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각종 사건 사고를 대하는 우리의 마음가짐
1.
여행의 바보 비용. 여행 중에 응당 지불해야 하는 비용으로 여행 초반에 발생되는 경우가 잦지만 우리에게는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친구 같은 존재.
개인적으로 자유여행에서 가장 난이도가 높은 것이 공항에서 숙소까지 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영어가 잘 통하지 않는 중화권이라면 더더욱. 우선 아무 택시나 잡아타면 바가지를 쓸 가능성이 높고 우버를 이용해도 차가 우리를 기다리는 정확한 지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 중국어를 웬만큼 해도 낯선 장소에 대한 설명을 찰떡같이 알아듣기란 꽤 어렵기 때문.
기사님과 우리 대화의 대략적인 흐름
-4번 주차장에 있어요.
-4번 주차장이 어딜까요?
-3번 주차장 옆이요
-3번 주차장은 어딜까요?
-출국장에서 쭉 나오다 오른쪽으로 꺾고, 왼쪽으로 조금 오다가, 다시 오른쪽... 블라블라
2.
첫 번째 대만 여행. 송산공항에 떨어진 우리는 친절한 기사님 덕에 야외 주차장에 있던 우버 택시를 비교적 빨리 찾아냈다. 심지어 영어도 잘하시는 기사님. 호텔도 기대보다 훨씬 좋았다. 오랜만의 중화권 여행에 들떠있던 나는 춘이 체크인하는 사이 호텔과 야경 사진을 백 장 정도 찍고 있었다. 그런 내게 머쓱해하며 다가온 춘.
-여기 암바 타이베이 중산점이 아니라 송산 지점이래.
공항에서 너무 가깝다 했다. 아고다에서 본 숙소 이미지보다 건물 자체가 너무 높고 고급스럽다 했다. '운수 좋은 날'스러운 전개의 마무리였다. 우리보다 당황하며 미안해하는 송산 지점 스태프를 뒤로하고 우리는 다시 우버를 불렀더랬다. 대만 여행의 바보 비용은 생각보다 훨씬 빨리 우리를 찾아왔지만 덕분에 암바 타이베이 송산이 중산 지점보다 훨씬 더 좋다는 꿀 정보를 입수했다.
3.
타이베이 근교에 위치한 온천이 유명한 베이터우. 전날 단수이에서 날씨가 별로였기에 베이터우의 따뜻한 온천과 햇살을 기대하며 예약한 호텔에 체크인을 하러 갔다. 체크인을 하던 춘이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면서 내게 왔다.
-예약할 때 혹시 체크인 시간 확인해 봤어?
무언가 일이 벌어졌음을 알려주는 질문. 예약인원을 잘못 입력해서 큰돈을 추가 지불했던 오키나와 호텔의 악몽이 살짝 머리를 스치고.
-아니? 체크인 시간은 신경도 안 썼는데? 당연히 3시 아닌가?
-...우리 체크인 시간이 밤 11시래.
베이터우에 숙박을 하지 않고 온천만 즐기는 당일 프로그램이 있어 체크인 시간이 다양했던 것. 몇 번의 실수를 통해 날짜와 인원수는 꼼꼼하게 확인하는 습관이 붙었는데 체크인 시간이 나를 배반할 줄이야. 오후 6시도 아니고 밤 11시 체크인은 상당히 터프했지만 비용을 더 지불해도 빈 방이 없다. 나는 황당해하는 동행자 둘에게 쿨하게 사과하고 어차피 우리 일정이 스린야시장에서 10시 이후 돌아오는 거였다고 우겼다.
호텔을 뒤로하고 터덜터덜 걸어내려가는데 갑자기 깔깔 웃음이 났다. 체크인 시간이 밤 11시인 줄도 모르고 싸게 방 구했다고 좋아했던 나... 진짜 바보 아냐?
좋은 여행이란 원래 잊을 수 없는 추억이 가득한 여행이야,라고 말하며 정신승리했지만 심이는 요즘도 가끔 나를 놀린다.
-엄마 그 사건 기억하지? 202312 베이터우 밤 11시 체크인 사건. (후덜덜)
4.
평소 동선의 효율성을 매우 중요시하는 편이지만 타국에서는 외국인만이 구현 가능한 엉망진창 동선을 자주 선보인다. 구글 정보와 다르게 문을 굳게 닫은 스팟도 많고 막상 갔더니 내가 생각한 느낌이 아니거나, 사람이 너무 많거나 등의 다양한 이유로 동선이 꼬여버리는 것. 그리하여 A에서 B로 갔다가 다시 A 근처 C로 오는 여정이 반복된다. 서울로 비교해 보자면 종로에서 양재를 갔다가 다시 을지로로 오는 느낌이랄까? 지리에 밝은 심이는 "여기 아까 온 곳 바로 옆 아니야?"라고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어, 맞어...)
타이난에서 1분 후 도착이라는 구글 지도 정보를 믿고 정류장에 서 있는데 오지도 않은 버스가 갑자기 사라지고, 43분 후 도착이라고 떴다. 타이중에서도 3분 후 도착이라던 버스 정보는 불현듯 38분 도착으로 바뀌었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라 그냥 걸어가자고 아이 등을 떠밀었다. 이동 수단의 속도와 그 공간을 이해하는 깊이는 반비례하는 법이니 역시 걷는 게 최고지, 암요.
나는 바보 비용 지불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사랑하는 작가 하루키의 문장을 마음에 늘 품고 있다.
요컨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행은 예정에 없던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즐겁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당초 계획대로 순탄하게 진행된다면 여행하는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김영하 작가의 문장도 있다.
계획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성취하고 오는 그런 여행기가 있다면 아마 나는 읽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재미가 없을 것이다.
확실한 건 예정에 없던 길을 걸으면 새로운 풍경이 보이고 예정에 없던 곳에 가면 새로운 이야기가 생긴다. 여행의 필수 덕목인 바보 비용과 끝없는 정신승리를 즐기며 우리는 비로소 진짜 여행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