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의 혼자 여행
여행은 뭐든 배우라고 종용하지 않고 그저 내 앞에 놓여 있을 뿐이다. 내 마음과 사뿐사뿐 대화할 자유 시간이다. 당일치기라도 좋다, 될 대로 되라고 떠난 야마가타 여행이었는데 일단 떠났더니 3박이나 했다.
혼자 여행, 기운 나네.
마스다 미리, <혼자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1.
첫 번째 대만 여행의 특별한 점은 셋이 시작한 여행을 혼자 마무리했다는 것이다. 더 길게 여행하고 싶은 어른과 학교를 4일 이상 빠지기 싫다는 초딩의 의견차가 있었고 춘은 내게 타이베이 2박 3일의 자유를 선물했다. 차선책이었지만 내게는 제일 좋은 옵션인 혼자 여행. 얼마 만의 혼.영인지.
춘과 심이를 공항으로 보내고 혼자 지낼 이틀을 위해 작은 숙소로 짐을 옮겼다. 이제 오롯이 혼자 결정하고, 혼자 감당해야 할 시간. 타이베이 여행에서 꼭 하고 싶었던 일을 드디어 실행할 때가 왔다. 상견니 OST를 크게 들으며 타이베이 한복판 걷기. '상친자(=상견니에 미친 자)'까지는 아니지만 드라마의 여운을 오래 느낀 사람으로 라스트댄스의 첫 부분을 흥얼거린다. 쏘이쟌스 쟝니옌징 비러치라이.
혼영의 첫 목적지는 며칠 전 잠시 스쳤던 디화제다.
2.
타이베이의 여러 스팟 중 특히 좋았던 곳은 디화제다. 디화제는 청나라 말기부터 이어져온 타이베이에서 가장 역사 깊은 전통 재래시장 거리로 한약방, 건어물, 대만차, 로컬 맛집, 신상 카페들이 모여있다. 전국에서 올라온 특산품을 다양하게 팔아서 '대만의 주방'이라고 불린다. 보존된 옛 건물에 힙함이 덧입혀져 신구의 조화가 매력적이다.
디화제의 건물은 대부분 폭은 좁고 앞뒤로 긴데, 세 번 진입해야 하는 '삼진'식 구조로 설계되어 있다. 이 카페 괜찮은데? 하고 들어가 보면 안쪽에 서점이 있고 또 들어가 보면 안쪽에 주거지가 있는 식이다. 신비로운 구조가 디화제의 독특한 매력을 배가시킨다.
옛 건물을 그대로 살린 디화제를 걸으며 나는 조금 부러워졌다. 찾아보니 대만에게도 개발의 유혹을 이기고 역사를 지켜낸 것이 수월한 일만은 아니었다. 1980년대 말 디화제 재개발을 위해 타이베이 시정부와 지역 인사들은 기존 건물들의 철거를 골자로 한 디화제 도로 확장 계획을 입안한다. 이는 예술, 문화, 건축학계의 반발을 일으키고 디화제의 전통과 역사를 지키기 위한 다양한 활동들이 벌어진다. 이들은 '영원한 디화제를 구하자'라는 기사를 연속 게재했으며 '나는 디화제를 사랑한다'라는 활동도 진행했다고 한다. 전국의 관심 속에 결국 재개발 계획은 유보된다.
이후 대만은 옛 것을 잘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라오우신성' 프로젝트. 2001년부터 타이베이 정부가 추진해온 도시 재생 프로젝트로 오래된 건물을 허물지 않고 리모델링해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창조한 곳 중 매년 투표를 통해 수상작을 선정한다. 디화제의 여러 스폿들이 수상작으로 선정된 바 있다.
구석구석 보물 같은 공간이 많은 디화제에서 내 마음을 훔쳐 간 곳은 쿠오 아스트랄 서점(Kuo's Astral Bookshop)이다. 셋이 함께 디화제에 왔을 때 이곳을 처음 발견하고 혼자가 되면 다시 오겠다고 다짐했다. 부유한 사업가의 후손이 사옥으로 사용하던 옛 건물을 그대로 살려 서점과 카페를 오픈했다. 1922년에 세워졌다는 이 3층 건물 역시 삼진식 구조다. 쿠오 서점 벽면에는 오래된 건물을 그대로 살려 새로운 공간을 창조하는 과정이 담겨있다. 옛 건축 자재들도 볼 수 있어 흥미진진하다.
3.
베이징부터 시작된 이국의 서점 투어는 언제나 만족스럽다. 이방인의 신분으로 모든 감각을 활용해 구경하는 서점은 색다르기 때문에. 대만 서점은 더욱 특별하다. 대만 서점에 대해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된 건 류얼시라는 한 중국 청년이 중국 광저우에 낸 24시간 서점, ‘1200북숍’ 덕분이었다. 베스트셀러는 팔지 않고 배낭여행객들에게는 숙소를 제공하는 특별한 1200북숍 탄생기를 따라가며 대만의 성품 서점을 처음 알게 됐다.
일류 대학을 나와 일류 회사에 입사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던 류얼시는 직장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불쑥 대만으로 떠나 51일간 1200킬로미터를 걸어 대만 일주를 완성했다. 그때 수많은 대만 사람들이 그에게 잠자리를 제공해 줬고, 이에 감동받았다. 그리고 그는 95년에 오픈해 24시간 운영하며 이제는 대만의 문화 성지가 된 타이베이 ‘청핀 서점 둔난점’에 매료되었다. 이 용감한 청년은 본인이 직접 '광저우의 등불'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2014년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자금을 모아 '1200북숍'을 오픈했다. 서점 이름은 그가 대만 도보 일주를 하던 당시 완주한 1200킬로미터를 기념해 따왔다. 류얼시가 직접 쓴 서점 이야기가 <서점의 온도>라는 책인데 상당히 흥미진진하다.
24시간 서점은 어둠이 깔린 뒤, 그 도시에 등불과 머물 곳을 제공하죠. 일종의 위로이자 보호이기도 하고요. 타이베이에 그런 정신적인 등대가 있다는 것이 저는 너무 부러웠어요. 광저우에도 그런 곳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죠.
<서점의 온도>
이 책에서 그가 묘사하는 대만 사람들의 친절과 성품 서점이라는 존재는 대만이라는 나라에 별 관심이 없던 내 마음조차 동하게 했다. '비즈니스가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지만, 문화 없이 살아남고 싶지 않다'라는 멋진 신념의 CEO가 만드는 대만의 성품 서점에 꼭 가보고 싶었다. 대만에 도착하자마자 성품 서점의 다양한 지점에 들렀다. 과연 서점이라는 표현보다는 문화 공간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는 곳이었다. 성품 서점이 여행 시작 전부터 내 목적지였다면 디화제의 쿠오 서점은 이전에는 존재조차 몰랐던, 우연이 준 선물이었다.
4.
혼자가 된 첫날, 나는 읽을 게 거의 없는 쿠오 서점에 오래 머물렀다. 낯선 언어의 책을 모두 읽고 싶다는 무모한 갈망에 시달리다 서점 안쪽의 분위기 좋은 카페에 들어가 대만 꿀 맥주를 시켰다. 타이베이의 '샤오츠(길거리 간식)'에 대해 정리해 둔 책을 읽으며 달달한 맥주를 홀짝거린다. 멀리 떨어진 곳에 중년의 부인이 혼자 책을 읽고 있다. 마치 정지 화면처럼 흔들림 없는 집중력이 인상적이었다. 무언가에, 특히 책에 한없이 집중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은 아름답기 마련인데 그녀에게는 그것을 넘어서는 기품의 아우라가 있었다. 넓은 카페에는 우리 둘만 있었기에 힐끔힐끔 흠모의 시선을 보냈다.
대만의 온갖 간식들을 책으로 접하다 보니 출출해져 쿠오 서점 바로 앞에 있는 스트릿 어묵탕집에서 어묵탕을 주문했다. CNN에 방영된 바 있는 맛집으로 멋진 비니를 쓴 중년 남성 사장님의 카리스마가 인상적인 곳이다. 거리 한 쪽에 마련된 작은 테이블에 앉아 뜨끈한 어묵탕으로 몸을 데우고 다시 한약 냄새가 진동하는 디화제를 걷는다.
그저 스쳐 지나갔다면 디화제는 인사동과 비슷한 이미지의 별 감흥 없는 골목이었을 것이다. 다시 돌아와 샅샅이 훑어본 디화제는 천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이날 디화제에서 찾은 아름다움은 다른 이에게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하고 다채로운 무언가였다.
언제고 다시 걷고 싶을 거리에 오롯이 내가 있었다.
타이베이 성품서점
매일 걷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