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인생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기막힌 숙소를 찾아내는 나의 능력엔 기막힐 정도로 투입하는 나의 노동력이 있다. 숙소를 찾아 인터넷 세상을 밤낮으로 헤매는 나를 보면, 남편이 늘 하는 이야기가 있다.
"꼭 다른 인생 하나를 준비하는 사람 같아."
나는 겨우 2박 3일 머무를 숙소를 찾고 있는 건데 말이다.
김민철, <무정형의 삶>
1.
지난해 3주간의 이베리아반도 여행에서 우리가 묵은 호텔은 12개. 9개의 도시를 돌아다녔으니 당연한 결과겠지만 한 도시에서도 우리는 호텔을 옮겨 다녔다. 원래 숙소를 고르는데 영혼을 갈아 넣는 편이지만 아이와 함께 가는 첫 유럽 여행이라 영혼의 할아버지까지 갈아 넣었다. 엄격한 유럽의 소방법 탓인지 10살 아이에 대한 규정도 모두 달라 A 호텔은 엑스트라 베드를 요청해야 했고, B 호텔은 성인 3명으로 간주했으며, C 호텔은 13살 이하면 침대에서 무료로 잘 수 있었다. 유럽 한가운데에서 국제 미아가 되는 기분을 피하려 모든 호텔에 개별 메일을 보냈다.
-열 살 아이와 같이 갈 건데 이 방에 엑스트라 베드 넣으면 될까요?
도시별로 꼼꼼하게 숙소 후기를 읽고 괜찮은 호텔 리스트를 만들어 호텔에 메일까지 쓰면 매번 새벽 5시였다. 이래서 사람들이 패키지여행을 가는 건가. 그때의 나는 정말 김민철 작가 남편이 한 말 그대로 '꼭 다른 인생을 준비하는 사람' 같았다.
2.
여행 준비를 하며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역시 비행기 티켓을 끊고 숙소를 예약하는 일이다. 마음에 드는 숙소를 찾으면 여행 준비가 반은 끝난 느낌으로 편안해진다. 그렇지 못하면 내내 불안하다. 호텔을 찾다 보면 평소 지병인 결정력 부재가 극심해진다. 도심에 있어 관광지와 가깝지만 좁은 호텔, 외곽이지만 넓고 시설이 좋은 호텔, 인스타그래머블한 호텔, 역사적인 의미가 있어 그 자체로 목적지가 되는 호텔 등 머물고 싶은 공간은 왜 그리 많은지. 기왕이면 효율적인 동선과 목표에 맞춰 다양한 숙소에 머물기를 꿈꾼다. 숙소 또한 그 도시의 일부이기에.
20여 일 간, 4개 도시를 스쳐간 대만 여행에서도 9개의 호텔에 묵었다. 호텔 순위를 매기기란 참으로 쉽지 않다. 압도적으로 좋았거나 나빴던 호텔이 없고 사람들이 다 친절했기 때문이다.(친절은 모든 단점을 상쇄하는 강력한 힘이다!) 가장 비싼 호텔은 단수이 골든튤립 패브호텔이었지만 내내 비가 왔기에 조금은 흐린 기억으로 남았다. 타이난의 레이크쇼어 호텔은 조식이 맛있었다. 우리나라 맛집과 비교해도 손색없을만한 꽃게탕이 일품이었다. (아침부터 꽃게탕이라니!) 타이중 이스트 호텔은 너그러운 가격에 파격적인 서비스로 우리 눈물샘을 자극했다. 새로운 호텔을 찾아다니는 호텔 컬렉터인 우리가 두 번이나 묵은 호텔은 타이베이 저스트슬립 시먼딩. 할 것도, 먹을 것도 많은 타이베이에서는 숙소에서 빈둥거릴 시간이 없어서 시먼딩 중심가라는 위치가 중요했다. 가장 잊을 수 없는 호텔은 타이베이 근교 온천마을인 베이터우의 골든핫스프링이다. 체크인 시간이 밤 11시였기 때문이다. 아직도 그 호텔 로비를 떠올리면 식은땀이 흐른다.
3.
여행의 아침, 혼자 낯선 동네를 걷는 것을 즐기는 내게 객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호텔을 둘러싸고 있는 동네의 분위기다. 밤의 소란스러움을 벗어던진 여행지의 아침은 늘 내게 고요한 휴식을 선물해 준다. 그러니 주변에 걸을 만한 골목이 많은 숙소를 꿈꾸는데 이 조건을 만족시키는 숙소 찾기란 녹록지 않다. 호텔 객실 내 어메니티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후기는 쉽게 찾을 수 있지만 주변 골목이나 동네 분위기를 자세히 서술한 글은 드물다. 구글 지도로 살펴본다고 해도 한계가 있다. 그러니 가고 싶은 목적지가 있는 근처에 숙소를 정하는 편이 대체로 안전하다.
베이터우의 목적지는 타이베이 시립도서관 분점이었기에 바로 옆에 있는 골든핫스프링 호텔에서 묵었다. 진부한 표현으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기에 아침부터 근처를 배회하다 도서관에 일등으로 입장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낯선 도시, 아무도 없는 도서관 창가 자리에서 햇볕을 쬐며 책을 읽는 기쁨이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 밤 11시 체크인 실수를 자책하던 마음이 그 볕에 사르르 녹아버렸다. 아트 뮤지엄과 사법 박물관을 끼고 있던 타이난의 레이크쇼어 호텔 주변은 한적한 아름다움이 있어 결혼사진을 촬영하는 커플도 많다. 짧게라도 웨딩 촬영하는 커플 주위를 맴도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들의 강력하고도 행복한 아우라가 전염되기 때문이다. 레이크 쇼어 호텔 주차장 바로 옆 <SHAKE 99>의 달달한 밀크셰이크는 산책의 마무리로 완벽하다. 리우허 야시장에서 5분 컷이었던 가오슝 인스 호텔의 위치는 또 어떤가. 브리오 호텔 예약을 마친 상태였지만 야시장을 걸어갈 수 있다는 점에 혹해서 마지막에 숙소를 변경했다.
그러고 보면 숙소야말로 굉장히 복합적인 요소가 작용한다. 그날의 날씨와 체크인을 도와주는 직원의 친절과 미소, 여행자의 컨디션과 주변 분위기 등 다양한 요소가 복합적으로 뒤엉켜 하나의 기억으로 남는다.
4.
고통은 수시로 사람들이 사는 장소와 연관되고, 그래서 그들은 여행의 필요성을 느끼는데, 그것은 행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다.
데이비드 실즈,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도망쳐 누구의 흔적도 남지 않은 호텔 방으로 우리는 간다. 새 공간이 절대 될 수 없는 (심지어 몇 시간 전에 정체 모를 누군가가 누워 있었던 공간) 호텔 객실에서 새로 태어나는 기분을 느낀다. 돈만 지불하면 누구라도 상관없고, 누구라도 환영받는 그곳에서는 마치 인생도 리셋될 것만 같다. 한 번도 사용해 보지 않은 향의 바디용품을 사용하며 상쾌해지고 누군가 사용했을 것이 분명한 이불을 덮으며 새것이라고 착각한다. 내일이면 다른 누군가의 '집'이 될 이곳을 안락한 나만의 공간이라고 오해하며 하루를 보낸다. 우리는 호텔이 주는 이 명백한 오해를 매번 온몸을 다해 사랑하고 있다.
5.
마카오 6박 7일 여행에서 3개의 호텔에서 잤다. 우리의 여행기를 듣는 지인들은 모두 "너무 귀찮지 않아?"라고 묻는다. 체크인, 체크아웃을 반복하는 과정은 물론 귀찮기도 하지만 색다른 재미도 있다. 새로운 숙소가 주는 영감도 있지만 '하루라도 묵어본 동네'의 경험치는 확연히 달라지니까. 어떤 공간의 아주 늦은 밤과 이른 새벽을 만날 수 있는 것은 드문 행운이다.
호텔 컬렉터가 되려면 몇 가지 노력이 필요한데 무엇보다 짐을 줄여야 한다. 짐이 많으면 의욕이 매우 저하되기 때문이다. 예측하기 힘든 이국 날씨에 대비해 머플러, 가디건 등을 두루두루 챙기고 여행 기념품이랍시고 물건들을 사 모으기도 하니 여행지에서 짐을 줄이는 것은 쉽지가 않다.
여행에 일가견이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런 꿀팁을 알려 준다.
여행에서 매일같이 낡은 옷을 버리고 갈 때의 기분이란 상당히 상쾌하다. 셔츠 한 장, 양말 한 켤레, 대단한 무게도 아니지만 나라는 인간이 그때마다 가벼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루키는 버리기 직전의 티셔츠와 속옷, 양말 등을 여행지에서 입고 바로 버릴 뿐 아니라 짐을 줄이기 위해 간단한 빨래는 호텔에서 한다. 물기에 젖은 빨래를 수건으로 한 번 밟은 뒤 말리면 빨리 마른다는 노하우도 알려 준다. 나도 낡아서 버릴까 말까 고민했던 양말, 오래된 속옷, 거의 다 써가는 식염수와 로션을 챙겼다. 웬만해서는 찰 일 없는 호텔 휴지통을 가득 채우니 하루키가 알려준 '인간 자체가 가벼워지는 느낌'을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양말과 함께 버려야 하는 것은 책에 대한 욕심이다. 이국의 햇살 아래서 읽고 싶은 책도 많고, 이국의 서점에서 사고 싶은 책도 많고 많지만 자신이 정해 놓은 권수에서 절대 흔들리지 말 것. 여행 당 최대 3권으로 정해둔 뒤로 나는 웬만한 건 이북으로 본다. 남미를 여행할 때는 네루다 시집을 반으로 나눠서 가져갔다. 지금도 우리 집 책꽂이에는 너덜너덜해진 네루다 시집이 꽂혀 있고 나는 오늘도 새로운 호텔을 검색한다.
매일 걷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