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둘러싼 반경 10미터의 세상
1.
가끔 광화문 한 복판에서 이런 설문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여행에 더 어울리는 단어는?
휴식 VS 관광.
어느 쪽이 더 높은 스티커를 받게 될까? 제일 이상적인 것은 역시 두 개가 적절히 조화된 것일 텐데 인생에 밸런스처럼 어려운 것이 없다. 오죽하면 '워라밸'이라는 단어가 생겼을까.
2.
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 쓰는 '멀티태스커'인 내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시간을 그저 흘러 보내는 건 '낭비'라고 생각했다. 집안일을 하면서 좋아하는 예능을 보고, 이동시간에는 항상 무언가를 읽는다. 이런 마음가짐은 여행에서도 이어져 예전의 나는 그다지 능숙하지 않은 여행자였다. 하고 싶은 것은 너무 많고 시간은 없어서 늘 초조했던 여행자. 그래서 늘 휴식보다는 관광에 중심을 뒀다. 그 패턴에는 '죽기 전에 다시 이 도시에 못 올지도 모른다'는 명제가 짙게 깔려 있었고, 대부분의 도시에서 그건 진실일지도 몰랐다. 그런 여행 또한 남겨준 것들은 많았다.
아이를 데리고 처음 떠난 유럽 여행. 아이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것이 많아서 어찌나 분주했던지. 가우디의 웅장한 사그리다 파밀리아를 앞에 두고 소매치기 걱정만 하는 아이 모습을 보고 어찌나 황당하던지. 나는 아이에게 무언가를 더 알려줘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아이는 조금 더 여유로운 여행을 하고 싶다는 갈망으로 힘들었다. 완벽한 동상이몽의 시간을 보내며 깨닫게 됐다. 엄마에게 제일 중요한 여행법은 내가 멋지다고 느끼는 것을 아이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 세계 유산인 코르도바 메스키타는 보는 둥 마는 둥 하던 아이가 길거리 벽의 낙서에 열광하는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몇 백 년 된 성당 투어가 아닌 공원에서 추는 춤이 더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아이는 돌담의 빈틈을 통해 바라보는 도시를, 신기하게 생긴 타일 하나를 오래 바라보는 것을, 알함브라 궁전보다는 그 안에 살고 있는 개미들을 좋아했다. 나의 책임은 아이에게 역사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꼭 맞는 행복을 찾아가는 아이를 가만히 바라봐 주는 것이었다.
처음 대만에 갔을 때 우리는 바삐 움직였다. 근교 투어도, 박물관 관람도 나쁘지 않았다. 두 번째 대만에서는 한가롭고 편안했다. 고궁박물관도, 예스폭진지 버스 투어도, 101타워 전망대도, 근교 단수이와 베이터우도 한 번으로 족하니 온전히 우리만의 방식으로 즐기면 되는 공간만 남았다. 들러봐야 할 것 같은 유명 관광지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도시가 주는 해방감은 기대 이상으로 강렬했다.
두 번째 여행 타이베이의 오후. 그날 목적지는 야시장 하나였고 우리는 어둠이 내리기를 기다리며 북적북적한 융캉제가 아닌 조용한 칭티엔 골목을 걷고 있었다. 바쁜 관광객이라면 올 리 없는 골목을 걷다가 작은 시장에 들어가 인자한 할아버지들을 만났고, 걷다가 작디작은 카페의 원두향에 이끌렸고, 또 걷다가 웅장한 나무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러다 발견한 라이카 카메라의 빨간 간판. 여기에 왜 이 아름다운 간판이 걸려 있는 거지? 심장이 주책없이 뛰기 시작했다. 맙소사, 그곳은 라이카 타이베이 쇼룸이었다. 한적한 주택가와 라이카 쇼룸의 조합은 예상하지 못했다. 한 때 정말 사랑했던 라이카 카메라였기에 우리는 그곳으로 돌진했다. 공간을 둘러싼 나무와 카메라와 사진이 완벽하게 조화로워서 떠나기 싫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3.
내 여행의 모양은 조금 달라졌다. 때론 휴대폰 알람도 모두 꺼버리고 여행지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마음 편하게 쓴다. 무엇을 사라는 광고, 새로운 서비스가 출시됐다는 뉴스, 아파트 앱에 업로드된 공지사항 알람, 내일까지 모든 제품이 32% 할인이라는 자본주의적 메시지들에서 해방되는 시간. 몇 분 간격으로 끝없이 찾아오는 핸드폰 알람이 없는 세상에서 맞는 햇살은 특히 싱그럽고 그저 나는 그곳에 존재하고 있다. 편안한 마음으로 이미 갔던 동네에서 먹었던 걸 또 먹는다.
자주 곱씹어 보는 휴식에 대한 아름다운 정의는 아래와 같다.
휴식이란 내가 사는 세계가 어떤 곳인지 경험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바쁜 와중에 잠시 시간을 내서 쉴 때마다 나는 깨닫는다. 나를 둘러싼 반경 10미터 정도, 이게 바로 내가 사는 세계의 전부구나. 어쩌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몇 명, 혹은 좋아하는 물건들 몇 개. 물론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지만, 잠깐 시간을 내어서 가만히 앉아 있으면 세상이 그렇게 넓을 이유도, 또 할 일이 그렇게 많은 까닭도 없다는 걸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정말 나는 잘 쉰 셈이다.
김연수, <지지 않는다는 말>
나를 둘러싼 반경 10미터의 세상. 지금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세상의 전부가 되고,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전부가 될 수 있는 도시의 오후. 그 외의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는 시간 속에 있다면 정말 '잘 쉰 셈이다'.
쓸모와 무쓸모의 경계를 넘어 걱정과 불안의 심연을 지나 도착하는 곳에 진짜 내가 있다.
여행은 어쩌면 떠나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는 것이다. 이국의 어딘가에 두고 온 자유로운 나에게로.
매일 걷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