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하는 것은 더 잘하고 못하는 것은 더 못하고
음식 주문에서 실패를 줄이고 싶다면 모든 본류의 가장 위에서부터 고르면 되고, 재료로는 닭을 선택하는 것이 안전하다. 겉에 뭐가 발라져 있든, 무엇에 재웠든, 속에는 우리가 아는 그 닭고기가 있다. 그러나 자기 여행을 소재로 뭔가를 쓰고 싶다면 밑에서부터 주문해 보는 게 좋을 것이다. 때론 동행 중에서 따라 시키는 사람이 생기고, 그 인상적인 실패 경험에 대해 두고두고 이야기하게 되 것이고 누군가는 그걸 글로 쓸 것이다.
김영하, <여행의 이유>
1.
사람들은 왜 이렇게 후기에 집착하는 것일까? 다시 오기 쉽지 않은 여행지에서 스멀스멀 찾아오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 나도 다양한 경로를 통해 수많은 즐겨찾기를 저장한다. 웬만큼 평점이 높은 곳에서 먹고 놀면 평균은 할 거라는 믿음이 있으니까. 하지만 여행의 끝에서 늘 깨닫는다. 여행의 묘미는 불확실성과 낯선 도전에 있다고. 외관이 멋져서 우연히 들어간 가게, 길을 잃었기에 만날 수 있었던 골목 등 선물 같은 순간은 불현듯 찾아온다.
그렇다고 모든 순간을 우연에 맡길 수는 없다. 여행지의 시간은 실로 유한하고 그곳에서 꼭 경험하고 먹어봐야 하는 것들을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여 내 여행은 P와 J의 중간 형태가 되었다.
우선 그곳에 관한 방대한 자료(책+예능+유튜브+후기 모두 섞어서)를 찾아 읽는다. 가고 싶은 스팟을 구글 즐겨찾기에 넣는다. 즐겨찾기는 공항, 기차역에서 시작해 여러 개의 숙소, 맛집, 서점, 카페, 관광지 순으로 찍힌다. (한 도시에 백 개가 넘는 별이 찍힐 때도 많다, 은하수 같은 지도여) 여행 일정은 느슨하게 짠다. 매일 굵직한 한두 개의 스케줄만 정해두고 세부적인 동선은 그날 기분에 따라 움직인다. 어딜 가든 준비되어 있는 무수한 즐겨찾기를 참고해 유명 스팟에 들리기도 하고 즐겨찾기를 아예 신경 쓰지 않기도 한다. 하루에 한 번 정도는 후기도, 이름도 본 적 없는 낯선 곳에 들어가 보는 것도 원칙으로 정했다.
너무 즉흥적이지도, 너무 계획적이지도 않아 만족도가 매우 높은 방법.
물론 즉흥이 섞인 이 방법은 가끔 실패한다. 사람이 없는 곳은 합당한 이유가 있을 때가 많고 리뷰 또한 내 취향과 엇나갈 때가 있으니. 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관광객의 기준이다. 여행자, 특히 기록하는 마음의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성공이다. 김영하 작가가 <여행의 이유>에 적었듯 타국의 식당에서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면 메뉴판 제일 위에서 고르면 되고, 여행기를 쓰고 싶다면 밑에서부터 주문해야 한다. 오리혀든 곰 발바닥이든 무언가 나와서 참혹하게 실패한다면 매우 인상적인 여행기가 될 것이므로. 여행의 끝에 남는 건 결국 그런 (여행의 바보 비용 같은) 강렬한 기억이니까.
타이베이 디화제를 걷다가 충동적으로 들어간 쿠오 서점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순간, 동먼 시장에서 현지인들과 합석해 국수에 돼지고기를 얹어 후루룩하는 순간, 자석에 이끌리듯 어느 LP바에 들어간 순간, 나는 진짜 내가 꿈꾸던 여행을 만난다. 역시 여행은 얼마의 계획과 약간의 우연과 조금의 도전이 버무려진 변주다.
2.
'가고 싶은 곳은 산더미인데 체계가 없는 여행을 즐기는' 내 지도앱의 무수한 별은 가끔 제 역할을 잃어버린다. 꼼꼼하게 확인하며 걷지 않으니 근처를 지나왔는데 가보고 싶던 스팟을 놓치는 일이 잦다. 여행의 마무리로 오늘의 동선을 되짚어 보며 이것저것 검색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오늘 내가 지나왔지만 놓친 별들'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아쉬움의 이불킥을 한다.
하루의 끝, 호텔 방에 누워서 나는 자주 다급하게 춘을 부른다.
"이 골목 지나갈 때 혹시 이런 간판 발견한 거 있었어? 나 왜 몰랐지? 엄청 유명한 베이커리라는데?"
"아까 그 거리 유명한 거리였는데? 중간에 몇 백년된 가게도 있었어! 오마이갓"
이런 내가 아주 익숙한 춘은 흔들림 없는 음성으로 '내일 또 가보자'라고 나를 달래고 나는 내일 그럴 시간이 없다고 생각한다. 내 지도에는 아직 가보지 못한 별이 너무나 많거덩요. 그저 몇 백장 찍은 사진들 사이에서 놓친 스팟의 흔적을 찾아보거나 두 눈을 감고 다시 그 거리를 떠올리며 아쉬움을 삭힌다.
어쨌거나 나의 여행은 별을 저장하고, 별을 찾고, 별을 잃어버리는 일의 반복이다.
3.
P인 나는 여행 일정을 '대강' 짜는 것과 포토스팟, 맛집 서치를 잘한다. (주로 노트에 끄적인다). 완벽 J형 춘은 각 스팟별 최적의 동선과 교통수단, 최저가를 찾는데 능하다(그는 엑셀 천재다). 나는 여행지와 관련된 책을 읽고 의상을 고르며 그곳과 어울리는 플레이리스트를 꾸린다. 춘은 호텔 체크인을 하고 각종 결제 할인 정보를 수집하고 내가 고른 식당을 예약한다.(그는 통상적으로 5개 이상의 카드를 쓰며 카드사에서 제공하는 각종 해외 할인을 놓치지 않는다. 대만 야시장에서도 라인페이로 할인받는 춘. 리스펙할 수밖에!) 내가 각종 콘텐츠를 통해 습득한 지식을 풀며 아는 척을 하면 그는 그 안에서 명백한 오류를 잡아낸다. 곧 떠날 숙소라는 생각으로 웬만한 짐은 캐리어에서 꺼내지 않는 나와는 달리 빨래 요정인 그는 타지에서도 빨래방에 들러 여분의 옷을 확보하고 객실의 옷걸이를 충분히 활용한다. 나는 우버 택시 안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감동적으로 듣고 감탄하는데 소질이 있고 그는 그 음악이 무엇인지 찾아내는데 능하다.
여행을 하다가 소름 끼치게 놀랄 때가 있는데 여행의 모습이 일상과 너무도 똑같아서다. 열대 우림과 북극처럼 다른 우리는 여행지에서도 참 다르다. 그저 각자 잘하는 것을 더 잘한다. 너무나 조화롭게도 원래 못하던 것은 더 못한다. 잘하는 서로를 위해 빈틈은 완벽하게 남겨둔다.
서로를 바꾸려고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고 잘하는 것에 몰두해 깊이를 더할 것. 내가 못하는 것을 잘하는 상대를 추앙할 것. 우리가 특별한 이유는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이 만났기 때문이고 너의 특별함은 내가, 나의 특별함은 네가 만든다는 것을 잊지 말 것. 칭찬과 감사에는 전혀 돈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굳건한 신념으로 삼을 것. 이것은 결혼이라는 제도를 꽤 오랜 시간 통과하며 내가 찾은 '잘 사는 비결'인데 여행지에서도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 이렇게 함께이면서 충분히 혼자고, 혼자이면서 충분히 함께인 우리가 된다.
우리가 평소 서로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제일 많이 하는 말, '저랑 함께 살아 주셔서 감사합니다'는 여행지에서도 어김없다.
함께 여행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굽신.
내일도 잘하는 것은 더 잘하고, 못하는 것은 더더더 못하도록 합시다.
아주 소탈한 나의 구글 지도
내겐 너무 완벽하고 경이로운 파워 J!
매일 걷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