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내버려 두기
문득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말없이 서로를 잠시 내버려뒀다. 어색하지 않은 침묵. 우리는 이미 멀어졌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 기억은 오롯이 진실되다. 그런 순간들이야말로 마음에 갈피되어 오래도록 썩지 않고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최유수, <환상들>
1.
남편 춘의 취미이자 특기는 하늘 찍기다. 특별할 것 없는 하늘을 매일, 꾸준히, 그것도 많이 찍는다. 출근하며 새벽의 하늘을 담고 움직이는 구름과 색의 변화를 한자리에서 몇십 분간 타임랩스로 담아내기도 한다. 가끔은 하늘멍을 때리며 비행운을 만들어내는 비행기 정보를 검색한다.
매일 비슷한 하늘을 바라보고 기록하는 것. 처음에는 따분하고 지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얼마나 재미있는 게 많은데. OTT에 새로 뜬 코미디 프로그램도 봐야 하고,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 새로 오픈한 커피가 맛있는 카페, 다양한 이벤트를 여는 팝업 스토어, 30초 만에 자극적인 웃음을 주는 쇼츠까지, 말이다.
그러니 예전의 나라면 여행지에서 하늘을 멍하게 바라보지 않을 것이다. 여행지에 재미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쩝.
하지만 요즘의 나는 대체로 하늘을 보고 지루한 흐름을 보여주는 하늘을 찍는다. 왜일까. 역시 나이가 들어서, 어머니들의 카카오톡 프로필이 꽃으로 뒤덮이는 것과 비슷한 흐름일까. 모르겠다. 그저 하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한 공간, 한 도시를 이해하는 느낌이 든다.
핫플레이스보다 그곳에서 만난 하늘의 모습으로 장소를 기억하고 있다.
2.
타이베이 사대야시장. 대만의 떡볶이라고 불리는 '루웨이'를 먹고 나왔더니 하늘이 온통 핑크색이었다. 최근에 그 정도로 진한 핑크빛 하늘을 본 적이 없기에 우리는 흥분했다. 끝내주는 하늘을 작정하고 기다린 단수이와 타이베이 101 타워에서는 볼 수 없던 광경이었다. 각자 몇 십장의 사진을 찍고 서로의 모습까지 담았다.
타이난 호텔 객실에 들어가자마자 본 하늘도 장관이었다. 호텔 창문이 마치 영화관의 거대한 스크린 같고, 선셋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하늘에 진심인 원씨 부녀는 다음 일정도 잊고 한 마리 파리처럼 객실 창문에 달라붙어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댔다. 타임랩스를 제대로 찍기 위해 호텔 컵까지 동원했다. 나는 난리 블루스를 치며 하늘을 찍는 그들을 찍었다. 호텔에 짐만 간단히 풀고 유명 레스토랑에 가기로 했지만 재촉하지 않았다. 하늘을 찍을 때 서두르지 않는 것은 우리의 불문율이다. 다음 일정은 잠시 미루고 별말 없이 서로를 내버려 두기. 아름다운 하늘에 갇혀버린 듯 황홀한 지금 이 순간이 타이난 여행의 강렬한 썸네일이 될 테니.
다음날 타이난 안평 지구에서는 한없이 높고 푸른 여름 하늘을 만났다. 더위와 햇살에 헉헉거리면서도 광활한 하늘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하늘은 거대하게, 나는 소박하게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이런 하늘을 보여주는 도시를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3.
여행의 마지막 날, 야경 스팟으로 유명한 가오슝 시립 도서관에서 밤하늘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저녁부터 비가 세차게 내렸고 여행의 막바지라 피곤했다. 갈까 말까 고민하던 내게(사실 마음은 이미 호텔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춘이 용기를 줬다. 이 도시에 또 올 일이 없을지도 모르는데 가보자. 잠들어가는 내 영혼을 깨우는 소리. 마음이 여리고 귀차니즘 자체인 여행자에게는 이렇게 동선을 확실하게 정해주는 동행자가 필요하다.
거리 곳곳의 물웅덩이를 요리조리 피하며 가오슝 시내를 10분쯤 걸었을까. 커다란 조명이 켜진 것처럼 왼쪽 뺨 근처가 갑자기 환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어두운 도시를 밝히는 가장 밝은 빛, 가오슝 시립도서관이었다.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뛰었다. 안 왔으면 어쩔 뻔했어.
매력 넘치던 시립도서관을 한층 한층 올라 드디어 도서관 루프탑에 도착했다. 작은 우산 하나밖에 없었기에 우리는 한 명씩 돌아가며 가오슝의 밤을 담아오기로 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그곳에는 우리뿐이었다. 내가 먼저 출발해 가오슝의 깜깜한 하늘과 동서남북을 꼼꼼하게 살폈다. 어두운 데다 우산까지 들어야 해서 촬영이 쉽지 않았다. 하늘에 진심인 두 원씨들이 나보다 더 좋은 사진을 찍어줄 거라 믿으며 계주 경기에서 바통 터치하듯 우산을 건넸다. 테라스 입구에서 고개를 빼꼼히 내민 채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한 쌍의 부녀가 어찌나 귀엽던지. 그날 밤에는 자신이 찍은 야경 사진이 더 괜찮다고 옥신각신하며 잠에 들었다.
4.
하늘이 갑자기 멋져졌을 리는 없다. 하늘은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 번잡한 세상을 채워주는 여백으로, 다른 것을 더 빛나게 비쳐주는 은은한 배경으로. 그리고 어쩌면 진짜 주인공으로. 그것을 알아차리는 내 마음이 변했을 뿐.
하늘을 제대로 바라보기 시작한 뒤부터 내 여행은 조금 더 풍성해졌다. 그럴 때마다 드는 생각. 삶에서 내가 놓치고 있는 것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오늘도 번잡한 내 마음을 하늘 아래 뉘인다.
매일 걷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