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으로 기억하는 도시
서울에는 대개 낮에 도착한다. 나는 우선 번화가에 있는 삼계탕 전문점에 간다. 패스트푸드 가게처럼 실내가 밝다. 이렇다 할 분위기가 없어 오히려 분위기가 느껴지고, 아아 서울에 왔네 하고 생각한다. 아주머니들이 일하고 있다. 그리고 이 가게의 삼계탕은 정말 온 세포에 쏙쏙 스미는 맛이다.
(중략)
뉴욕에도 서울에도 후쿠오카에도 좋아하는 가게가 여러 군데 있다. 하지만 여행지에서 가장 먼저 걸음하는 가게가 정해져 있다는 것은 안심되는 일이다. 그곳에 가면, 어라 또 여기 있네, 하고 느낀다. 가령 1년 만에 갔어도, 1년이라는 공백이 사라지면서 지난번 여행과 이번 여행이 이어진다. 돌아왔다기보다, 또 다른 내가 줄곧 여기 있다가 지금 다시 만나 원래대로 돌아간 듯한 아주 자유로운 느낌이다.
에쿠니 가오리, <여행드롭>
1.
베이징에 간다면 나는 왕징 소호의 '아이칭 마라탕'으로 달려갈 것이다. 베이징 시절 매주 한 번은 먹었던 마라탕 가게다. 욕심을 한껏 부려 바구니에 한가득 재료를 담고(나는 무우, 심이는 다시마와 요우티아오가 최애 재료다) 야외석에 앉아 밀크티를 마시며 마라탕이 완성되길 기다릴 것이다. 매운 고추와 중국 식초를 넣은 간장 소스에는 고수도 듬뿍 올린다. 시간이 맞아 소호 광장에서 우리가 좋아하던 음악 분수가 나온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심이와 나는 자주 이 풍경을 상상한다. 마라탕은 세상에 많고 많지만 우리 영혼에 쏙쏙 스민 마라탕은 그곳이 유일하다. 낯선 타국에서 힘들 때 즐거울 때 외로울 때 우리를 위로해 준 그 맛을 다시 만나면 타국과는 어울리지 않는 '귀향'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두 번째 타이베이에서 호텔에 짐을 맡기자마자 우리는 몇 개월 동안 그리워했던 시먼딩의 '아종면선'으로 달려갔다. 오전에도 줄은 길었고, 숟가락으로 퍼먹는 곱창 국수의 맛은 그대로였다. 제대로 된 좌석이 없는 가게라 대부분 서서 먹거나 쪼그리고 앉아서 먹는데 그렇게 엉거주춤 먹어야 해서 더 맛있게 느껴진다. 어려움을 뚫고 먹는 맛이라고나 할까. 처음에는 본연의 맛을 즐기다 반쯤 남았을 때 칠리, 마늘, 간장 소스를 조금씩 섞어서 먹는다.
아종면선을 다 먹은 나는 대만식 튀김인 옌쑤이를 사러 '스위엔'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간 맥주를 마실 때마다 이 튀김을 떠올렸다. 매콤한 마늘 소스에 한껏 버무려진 스위엔 튀김을 먹으며 '어떤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달려가고 싶은 가게가 있다는 것. 생각보다 훨씬 좋은 일이잖아'라고 생각한다.
2.
도시를 대표하는 가게나 브랜드가 있다는 것 또한 생각보다 훨씬 좋은 일이다. 타이난에는 도소월, 타이중에는 춘수당이 있다.
Since 1892에 빛나는 타이난 대표 브랜드 도소월(두샤오위에). 이곳은 '단자면'을 파는데 중국어로 단자는 '어깨에 걸치는 지게'를 의미한다. 폭풍이 자주 몰아쳐 바다로 조업을 나갈 수 없는 날이 많았던 타이난 어부들은 마냥 파도가 잠잠해지기만을 기다릴 수 없어 나무통 지게에 삶은 국수를 담아 팔았다. 콩나물, 새우, 다진 고기 등을 넣어서 만든 단자면은 짜장면과 유사한데 덜 달고 슴슴하지만 깊은 맛이다.
바닷가 사람들은 큰 파도가 온 달을 '수확량이 적다'라는 뜻에 '작은 달(샤오위에)'라고 한다. 샤오이에 앞에 '어떤 시기를 보내다'라는 뜻이 있는 '두'자를 붙였으니 수확량이 적은 달이 어서 지나가기를 바라는 소망이 담겨 있는 이름이다. 슬픔이 담긴 소망인데 가게 이름을 이렇게 지어두니 꽤 낭만적이다. 도소월은 매장 한가운데 지게면을 직접 만드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 오픈 키친 형태를 갖췄다. 두부, 굴, 새우튀김 등 모든 튀김메뉴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맛이다.
춘수당은 우리가 아는 버블 밀크티의 원조다. 늘 그렇듯이 '원조'라는 타이틀은 녹록지 않아 타이중의 춘수당과 타이난의 '한린다관'은 버블티 원조를 두고 법정 다툼까지 했다. 10년 소송 끝에 법원은 버블티가 누구도 특허권을 주장할 수 없는 새로운 음료라고 판결했다. 어쨌거나 타이중에는 춘수당 본점이 있고 그곳의 바닥에는 '밀크티의 시작'이라는 의미의 글귀가 적혀 있다. 그러니 한 번 가봐야 하지 않겠는가?
두보의 시구에서 가져온 '춘수'라는 의미(봄의 물)에 걸맞게 춘수당의 밀크티는 부드럽기 그지없다. 하지만 우리 입맛에는 타이중에서 발견한 MZ 맛집 '츠차산치엔'의 밀크티가 더 맛있었다. 춘수당은 밀크티도 유명하지만 음식들도 하나같이 맛깔스럽다. 매운 소스를 곁들여 먹는 공푸면을 추천한다.
3.
대만 국민 음식 우육면 맛집도 모든 도시에 퍼져있다. 예전 미국 군인들이 살던 동네에 넘쳐나던 미국산 소고기 통조림을 끓어먹었던 게 우육면의 시작으로 그전에 대만 사람들은 소고기를 전혀 먹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인들이 미군부대에서 나온 소시지와 햄으로 부대찌개를 만들어 먹은 것과 비슷한 역사라 흥미롭다.
국민 음식답게 모든 도시에 유명한 우육면 맛집이 있다. 타이베이만 해도 융캉제에 있는 융캉우육면, 빕 그루망을 받은 유산동과 부드러운 고기의 임동팡 우육면, 라오장, 라오지아 등등 동네마다 유명한 집이 즐비하다. 그뿐인가. 타이난에는 라오팡, 타이중 상홍원, 가오슝에는 항원, 공항 푸드코트의 우육면 마저 띠용하게 맛있는 대만이니 맛있는 우육면 리스트는 끝이 없다.
4.
여행에서 '맛'이 차지하는 비율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대식가이자 미식가를 자처하는 우리 가족에게는 절반 이상의 지분을 차지한다. 맛있는 음식이 앞에 있다면 여행의 피로도 잊고 행복해 질 가능성이 높다. 특히 매일 배고프다는 말을 달고 사는 심이에게 여행을 간다는 것은 '다른 나라의 맛있는 것을 먹는다'는 것과 동일한 정의다. '맛집의 피자와 파스타보다는 차라리 밥에 김'을 선택하는 의지의 한국인이라 이베리아반도에서 한식당 가는 날만 손꼽았던 심이는 대만에서 매 끼니 행복했다. 매일 먹고 싶다던 타이베이 아종면선의 곱창 국수, 화려한 면치기를 보여주던 타이중의 공푸면, 한국식 짜장면보다 더 맛있다는 타이난의 단자면, 고춧가루가 빠진 김치찌개 같다며 열광한 가오슝의 신배추탕 훠궈까지... 누구라도 그녀의 먹방을 본다면 잃었던 입맛을 되찾을 정도로 맛있게 먹었다.
아이는 맛으로 그 도시를 기억하고, 그리워한다.
매일 걷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