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와 도시락, 맥주와 함께라면
기차 여행에는 다른 탈것에는 없는 특별한 서정성이 있다. 비행기나 선박, 지하철에서는 구름과 바다 혹은 시멘트 벽만을 봐야 한다면 기차 안에서는 쉴 새 없이 변해가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이동한다. 거기에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풍경들이 차례차례 담긴다. 시골 마을과 논밭, 아파트 단지와 주택가, 울창한 산과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의 바다. 샛길이 아니라 반드시 약속 대로 거쳐야 하는 길처럼, 기차는 철도 위를 빠짐없이 꾹꾹 밟으며 달린다. 그 타협 없는 반듯한 전진 덕분에 나는 원래 살던 장소에서 가장 멀리 가고 있다는 아득한 기분에 젖는다.
임경선, <교토에 다녀왔습니다.>
1.
기차 여행에 대한 로망이 있다. 도시락과 맥주와 함께라면 더더욱. 대만은 기차 여행을 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나라다. 고속철도를 타면 북쪽의 타이베이에서 남쪽의 가오슝까지 90분 밖에 걸리지 않는다. 우리는 타이베이에서 타이중, 타이난을 거쳐 가오슝으로 가는 일정을 짰다. 역과 호텔의 위치를 고려해 타이베이에서 타이중까지는 고속철도를, 그다음에는 일반 기차를 탔다. 고속철도에 비해 일반 기차는 느리지만 느긋하게 도시락을 먹을 수 있으니 오히려 좋아! 역에서 돼지고기와 고등어 도시락을 샀다. 물론 맥주도 함께.
낯선 도시의 기차 안에서 도시락을 먹는 것은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을 기다리는 것만큼이나 설레는 일이다. 기차는 한치의 거짓도 없이 앞으로 전진하고 있으니 더할 나위 없다.
2.
마치 설거지라도 한 듯 도시락을 클리어한 우리는 기차의 차창 너머로 흩날리는 풍경을 한참 바라봤다. 같은 영상을 반복 재생해 둔 것처럼 비슷한 집과 논과 산이 지나간다. 문득 '내 아이'와 '같은 장면'을 '아무 말 없이 오래 바라보는' 세 가지 조합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깨닫는다. 보통 발 밑에 아주 가까이 와 있는 행복을 모르고 달려가지. 하지만 이때만큼은 순간의 행복을 꽉 잡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기차 여행은 그 귀한 경험을 툭툭 던져준다. 쉴 새 없이 사라지고 다시 도착하는 차창 너머의 풍경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이고 있는 것만 같다.
누구나 홀로이지만, 결코 혼자는 아니란다. 깊은 숲 속에서도 사막에서도 심지어 우주에서도, 아무리 혼자가 되려고 애써도 누군가는 반드시 너라는 사람을, 너라는 환상을 어디선가 떠올리고 있거든. 단 한순간, 단 한 사람일지라도, 그게 누구든지 말이야.
최유수, <환상들>
'누구나 홀로이지만 결코 혼자는 아닌' 삶. 그런 사랑.
사랑은 불행해도 괜찮다고 다독여주는 속삭임, 옳고 그름과 무관하게 기꺼이 져주는 마음, 언제 어디서든 네 모습 그대로 존재하라고 감싸 안아주는 관용에 있다. 차창 너머의 풍경은 아이에게 주고 싶은 사랑을 닮았다. 나는 언제고 이 광경을 떠올릴 것이라는 것을 미리 눈치채고 그리움마저 당겨 쓰는 기분이 된다.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는 아이 뒷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머리카락을 살짝 쓸어내렸다.
3.
한때 고속도로나 기차 안에서의 시간을 싫어했다. 관광지에서 관광지,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하는 시간은 무의미하다고 여기며, 길이 막히거나 이동 계획에 차질이 생기면 짜증도 났다. 내게 여행은 목적지에 당도한 후 시작되는 것이었다.
여행의 의미가 드라마틱하게 변한 순간은 여정의 기쁨을 깨닫게 되면서다. 문을 나서는 순간 여행은 시작된다. 낑낑 대며 짐을 차에 싣고 차 안에서 목청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고, 고속도로 휴게소의 먹거리를 신중히 고르는 시간이 여행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본 영화가 여행의 분위기를 좌우하고 고속버스 안에서 전에 없던 심오한 이야기를 나눈다.
모든 과정, 모든 실패까지도 모두 여행이라는 것을 안 순간, 무거운 짐과 함께 하는 여정들, 예상치 못하게 문이 닫혀 있는 공간들, 기대 이상의 더위와 폭우를 선사해 주는 날씨들... 여행의 모든 요소들(실수와 마찰들까지)은 새로운 이야기가 됐다.
타이난 안평지구의 다양한 관광지도 좋았지만 더 기억에 남는 건 안평까지 가는 버스 안이다. 외국인과 현지인이 반반 섞여 있는 버스 안은 햇살이 눈부셨고 자리가 없었기에 우리는 서서 버스의 덜컹거림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우리는 가는 길에 이미 지쳤다... 기 보다는 대만 버스가 주는 색다른 덜컹거림을 즐기며 이번 여행에서 만든 '박용택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때 아이는 세상 신나는 표정으로 정답을 맞히지 못해 쩔쩔매는 우리를 바라봤다.
여행의 의미는 무언가를 보는 데 있지 않다.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것에 있다. 여행은 단순한 결과가 아닌 모든 여정의 총합. 삶이 그렇듯.
우리 여행은 진작부터 시작되었다.
매일 걷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