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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Nov 20. 2024

차선으로 채워진 최선의 하루

여행지에서 우울해진다면

비 오는 날에는 비를 듣는다. 눈이 오는 날에는 눈을 바라본다. 여름에는 더위를, 겨울에는 몸이 갈라질 듯한 추위를 맛본다. 어떤 날이든 그날을 마음껏 즐긴다. 


모리시타 노리코, <매일매일 좋은 날> 


1.

가장 우울해지기 쉬운 시간은 여행 중이라는 아이러니한 사실. 촘촘하게 세운 계획이 틀어질 때, 동행자와 의견이 맞지 않아 감정 소비가 심할 때, 돈을 낭비하고 있다는 우려와 함께 본전 생각이 날 때, 현지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은근히 차별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비가 억수같이 쏟아질 때... 여행지에서 그 모든 순간이 우울해질 우리를 기다린다.

 

여행의 신이 있다면 우리를 내려다보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몰라. 


-이래도 우울해하지 않고 계속 즐겁게 여행할 수 있다고?


2.

80년대 생에겐 익숙한 대만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 한 번도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다는 유명한 피아노씬이 있는 이 영화는 내게 대만과 주걸륜의 존재를 각인시켜 준 작품이다. 그 영화 촬영지가 바로 타이베이 근교 '단수이'다. 단수이를 일정에 넣으며 말할 수 없는 비밀의 주인공 '샤오위(계륜미)'와 '상륜(주걸륜)'의 자전거 씬이 떠오르며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가기 전에 후기를 살펴보니 인생샷이 탄생할 만한 곳도 많아 보였다. 타이베이 최고 일몰을 볼 수 있다는 항구, '위런마토우'는 또 어찌나 예쁘던지. 


단수이에서 페리를 타고 10분 가면 만날 수 있는 섬이 빠리다. '빠리에서 자전거 타고 대왕오징어튀김 먹기'를 여행 위시 리스트에 올려두었다. 대부분 당일치기로 다녀오는 단수이에 호텔도 잡았다. 6박 중 가장 비싼 숙소였다. 우리는 다가 올 최고의 일몰 앞에 모두 들떠 있었다. 


3.

하지만 여행의 신은 우리에게 환상적인 날씨 대신 우중충한 하늘과 비를 선물했다. 여유 있는 일정이 아니었기에 빠리도, 자전거투어도, 일몰도, 유명한 바오할머니 오징어튀김도 모두 우리 여행 리스트에서 지워야 했다. 


아쉬운 마음을 어르고 달래 유명 맛집이 모여 있다는 옛 골목인 '라오지에'로 향했다. 단수이 전통 간식인 아게이 원조집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오늘은 모든 것이 실패하는 날일지도 몰라'라는 불길한 예감을 뒤로하고 옆 가게인 문화 아게이로 들어갔다. 단출한 메뉴는 아게이와 위완탕. 아게이는 유부 만두로 도톰하고 폭신한 유부피안에 당면과 고기, 생선 등으로 이루어진 소가 들어있다. 푹 익힌 후 떡볶이와 상당히 유사한 매콤한 양념을 뿌려 먹는다. 얼얼해진 혀와 상심한 마음을 위안탕 국물로 달랜다. 담백한 국물과 매콤한 아게이의 조화가 좋아서 하나씩 더 시켜 먹었다. 원조집은 아니었지만 무척 맛있었다. 국물을 추가해 오던 춘이 멀리서 우리를 보더니 "와우, 니네 진짜 현지인 같아"라면서 찰칵찰칵. 


빠리 바오할머니의 대왕오징어튀김 대신 단수이 해변가에서 오징어튀김을 샀다. 기대가 없어서였을까. 그 맛을 떠올리면 아직도 군침이 도는데 주인장 얼굴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만들던 맛. '빠리 바오할머니 튀김도 이것보다 맛있을 순 없을걸'이라고 굳게 믿게 만드는 맛. 바삭하고 쫄깃하고 짭짤한데 담백하고 혼자 다하는 맛. 차선의 선택에 탄력 받은 우리는 단수이 대표 간식인 대왕 카스테라도 한국인에게 제일 유명한 곳이 아닌 옆 가게에서 사 먹어보기로 했다. 결과는 대만족. '대만은 맛집이 워낙 많아서 굳이 힘들게 유명한 곳을 찾아갈 필요가 없다'고 하던데 과연 그랬다.


비가 그친 틈을 타 단수이 유명 관광지인 '홍마오청'을 걸었다. 이곳은 1626년에서 1641년까지 단수이를 점거했던 '머리가 붉은(=홍마오)' 스페인 사람들이 만든 요새로 1860년대에는 영국대사관이 상주했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풍의 가구들을 구경할 수 있고 벽돌 건물을 배경으로 인생샷 찍을 스팟이 많은 곳이다. 잠깐 여유를 즐기다 보니 비는 또 거세졌고 우리는 숙소로 조용히 돌아와서 맥주를 마셨다. 


4.

두 번째 대만여행을 앞두고 여행신의 공격은 더욱 전방위적이었다. 여행에 들떠 있던 나는 심각한 잇몸 염증으로 급작스럽게 왼쪽 어금니 두 개를 발치했다. 오른쪽 잇몸 상태도 좋지 않아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잇몸 통증 완화를 위해 어딜 가든 휴대용 워터픽과 치간칫솔을 가지고 다녔다. 평소 엄청난 먹성을 자랑하던 나였지만 치아와 잇몸 상태가 그 모양이니 식욕이 떨어졌고(드디어!), 그다음에는 삶의 의욕도 약해져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무기력 상태가 되었다. 식욕과 생욕은 밀접한 관계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슬픈 마음으로 대만으로 떠났다. 


대만 여행 컨셉 자체가 1일 6끼 정도의 '미식'이었으므로 건강하지 못한 나의 잇몸은 여러 가지로 성가셨다. 질긴 식재료는 두 원씨에게 양보하고 나는 부드러운 것 위주로 먹었다. 고통이라는 것은 참으로 묘하다. 잇몸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았던 나는 제대로 씹을 수 없게 되면서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누게 되었다. 원하는 음식을 마음껏 씹을 수 있는 사람과 그럴 수 없는 사람. 무언가를 거리낌 없이 씹어대는 사람들을 멍하게 쳐다보며 세상에는 잇몸과 치아가 튼튼한 사람들이 참 많구나, 감탄하기도 했다. 여행지에서는 작은 고통에도 취약해지는 내가 더 선명해진다. 


5.

하지만 여행신의 장난에 무턱대고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고통 사이사이에 즐거움을 채우기로 했다. 음식에는 먹는 기쁨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 동행자의 맛 표현에 여느 때보다 귀 기울여 음식의 맛과 식감을 상상하고 그 맛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꼼꼼하게 관찰했다. 


그렇게 발견하게 됐다. 타이베이 용캉제 티엔진총좌빙에서, 닝샤야시장 위엔환벤 미슐랭 굴전 앞에서 넋 놓고 보게 되던 대가들의 손놀림을. 탁탁탁탁 전병을 치며 얇은 바삭함을 완성해 가고 수없이 뒤집으며 바삭한 굴전을 만드는 절도 있는 동작들을.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빈틈없는 절도와 지루한 반복에서 엄청난 자유를 느꼈다. 그들은 저 자리에서 대체 어떤 시절을 견디며 몇 천 개(혹은 몇 만개일지도)의 음식을 만들어 온 걸까. 마음이 온통 맛으로만 차 있던 예전에는 미처 찾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볼 거 많고 할 일 많은 여행지에서 그들을 바라보는데 나는 꽤 긴 시간을 할애한다. 한참을 바라보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맺힌다. 눈물 많기로 원체 유명하지만 한 살 한 살 늘고 있는 나이는 가끔 이상한 장면에 눈물샘을 튼다. 눈물 없는 원씨들이 굴전 앞에서 울고 있는 나를 놀릴 것이 분명함으로 눈물을 들키지 않기 위해 두 눈을 부릅뜨고 있다. 


미슐랭에 등재되어 있는 닝샤야시장의 굴전은 특히 맛있었다. 생긴 건 다른 가게와 비슷해 보여도 부드러운 부분은 더 부드러웠고, 바삭한 부분은 더 바삭했다. 대가들의 시간이 빚어내는 맛이란 이런 것이겠지. 매일 먹어야 한다 해도 기꺼이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질리지 않는 맛. 성치 않은 잇몸도 춤추게 만드는 맛. 


6.

계획한 것들을 성공하지 못하는 여행의 하루는 일상의 평범한 하루보다 더 어두운 회색빛이 되기 쉽다. 하지만 이런저런 시련과 그 시련을 뚫고 나오는 작은 기쁨들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하루는 단단한 아름다움이 된다. 비가 오면 비를 듣고, 원조가게가 문을 닫으면 열린 마음으로 옆 가게로 향하고, 잇몸이 성치 않으면 부드러운 식재료의 매력을 탐색하며 나만의 여행을 한다. 마음먹은 대로 다 되면 그게 무슨 여행이냐, 영화지,라는 마음가짐으로 최고의 선택을 기대했던 자리에 최선의 하루를 만든다. 내 여행의 정답은 내가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대만 여행의 한 조각은 '촉촉한 굴멍'으로 완성되었다. 



단수이 홍마오청에서
로컬 아게이 맛집에서 즐거운 우리
유부만두인 아게이

매일 걷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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