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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Nov 27. 2024

시장에서 만난 대만의 아침

걸으며 동네를 배우기

도시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도시는 걸어야 해요.

모든 여행의 기초가 그래야겠지만 걷지 않으면 그 도시를 오래 기억할 수 없어요. 

이병률, <안으로 멀리 뛰기>


1. 

아이가 새벽만 되면 먼저 일어나 우리를 깨우던 대여섯 살 때의 일이다. 극한 직업인 ‘어린아이와 함께 여행하는 아빠’(그때까지 아이는 아빠가 태워주는 목말을 참으로 좋아했다)의 아침잠을 조금이라도 더 보장하기 위해 심이에게 둘만의 아침 산책을 제안했다. 별 건 없었다. 7시 이전, 아빠 몰래 호텔 밖으로 나가 근처를 걷는 것. 비밀 프로젝트라는 것만으로 충분히 신난 아이와 살금살금 까치발을 한 채 도시의 아침을 두드렸다. 

 

사람도 별로 없고 상점 셔터도 거의 내려간, 북적이던 밤과는 완전히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이른 시간의 도시 구석구석을 구경하는 것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그때 심이는 챙겨 온 노트에 지나치는 상점 간판을 일일이 적었다. 걸어가면서도 적고, 벽에 기대서도 적고, 쪼그리고 앉아서도 적었다. 너무 열심히 적어서 나중에는 지나가는 분들이 '저 꼬맹이는 대체 무얼 하나'하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볼 정도였다. 덕분에 우리는 명품 및 현지 브랜드 능통자가 됐고 아침 꿀잠으로 체력을 보충한 아빠는 더 즐거운 여행자가 될 수 있었다. 


그 후 몇 년간 진행된 우리만의 밀월 아침 산책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아빠의 잠을 위해 시작된 프로젝트였지만 금세 주객전도가 되었다고나 할까. 그 시절을 꺼내보면 수많은 익사이팅한 장면들을 뒤로하고 잠이 덜 깬 채로 쪼그리고 앉아 진지한 폼으로 <FENDI>나 <DIOR> 따위를 써 내려가던 아이의 모습이 제일 먼저 떠오르니 말이다. 


아이가 크면서 둘만의 밀월 산책은 시들해졌지만 이미 새벽과 아침의 맛을 느낀 나는 그 시간을 포기할 수 없었다. 평소에는 아침잠이 많아서 해가 훌쩍 뜨고 일어나기 일쑤지만 여행지에서는 내가 잠든 사이 아침이 도착해 있으면 괜히 억울해져 나 혼자만의 아침 산책을 시작했다. 내게는 제일 어려운 미라클 모닝을 가능하는 여행. 


안달루시아의 현관이라 불리는 스페인 코르도바에서는 오디오가이드로 도시의 역사를 들으며 무작정 걸었다.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에 등장한 포트로 광장을 서성이다 이슬람 사원 '메스키타' 안에 들어설 때의 압도적 감동이란. 중국 천진에서는 자전거를 타고 도시를 크게 한 바퀴 돌았다. 인적이 드문 새벽녘에 자전거를 타고 도시를 달리면 진짜 나만의 비밀 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김민철 작가가 '한 도시의 새벽에 녹아든다는 건 도시의 일상에 저항 없이 편입하는 것'이라고 했던가. 낯선 도시의 새벽과 아침 사이 시간은 언제나 속살을 낱낱이 보여줬고 나는 그 도시와 쉽게 마음을 터 놓는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참으로 열심히 적던 그 시절의 너
극한 직업 '여행지에서의 아빠'
코르도바가 보여준 어느 아침

2.

그러니 대만 여행의 백미는 야시장에 있지만 아침 시간도 결코 놓칠 수 없다. 특히 관광객이 적고 현지인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아침 시장이라면 그 시간을 만끽하기 최적이다. 야시장이 주는 활기와는 다른 투명한 생기가 있는 공간. 


우선 백종원쌤의 '스트리트푸드파이터' 애청자로서 가장 기대한 다다오청 거리가 있다. 백쌤이 햇살 맞으며 고기죽과 튀긴 홍샤러우, 족발 국수를 드신 곳이자 좋아하는 유튜버 히밥이 돼지선지탕을 먹다가 포장을 주문한 시장이다. 


다다오청 시장의 너른 뒷마당에는 디화제 거리 어디선가 빌린 듯한 민국시대풍 옷을 입고 있던 외국인들과 아주 이른 시간부터 맥주를 마시고 있는 시끌벅적한 중년의 현지인 무리, 머리를 박고 혼밥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힐끔힐끔 모든 테이블에 올라온 음식을 스캔하는 우리 같은 관광객도 있을 텐데 쉽게 찾아지지는 않았다. 꽤 붐볐던 터라 우리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나눠서 줄을 서기로 했다. 나는 갈비탕 줄에 합류하고, 춘은 족발국수 집으로 떠났다. 


15분 뒤, 4개의 다른 식당에서 산 족발국수와 갈비탕, 돼지선지탕, 루러우판, 치킨롤이 옹기종기 모였다. 테이블에는 맛있는 대만스타일의 세 가지 소스가 나란히 놓여 있어 소스파인 나는 소스를 마구 뿌리는 사치를 누렸다. 소스 앞에서 통하는 우리만의 농담, "소스 쳐 먹어". 족발 국수에 마음을 빼앗긴 심이는 후딱 한 그릇을 비우고 또 시켜달라고 했다. 나는 쫄깃함이 일품인 돼지선지탕에, 춘은 깊은 육수의 갈비탕에 집중했다. 역시 오늘도 우리의 원픽 메뉴는 갈렸다. 


3.

다음 날은 혼자 장개석을 기념하는 중정기념당에서 제일 이른 근위대식을 보고 근처 동먼시장으로 갔다. 간이식당과 채소가게, 정육점 등이 섞여 있는 동먼 시장을 돌아다니다 보니 셀럽들 사인이 한가득 붙은 '황마마미판탕'이 눈에 띄었다. 그래, 오늘 운명은 이곳이야! 다들 학교 교실처럼 나란히 앉아 미니 사이즈의 쌀국수 하나와 고기 수육 같은 메뉴를 먹고 있었는데 고기 부위가 조금씩 달랐다. 누군가는 곱창, 누군가는 대창, 누군가는 머리 고기, 누군가는 종합 버전으로 먹고 있었다. 아침 10시, 빈 속에 내장 부위를 집어넣기는 위에게 미안해서 부드러운 살코기 부위로 먹고 있는 테이블을 가리키며 "워예야오쩌이거"라고 외쳤다. 중화권 여행 중 옆 테이블 음식이 맛있어 보인다면 기억하자. "워예야오쩌이거(저도 저걸로 주세요)" 


고기에 생강채를 올려 매콤한 소스와 새우젓을 번갈아 찍어 먹었다. 돼지고기가 잡내 없이 부드러웠다. 로컬의 진한 향기를 느끼며 즐긴 3,600원 아침의 행복이었다. 


중산 근처의 솽롄 아침 시장에서는 오묘한 냄새를 맡았다. 쿰쿰한데 달달한 전에 없던 냄새. 주변을 돌아봤더니 취두부 가게 바로 옆에 꽃가게가 있었다. 맙소사, 이런 기막힌 조합이라니. 왼쪽 코로는 달콤한 꽃향기를, 오른쪽 코로는 취두부의 강력한 (하수구스러운) 냄새를 맡으며 경쾌하게 걸었다. 


존재조차 몰랐던 송산 지역의 우창시장에서는 마음에 드는 옷가게를 발견했다. 깔깔 수다를 떨며 옷을 고르는 대만의 아주머니들 틈에 껴 전투적으로 옷을 골라봤다. 마음에 드는 게 많아서 고민하자 적극적으로 옷을 골라주시던 어머니. 어느 나라나 어머니들의 인싸력에 한계란 없다!


별다른 목적지가 없는 아침 산책은 우연의 선물이 더 자주 찾아온다. 그런 이유일 것이다. 쌩얼과도 같은 아침 시간들이 더 반짝이는 이유는. 


타이베이 아침 시장 투어 클릭 

타이베이 다다오청 시장 



매일 걷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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