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순간에 딱 맞는 하나의 노래
가끔은 현지의 소리보다, 이 순간에 딱 맞는 하나의 노래가 절실할 때가 있다. 적절한 순간에 맞이한 음악 혹은 적막은 여행지의 감상을 배가시킨다. 장소와 상황에 따라 걸맞은 소음과 소리를 고르는 것은 여행자의 몫이다. 언제 듣고, 언제 안 들을지는 내가 선택하면 그만이다.
사과집, <싫존주의자>
1.
현지의 생생한 소리를 온몸으로 흡수하는 것은 여행자의 특권이지만 가끔은 그곳에 어울리는 단 하나의 배경 음악을 들으며 걷고 싶다. 바르셀로나에서 조지 에즈라의 '바르셀로나'를, 포르투에서 자우림의 '고잉홈'을 들었던 것처럼. 특히 혼자 하는 여행이라면 더더욱 나만의 OST가 절실하다. 그곳의 감성을 오롯이 담아낸 노래와 함께 이국의 거리를 걷다 보면 리베카 솔닛이 표현한 '거리를 파괴하는 산책자'가 된 듯한 느낌. 그 시간 속에서 풍경과 마음은 종종 색다른 속살을 보여주곤 한다.
대만 여행에 어울리는 음악은 무엇일까? 대만 대중가요에 정보가 별로 없던 나는 고민할 필요조차 없었다. '상친자(=상친놈, 대만 대표 드라마 상견니에 미친 사람들을 이르는 신조어)'까지는 아니지만 내게 대만은 드라마 <상견니>의 도시. 그러니 이 도시의 첫 배경음악은 상견니 OST인 'Last Dance', 'Someday Or One Day', '想见你想见你想见你'가 되어야 한다. 경쾌한 멜로디의 '一天'도 발걸음을 가볍게 해준다. OST를 들으며 타이베이 골목골목을 걷고 있으면 어디선가 상견니의 남자 주인공 왕치안성이 (발을 절뚝거리며) 걸어올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대만이 배출한 최고의 스타, 주걸륜의 노래도 빠뜨릴 수 없다. 주걸륜은 한국에서 꽤 유명했던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의 히로인이자 내가 처음 알게 된 중국 가수다. 특히 타이베이 근교 단수이는 이 영화의 촬영지. 한 번도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다는 유명한 피아노 대결 신이 영화의 백미다. 주걸륜의 수많은 히트곡 중에 특히 많이 들은 곡은 '说好不哭', '下课等你', '晴天'이다.
디화제의 보물 같은 쿠오 서점에 앉아 있는데 가수 이영호(=롱하오리)의 노래 '不将就(Stubborn Love)'가 흘러나온 순간 추억 상자가 열려 버렸다. 롱하오리 노래를 참 많이 들었던 베이징 시절이 생각나면서 마음이 몽글몽글. 노래는 '戒烟(Quit Smoking)'과 'If I Were Young'으로 이어졌다. 타이베이의 낯선 서점에서 그의 노래를 들으며 대만 꿀 맥주를 마시는 기분은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찾은 것과 비슷한 충만함이었달까.
우리나라 영화를 리메이크한 대만 영화 <여름날 우리>의 OST도 추천한다. 이 영화 역시 상견니의 '허광한' 배우님(=청량함의 인간화)이 나오는데 한 달 치 눈물이 필수 준비물이다. 대만 기록을 정리하며 '不遗憾', '离开你以后'라는 노래를 수 백번 들었다.
타이중과 타이난에서는 우버 택시 기사들의 감성에 반했다. 타이중 펑지아에서 호텔로 돌아오던 길, 택시에 울려 퍼지던 노래는 '想你的夜'. 노래가 좋다고 감탄했더니 기사님이 '관철'이라는 가수가 부른 노래라는 걸 알려줬다. 이 노래를 들으며 바라보는 타이중의 밤은 어찌나 공허하면서 아름답던지.
그곳의 정서를 담아내는 음악으로 여행의 순간은 조금 더 생기로워진다.
2.
플레이리스트의 역할은 여행이 끝나면 비로소 더 빛을 발한다. 집으로 돌아오면 나는 동행자의 모든 사진과 영상을 받은 후 플레이리스트를 크게 들으며 그들만의 여행 기록을 염탐한다. 그것은 정말이지 큰 기쁨이다. 춘이 찍은 우리의 모습, 아이의 독특한 시선으로 담은 그곳의 풍경에는 내가 미처 모르고 지나쳤던 여행의 찰나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나는 자주 웃고 자주 놀란다.
우리가 여행을 기억하는 특별한 방법. 그것은 음악과 함께 그 도시를 걷고, 음악을 통해 떠나온 도시를 떠올리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그때 여행자의 마음을 빌려 한 번 더 여행할 수 있다. 메모앱 에버노트의 광고 카피 'Second Brain'을 살짝 빌려보자면 'Second Trip' 정도의 느낌이랄까.
대만 감성이 듬뿍 담긴 음악을 들으며 이런 길을 걸었더랬다.
매일 걷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