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느긋한 여행

나태와 무기력 사이

by 심루이

나태와 무기력 사이

언제나 멀티태스킹을 즐기며 살아온 나. 그냥 전철만 탄 적? 없다. 그냥 설거지만 한 적? 없다. 그냥 요리만 한 적도 없다. 항상 무언가를 하더라도 눈과 귀 등 쉬고 있는 다른 감각을 이용해 또 다른 무언가를 하며 살았다. 성공에 대한 야망으로 24시간을 48시간처럼 활용했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가장 큰 이유는 잠 때문이다. 자는 게 너무 좋아서, 고 3 때도 7시간 이상 수면 시간을 포기할 수 없었던 나. 많이 자기 위해서는 깨어 있는 시간에 해야 할 것들을 빨리 해치워야 했기에 멀티태스킹의 귀재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 (잠과 키의 상관관계에 대해 살아있는 증거가 바로 나다. 어릴 때부터 끝내주게 잘 잔 나만 우리 집에서 평균을 훌쩍 뛰어넘는 기럭지를 가지게 된 것이다. 우유도 전혀 먹지 않았음) 어쨌거나 이런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너 왜 그렇게 부산하게 열심히 살아?"라는 말을 종종 듣기도 했다.


2025년에는 처음으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이 많았다. 40년 넘게 제일 가까운 곳에서 나를 관찰한 스스로가 보기에 그건 좀 의아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나답지 않은 나'를 꾸짖었다. 꾸짖어도 효과가 없어서 '이러다 말겠지...' 생각하며 조금 기다리기로 했다. 묵직한 기다림도 소용 없어서 꽤 오래 나태와 무기력 사이를 헤엄쳤다. '내가 이렇게 나태해지다니 말도 안 돼'의 입장과 '그동안 스스로를 풀가동하며 살았으니 좀 쉬어도 돼'의 입장은 매일 내 안에서 치열하게 싸웠다. 싸우거나 말거나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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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 비에이 (4).jpg 홋카이도 비에이 풍경

다시는 못 만날 아침처럼

그런 내가 유일하게 부지런했을 때는 여행의 아침. 여행지에서는 마치 다시는 아침을 만날 수 없는 사람처럼 열심히 아침을 만끽한다. 두 시간 정도 도시를 걷다 맛있는 아침을 먹고 그 이후는 또 느긋하게 보내기. 최근 나의 여행은 아침의 다른 이름이었다.


홋카이도 여행에서도 아침 산책은 이어졌다. 시작은 좋지 않았다. 쓰나미를 걱정하며 스산한 하코다테의 아침을 걷고 또 걸었더니 당도한 외국인 묘지. 묘지 초입에서 '어디 올 테면 와 봐' 느낌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던 고양이가 무서워서 정작 외국인 묘지에서 볼 수 있다는 아름다운 바다뷰는 보지도 못하고 돌아왔다. 하지만 나의 (여행지 한정) 아침 사랑을 막을 수는 없지.


아침 산책 코스로는 역시 시장이 제격이다. 하코다테의 아침시장과 삿포로의 니조시장. 유명 카이센동 맛집은 아침부터 웨이팅이 길었고 나는 새벽부터 생업을 시작한 사람들과 아침을 즐기는 여행자들을 구경하며 오늘의 순간들을 줍는다.


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아침을 보여주는 도시가 있는데 아사히카와가 그랬다. 밤의 아사히카와는 정장 입은 40대 아저씨의 느낌이었다면 아침의 아사히카와는 아사히야마의 펭귄처럼 귀여워졌다. 가게 셔터마다 한가득 그려진 깜찍한 그림들. 이쯤되면 아사히카와의 퍼스널컬러는 귀여움인지도.

KakaoTalk_20260109_150319321_12.jpg 삿포로 니조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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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kaoTalk_20260109_145744527_24.jpg 귀여움 한 가득이던 아사히카와의 아침

다그치지 않는 여행

예전과는 다른 꽤 느긋한 여행 패턴. 김연수 작가가 여행 에세이 <언젠가, 아마도>에 쓴 문장을 읽는다. '여행의 목적은 공간의 이동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세계를 바꾸는 데 있다는걸. 그러므로 여행자란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멍한 눈빛으로 그저 풍경을 바라봐도 괜찮다. 어떤 시간도 오롯이 낭비로'만' 쓰이지 않는다는 것이 내 결론이니까. 가끔은 그저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로 칭찬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KakaoTalk_20260110_203619908.gif 한참 바라본 비에이마을

매일 걷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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