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트라브샨~두샨베 (Istravshan~Dushanbe) | 타지키스탄
2023.07.07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던 어제와 다르게 하늘이 맑게 개었다. 비가 온 다음날의 맑고 푸른 하늘은 평소보다 훨씬 더 반갑다.
앞으로 목적지인 두샨베까지 약 230km 남았다. 지도를 살펴보니 업다운이 심했고, 지형과 내 체력을 고려해 대략 5일내로 도착하는 것이 첫번째 목표였다. 하지만 이미 후잔트 호스텔에서 만났던 벨기에 여행자에게 비극적인 소식을 들은 터였다. 두샨베에서 후잔트로 넘어왔다는 그는 두샨베까지 가는 길에 긴 터널이 두어개나 있으며 그 중 하나인 'Anzob 터널'은 악명이 높기로 자자하다고 했다. 터널 길이만 무려 5km인데다가 더욱 최악인 건 터널 내부에 불빛이 하나도 없다고.. 몰랐으면 몰랐지 앞으로 가야할 길에 무지막지한 오르막이 있으며 생각하기도 싫은 터널까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다리가 더더욱 무거웠다.
중앙아시아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대한민국을 느낄 수 있었다. 장을 보러 들어간 동네 슈퍼에 진열대 한 칸을 전부 차지한 각종 초코파이라던가, 점심을 먹으려고 들어간 작은 햄버거 집 세면대에서 발견한 한글이 적힌 수건이라던가. 이들의 생활 곳곳에서 불쑥불쑥 대한민국의 자취를 발견할 때마다 놀라우면서도 신기했다.
자전거 짐 패킹이 깔끔하게 잘 된 날이면 괜시리 사진을 찍고 싶어진다. 이번 여행에는 랙팩을 가져오지 않았다. 용량이 49L인 랙팩에는 꽤나 많은 짐이 들어가서 텐트며 매트며 각종 캠핑도구를 넣어 놓기 좋다. 게다가 방수가 짱짱해서 비 오는 날에도 젖을 걱정없이 라이딩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 가방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안을 쓸데없는 걸로 채워넣기 마련이라서 결국엔 편하자고 가져온 물건이 거추장스럽고 불편해지는 이상한 상황이 연출된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는 고민하다가 과감히 랙팩을 빼고 텐트와 매트만 리어패니어 위에 얹고 다녔다. 비가 오는 날에는 가지고 있는 방수포로 텐트를 둘둘 말아 임시로 방수 기능을 입혔다. 약간 불편하긴 하지만 불편하면 불편한대로 또 이어가는거지 뭐.
어느새 고도가 1,000m를 넘겼다. 대한민국에선 높은 걸로 유명한 산이나 올라야 닿을 수 있는 고도에서 아무렇지 않게 자전거를 타고 있다는 게 새삼 새롭게 느껴졌다. 앞으로 갈 파미르고원의 평균 해발고도는 약 5,000m라고 한다. 자전거로 그 길을 달린다는 게 어떤 느낌일지 가늠도 되지 않는 숫자이다.
얕은 오르막이 계속 된다. 다리가 무거워 자꾸만 멈춰서서 쉬었다. 여러번의 자전거 여행으로 깨달은 사실은 엄청난 경사의 오르막보다 고만고만하게 얕은 경사의 오르막이 훨씬 더 힘들다는 사실이다. 이정도 쯤이야 시원하게 쭉쭉 달릴 것 같은데 속도는 나지 않고, 지난한 오르막이 계속되다 보면 결국 몸의 고통보다는 마음의 짜증이 먼저 울컥 올라온다. 짜증이 올라왔음을 인지하는 순간부터 급격하게 몸이 쳐지기 시작한다. 끌바의 시간이다. 이런 얕은 오르막에서 끌바를 하는 스스로가 마땅찮다.
그 와중에도 푸른 하늘과 생경한 풍경이 멋스러워서 멈춰서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뒤쪽에서 올라오던 차가 클락션을 울리며 내 옆에 멈춰섰다.
엇? 당신들이 왜 여기에?
놀랍게도 어제 라이딩하며 만났던 경찰들이었다. 먹구름이 가득 끼기 시작하여 비가 곧 내릴 것 같아 페달을 열심히 밟아가며 라이딩을 하는데 그런 내 옆으로 차 한대가 천천히 따라왔다. 경찰차였다. 경찰차라니.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긴장이 됐다. 무슨 일이냐 물어보니 그저 자전거 여행자가 신기해서 말을 걸어봤단다. 힘들지 않냐, 어디로 가냐 등의 짧은 대화가 끝이었던 만남이었다. 그런 그들이 지금 다시 내 눈앞에 있는 것이다. 아마 이 근방을 순찰하는 순찰차였는지 그들도 나를 발견하고 반가워서 다시 한번 말을 건 것이다. 한번 본 얼굴이라고 이번에는 나도 꽤나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서로 반가운 마음에 그 자리에 서서 별 의미없는 간단한 대화를 주고받다가 갑자기 나에게 밥을 사주고 싶다며 식당으로 이끌었다. 밥을 먹은지 얼마 되지 않아서 괜찮다고 몇 번이나 손사래를 쳤지만 그들은 완강했다. 계속되는 거절 또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그들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니 작은 마을의 한 식당이었다. 식당에는 다양한 메뉴의 음식이 진열되어 있었고 대학교의 학생식당처럼 원하는 음식을 골라 마지막에 계산을 하는 방식이었다.
뭐가 뭔지 모르는 나는 눈치껏 곁눈질을 해가며 음식을 골랐다. 배가 부른 상태라 최대한 적게 고르려고 했으나 이것도 맛있고, 저것도 맛있다며 이것저것 다 골라주는 경찰관들의 친절함 덕분에 쟁반 한가득 음식이 쌓였다.
손님 대접이 극진한 중앙아시아에선 음식을 남기는 것이 실례가 될 수도 있다고 하여 남기지 않고 싹싹 먹으려고 꽤나 노력했지만 마지막엔 배가 터질 것 같아 결국 조금 남길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까지 노력하여 음식을 먹은 것이 얼마만인지.. 그들이 꼭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 정말 열심히 먹었어요..!
식사 후에 안전한 여행을 기원하며 기념사진도 한 장 찍었다. 정말 친절한 타직인들.
안그래도 몸이 축축 쳐지는데다가 음식까지 가득 들어가버리니 천근만근이 되었다. 천천히 페달질을 하며 힘겹게 앞으로 나아가는데 도로 옆 넓은 벌판에서 양털을 깎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쉬이 볼 수 없는 풍경이 내가 모르는 어느 곳에서는 평범한 일상이라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할 때마다 신기하다는 생각과 동시에 역시 세상은 넓다 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오늘따라 정말이지 몸이 무거웠다. 아무리 힘들어도 이렇게까지 몸이 쳐지고 컨디션이 떨어지진 않는데 뭔가 이상하다. 달력을 살펴보니 생리 예정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면 그렇지.
끝없이 이어지는 얕은 오르막에, 내리쬐는 햇볕에, 생리가 얼마 남지 않아 천근만근인 몸까지 쓰리콤보로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끌바 또 끌바. 간간히 지나가는 자동차를 잡아타고 두샨베까지 날아가고 싶은 생각이 어찌나 절실하던지. 하지만 소심한 나에게는 아무리 몸이 힘들어도 자동차를 세울 배짱이 없었다.
고개를 푹 떨구고 애써 자전거를 끌고 가다가 문득 고개를 드니 갓길에 멈춰선 차가 보였다. 길가 간이 매대에서 무언가를 산 모양인지 트렁크를 열고 물건을 집어넣던 남자가 그 옆을 지나가는 나를 보더니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너 어딜가냐?
-두샨베에 가는데요.
-이걸 타고 두샨베에 간다고? 미쳤네 미쳤어
-두샨베 뿐만 아니라 파미르를 지나 키르기스스탄을 넘어 카자흐스탄까지 갈 거예요.
-하하하 얘가 정말 미쳤군! 다들 이리와봐! 얘가 글쎄 이걸 타고 파미르를 가고 카자흐스탄까지 갈 거래!
-뭐?! 카자흐스탄?! 와우!!
-(다들 엄청난 리액션이다..)
-우리 지금 두샨베까지 가는데 같이 가자. 차에 타!
호탕하게 웃던 남자는 성격 역시 호탕했다. 갑작스런 그의 히치하이킹 권유에 나는 당장이라도 날아갈 것만 같았다. 이런 것이 바로 무언가를 강하게 원하면 결국 그것을 끌어들인다는 시크릿의 끌어당김 법칙이던가?
몸도 힘들었는데 잘 되었다 싶어 거절않고 제안을 수락하려는데 아차, 자전거를 넣기에는 차 트렁크가 턱도 없이 작았다. 그럼 그렇지 끌어당김의 법칙은 개뿔.. 애써 실망한 기색을 감추는데 잠시 고민하던 남자가 갑자기 지나가는 트럭을 붙잡아 세우더니 무언가 흥정을 하기 시작했다.(그렇게 보였다.) 얘기가 잘 되었는지 내 자전거를 그 트럭에 싣기 시작했고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내가 그 앞을 막아섰다.
-내 차에는 네 자전거를 못 실어. 이 차가 두샨베로 간대. 네가 갈 곳 주소를 알려주면 이 차가 자전거를 거기에 가져다 줄거야.
이게 다 무슨 소린가? 지금 이게 가능하단 말인가? 혹시라도 저 트럭이 내 자전거를 이상한 곳에 가져다 놓으면? 아니 자전거를 가져가버리면?
머릿속에서 당황스러움과 온갖 걱정이 뒤엉켜서 혼란스러운 와중에 남자의 굳건한 눈빛을 믿어보기로 했다. 여기는 그들의 홈그라운드고 나는 낯선 이방인이니 내가 모르는 그들만의 무언가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가능한 일이니 실행했을 거고, 무엇보다 지금 내 상태로는 더이상 자전거를 탈 수가 없다. (타고 싶지 않다.)
다행히도 미리 찾아놨던 두샨베의 호스텔이 있어 주소를 트럭 기사에게 알려주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사히 두샨베에서 자전거와 조우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 뿐이다.
알고보니 남자와 그 일행은 가족이었다. 후잔트에서 있던 친척의 결혼식에 다녀오는 길에 나를 만났다고 했다. 남자의 이름은 나브루스.
두샨베까지 가는 길에 식당에 들러 샤슬릭과 갈비찜 비슷한 고기 요리도 먹었다. 무척이나 감사한 인연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왔더니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닌 듯 현지인들도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찍고, 영상을 찍었다. 이 빗길에 자전거를 타야할 뻔 했다니... 천만다행이었다.
차를 타고 가면서 내내 히치하이킹을 권유한 나브루스에게 무한한 감사를 보냄과 동시에 그 권유를 거절하지 않은 나 자신을 칭찬하고 또 칭찬했다. 엄청난 오르막도 오르막이지만 악명높은 Anzob 터널을 실제로 지나가보니 도저히 여기는 자전거를 타고 지나갈 수 없었겠다 싶었다.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없었다면 그곳은 암흑 그 자체였다. 자전거를 타고 들어갔다간 바로 개죽음 당했을 게 뻔했다. 이쯤되면 신이 날 살리려고 이 차를 보낸 것이 아닌가 생각할 지경이었다.
두샨베까지 가는 길에 가장 높은 고갯길에 잠시 멈춰서서 사진도 찍었다.
차를 타고 와서 그런가 마냥 아름답게만 보이는 풍경이었다. 만약 여길 자전거를 타고 왔다면 이 풍경이 어떻게 보였을지...
두샨베까지 편안하게 올 수 있도록 도움을 준 호탕한 그 남자, 나브루스.
나브루스가 아니었으면 두샨베까지 얼마나 고생을 하며 갔을지 상상을 하니 마음 깊이 진한 감사함이 올라왔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 길도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과연 내가 파미르를 무사히 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해내야지, 그러려고 여길 왔는걸. 나에게 내민 도움의 손길엔 감사함을, 내 앞에 놓여진 도전적 모험에는 용기를 가지고 나아가보자.
감사합니다 나브루스와 가족들 그리고 낮에 만난 경찰관 분들.
당신들의 호의를 원동력 삼아 또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
그나저나 자전거는 과연 어떻게 됐을지..?