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하고 구체적인 사랑

끝내주는 남편

by 심루이

작년 여름 처음으로 내 마음이 완전히 무너졌을 때 춘은 섣불리 공감하거나 위로하지 않았다. 혹여나 휘청하고 쓰러지면 붙잡아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머물며 그저 자기 할 일을 했다. 웍을 돌리며 음식 냄새를 내거나 오늘 저녁의 선선한 바람이 산책에 무척 잘 어울린다고 말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출근한 춘과 함께 쓰레기봉투들도 사라져 있었다. 그의 성실한 사랑에 감탄하다 보니 절망이 옅어졌다. 나도 피상적인 고백 말고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누군가를 살아가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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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사업 부도로 춘의 청소년기는 쉽지 않았다. 20년째, 파도 파도 새롭게 등장하는 어려웠던 시절의 장면들. 담담하게 말해서 더 슬픈 기억들. '주위에 내 편이 아무도 없다'라는 감각을 그는 너무 일찍 배웠다. 그때 그 소년 곁에 내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랬다면 옆구리 한 번 쿡 찌르며 깔깔 웃다가 꼭 안아주며 이렇게 말했을 텐데. "힘내, 넌 뿌리가 단단한 어른이 되고 끝내주는 아내를 만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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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 작가의 문장을 떠올린다. "슬픔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우리 몸 어딘가에 쌓인다. 하지만 기쁨도 쌓인다. 슬픔이 쌓인 자리에 기쁨을 계속 덧칠하며 사는 것이 인생일지도 모른다." 그의 몸 어딘가에 기쁨을 계속 덧칠하는 끝내주는 아내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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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해결이 취미인 사람. 20년째 매일 보내는 점심 잘 먹으라는 문자로 AI 열풍 훨씬 이전부터 로봇인지 의심받은 사람. 두부 사 올게, 하고 나가서 13개의 식재료를 추가 구매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여행 가기 전에 집안 곳곳을 영상으로 찍어두는 꼼꼼한 사람. 나와 정반대인 사람. 아주 다르면 통한다는 것을 알려준 사람.


기어코 딸에게 '아빠 같은 사람 잘 찾아봐, 하지만 쉽지는 않을 거야'라고 말하게 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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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엉성하고 빈틈 많은 나를 만난 뒤 더욱 어른이 되었다. 나를 계속 철없고 맑게 살게 하기 위해 그는 더더욱 어른이 된다. 끝내주는 남편이 된다. 나도 언젠가 그에게 너른 언덕이 되어 줄 수 있을까. 홋카이도 눈밭에서 눈썰매를 타며 어린아이처럼 웃는 춘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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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걷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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