찬들이 기억난다. 건강하셨던 할머니는 크게 넘어져 요양병원에 입원하신 뒤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셨다.


요양병원에 계시는 할머니를 뒤로하고 베이징으로 갔으니 어느 정도는 예감하고 있었다. 타국 생활이 끝나기 전에 할머니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비행기를 탈 것임을. 생각보다 그 시기는 빠르게 다가왔다. 베이징 생활 1년 차, 아빠의 전화를 받고 제일 빠른 부산행 비행기를 끊었다. 어리둥절하는 심이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왕할머니가 돌아가셨대". 아직 죽음이라는 개념을 모르던 다섯 살의 심이가 맑은 눈으로 물었다. "할머니가 어디로 돌아가신 거야?". 갑자기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가정의 생계를 온전히 책임져 온 아빠. 장남인데 옆에서 할머니를 모시지 못해 평생 마음의 짐을 가지고 있던 아빠는 수척했다. 아빠는 할머니의 죽음으로 고아가 되었다. 나는 할머니의 죽음도 슬펐지만 그 사실이 더 슬펐다.


2.

이년 후 코로나로 한국에 장기 체류하던 여름, 조부모님 중 유일하게 살아계신 외할머니가 위독해지셨다. 베이징행 비행기를 타기 전 마지막 인사를 하러 심이와 기차를 탔다. 워낙 위중하신 터라 병실에는 나만 들어갈 수 있었다. 상심해하는 심이에게 스케치북에 왕할머니께 전하고 싶은 문장을 써주면 전달하겠다고 했다.


-사랑하는 왕할머니, 영원히 기억할게요.


생의 마지막 끈을 잡고 있는 증조모에게 전하고 싶은 마지막 문장을 손주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기억하는 한 잃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아이도 아는 것일까. 전화를 끊기 전에 늘 하이톤의 목소리로 '사랑해'를 외치는 소녀 같은 당신을 내가, 그리고 당신의 증손주가 오래 기억할 거예요. 이별을 앞에 두었지만 우리의 약속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있었다.


3.

크로아티아 출신 작가 이바 베지노비치-하이돈의 그림책 제목은 <할머니가 나를 모른대요>다. 육아를 도맡아 하며 손녀를 위해 캠핑, 등산, 달리기, 자전거까지 못하는 것이 없던 즈린카 할머니는 어느 날 치매에 걸려 이상한 질문들을 쏟아놓는다. 안경은 어디에 있는지, 학교에는 언제 가는지... 급기야 보석처럼 귀한 손녀를 알아보지 못한다.


하지만 슬프지만은 않다. 아빠는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할머니가 돌아가셔도 할머니는 늘 우리 곁에 계실 거야. 할머니를 기억할 때마다 우리는 행복할 거야.” 손녀는 대답한다. “할머니는 내가 누구인지 몰라도, 나는 할머니가 누구인지 영원히 기억할 거예요”.


4.

할머니는 어쩌면 매일 우리 곁에 존재한다. 걸을 때는 절대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으면 안 돼, 택시에 내릴 때는 꼭 앉았던 자리를 확인해,라고 심이에게 말하며 피식 웃음이 난다. 할머니가 내게 늘 하셨던 말씀, 한때 지겨운 표정으로 듣던 당부들을 아이에게 그대로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문장들은 수차례 반복돼 마치 내 몸에 새겨진 것처럼 끈질기다. 나는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금세 빼고 택시에서 내릴 때 어김없이 뒤를 돌아본다. 그 순간에 어김없이 떠오르는 할머니께 조금은 으스대며 하는 말.


-저 잘 하고 있는 거 보고 계시죠?


어떤 가르침은 그렇게 대대손손 전해진다. 심이도, 어쩌면 심이의 아이도 이렇게 먼저 떠난 이들의 목소리를 기억하며 살아갈 것이다.


5.

무말랭이무침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말린 무만 있다면. 말린 무를 끓는 물에 넣어서 불린 후 찬물에 담가두고 열을 식힌다. 설탕을 먼저 넣고 버무린 후 고춧가루, 간장, 액젓, 다진 마늘, 물엿을 마지막에 넣는다. 물엿과 설탕을 힘께 사용해야 윤기가 난다.


무말랭이무침은 보쌈이나 족발과 함께 먹으면 별미다. 밥반찬으로도 안성맞춤. 무말랭이를 오독오독 씹으며 할머니를 생각한다. 명절을 지내고 먼 길을 떠나는 우리를 아주 오래 바라보고 계시던 할머니, 백미러로 한없이 작아지던 할머니를. 그 할머니를 담으며 어김없이 촉촉해지던 아빠의 눈. 그 나날의 슬픔을 먹고 자라난 우리.


6.

세 살까지 심이를 도맡아 키운 엄마는 지금도 그때 사진을 들여다보며 자주 웃는다. "태어나서 언제가 제일 행복했어?"라는 어려운 질문이 엄마에게는 어렵지 않다. 작은 아이를 챙기느라 매일 파스를 붙이고 '행복한 비명'을 질렀던 그 시절은 '행복'보다 더 귀한 단어가 어울린다.


심이가 쑥쑥 커갈수록 할아버지는 작아진다. 지나치게 좁아진 어깨를 들썩이며 아빠는 심이를 보며 크게 웃는다. '서서히 꺼져가는 내 몸 위에서라도 바르게 서거라'라고 손주의 사랑을 읊조리던 마종기 시인의 시구절을 실감한다. 아이는 조부모만이 줄 수 있는 샘솟는 사랑을 먹고 당신의 꺼져가는 몸 위에 서 있다. 흔들림 없이.


조부의 조건 없는 추앙이 아이의 마음에 씨앗을 뿌린다. 씨앗은 제멋대로 자라 튼튼한 나무가 되고, 시원한 그늘을 만들 것이다. 스스로가 버거워 어딘가로 사라지고 싶을 때, 사는 일이 어쩐지 슬프게만 느껴질 때 그늘은 말할 것이다.


-오늘은 여기에 앉아 좀 쉬렴.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그늘에 철퍼덕 누운 심이가 조부모의 지치지 않던 사랑을 기억하겠지. 그러다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허기에 배를 만지게 될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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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서도 생애 첫 무말랭이 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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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읽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 친구 같은 남편 춘, 친구 같은 딸 심이와 살고 있습니다.

나의 기록이 당신에게 작은 영감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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